[스피노자의 사랑] ㉓ 공동체가 소수자를 더 발명해야 하는 이유

소수자라고 하면 사회적 약자나 양적 소수, 피해자를 연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알고 보면 소수자는 우리 자신을 풍부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공동체의 차이와 다양성을 증폭시켜 주는 존재이면서, 사랑과 욕망, 정동, 돌봄의 흐름을 강렬하고 반복적이게 만들어주는 특이점이기도 하지요. 어떤 공동체나 집단에 아이, 장애인, 노인, 성소수자 같은 소수자가 등장하면, “소수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암묵적인 태도가 형성되고, 이에 따라 관계망의 좌표를 수정합니다. 여기서 ‘문턱이 있는 유토피아’가 될지, 열린 공동체로서의 배치를 가질지 결정됩니다. 그런 점에서 소수자는 공동체에 심원한 변화를 주는 특이점입니다.

내 안의 소수성을 발견하기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이웃들이 쑥덕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아파트 계단 청소를 하시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청소부는 몽골 분이었는데, 한국말을 거의 못 하고 간단한 인사말만 겨우 주고받고 있었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몽골 여성에 대한 뜬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대부분 추정의 말들이었지요.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들을 타박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소소한 말다툼처럼 지나갔습니다. 결국 몽골 여성이 해직되는 것으로 상황은 끝이 납니다. 사실 타국에서 이렇게까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질적인 사람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우리 주변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고민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수자라고 하면 사회적 약자나 양적 소수, 피해자를 연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소수자는 알고 보면 우리 자신을 풍부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공동체의 차이와 다양성을 증폭시켜 주는 존재이면서, 사랑과 욕망, 정동, 돌봄의 흐름을 강렬하고 반복적이게 만들어주는 특이점이기도 하지요.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장애를 한두 개쯤 갖게 된다. 장애인 되기는 나이에 따라 더 밀접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셈이다. 사진출처 : Marcel Strauß

여기서 특이점이라는 어려운 개념이 다시 등장하는군요. 예를 들어 어떤 공동체나 집단에 아이, 장애인, 노인, 성소수자 같은 소수자가 등장하면, 문제제기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상 소수자에 대한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공동체의 관계망에서 대두됩니다. 이에 따라 “소수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암묵적인 태도가 형성되고, 이에 따라 공동체 사람들은 이후 관계망의 좌표를 수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소수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들만의 리그라고 할 수 있는 ‘문턱이 있는 유토피아’가 될지, 아니면 열린 공동체로서의 배치를 가질지가 결정됩니다. 그런 점에서 소수자는 공동체에 심원한 변화를 주는 특이점입니다.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와 제도는 사실 분노를 유발하는 수준입니다. 그저 복지 수혜와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거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주변부 사람이거나, 효율성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풍경 정도로 지나쳐야 할 사람이거나, 더 심하면 차별과 배제를 당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는, 그들이 존재 자체로서 주류사회를 향해 던지는 문제 제기만큼이나 체제와 시스템에 불가역적인 변화를 가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소수자 되기는 소수자를 그저 연민과 돌봄의 대상으로 보는 태도가 아니라, 소수자가 갖고 있는 소수성 자체를 삶의 내재성의 일부로 받아들여 주류사회와 제도, 시스템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하는 것이 됩니다.

모두가 부랑아다!

에피소드의 시작은, 학위논문을 마치고 한량처럼 놀고 있던 제가 노숙인 시설에 전화를 걸어 인문학강의를 제안하면서입니다. 그런 제안을 했던 이유는, 그즈음 어떤 집회에서 자유발언을 하려고 하는 노숙인을 행사요원들이 몰아내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집회의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할 얘기가 있다고 어눌하게 말하는 그 노숙인을 그렇게까지 몰아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들이 외치는 민중해방에는 분명 노숙인도 있을 텐데, 주류사회에서부터 심지어 운동세력까지 그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웠습니다.

사실 붓다가 출가하게 된 계기도 노숙인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붓다의 유년시절은 왕족의 전통에 따라 가난하거나 아픈 사람을 배제하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환경에 둘러싸인 삶이었습니다. 그가 인간의 생로병사를 알게 되면 수행자가 되어 왕궁을 떠날 거라는 사실을 부모인 왕과 왕비가 일찌감치 예감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한 부랑아가 왕궁으로 들어옵니다. 그를 본 순간 청년 붓다는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생로병사의 고통과 고뇌를 느끼는 ‘부랑아가 바로 나다’라고 깨달은 붓다는 바로 탈속을 하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사실 빈 몸으로 왔다 빈 몸으로 가는 인생에서 부랑아는 우리 안에 내재한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붓다의 출가에 비유하기에는 너무나 하찮은 일이긴 하지만, 저는 그렇게 노숙인 센터에서 매주 철학 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스포츠 모자를 푹 눌러쓴 노숙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신체변용, 즉 흐름의 사상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철학이란 네모가 세모가 되고, 원이 되고, 별표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의 발언은 놀랍게도 스피노자의 통찰을 담고 있었습니다. 고정관념으로서의 ‘이기(being)’가 아니라 사랑과 욕망의 흐름으로서의 ‘되기(becoming)’를 그렇게 잘 압축한 말을, 저는 그전에도 그 후로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물을 잃은 물고기와 같은 노숙의 상황은 절박하고 열악하지만 세상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대 그리스에도 노숙인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거리의 통 안에 들어가 노숙생활을 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였지요.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현자의 지혜를 듣기 위해 그를 찾아갔습니다. 대왕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소”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황제여, 내 통을 비추는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주시오”라고 말했다지요. 권력이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에 대해 냉소하는 것이 바로 자유라는 시니시즘(cynicism)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시니컬하다’라는 말도 시니시즘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 제가 노숙인들에게 스피노자의 사상을 강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노숙인 되기를 했던 저의 신체변용은 노숙인들과의 철학 공부를 통해 스피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단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스피노자의 계승자 펠릭스 가타리는 “우리 모두가 부랑아다!”라고 주저 없이 말합니다. 그런 그의 태도에서 스피노자라면 노숙인 되기를 어떻게 했을지 희미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 안의 장애와 손잡는 순간

장애가 있다는 것은 타자의 모습이 아니라, 나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실감하게 됩니다. 친구들을 만나 얘기하다 보니, 다들 서너 개씩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평소 약이나 생활요법으로 조절해야 하는 질환을 몇 개 갖고 있습니다. 70세가 넘으면 90퍼센트 정도는 장애를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 되기는 나이에 따라 더 밀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릴 적 저는 손가락 하나가 없는 친구와 친했습니다. 그 친구는 사고로 손가락을 잃고 신기한 방법으로 젓가락질을 했습니다. 저는 비상한 그의 재주에 매료되었지요. 친구는 손가락을 감추기 위해 말할 때 손짓을 많이 해서 주의를 분산시켰는데, 그게 상당히 명연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내심 그 친구의 말솜씨가 부러웠고, 장애보다 그 친구의 말과 행동이 참 멋있었습니다.

30대가 된 후에는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된 친구들이 생겼는데, 그들이 겪는 불편함은 거의 차별 때문이었습니다. 사회 기반시설은 장애인들에게 결코 우호적인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장애인들을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내 피부에 와 닿았던 일화가 있습니다. 휠체어를 타는 친구가 참석하는 모임에서 약속을 정했는데 하필 그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었습니다. 그 건물 앞에 도착한 친구는 얼마나 황망했을까요? 아마 모임 주최자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실수를 한 것이겠지만, 사실상 그 친구를 차별하고 배제한 사건이었지요.

특히 정신장애인들의 경우에는 차별이 더욱 극심합니다. 우리 사회는 하나의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과 답, 태도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유난히 뿌리 깊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준거가 너무나 명확한 이 사회에서 정신장애인들과 같이 답을 여러 개 갖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결코 용인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정신장애인들에게 스피노자의 정동의 기하학은 어찌 보면 자신이 협착된 지점과 달리 자기원인을 갖는 정동과 사랑과 욕망의 흐름에 따라 자율적 행동을 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즉 하나에 미치지 말고 여러 가지를 넘나들며 미치라는 얘기지요.

이를테면 가타리는, 정신장애인들이 협착된 부분에 대해서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손을 씻는달지, 가게에 간달지, 빨래를 하는 등의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신을 협착시켰던 부분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사고나 행동이 자율성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가타리는 “모두가 미쳤다”라고 일갈을 합니다. 그는 『분열분석적 지도 제작』(Cartographies schizoanalytique)에서, 광인이 어느 하나에 미친 사람이라면, ‘정상’이라 불리는 사람은 여러 가지에 미친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어차피 다 미쳤는데, 미친 사람이 미친 사람을 치료한다고 나설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나의 미침이 기준이 되고 표준이 된다고 말할 수 없는 법이지요. 이러한 가타리의 발언은, 스피노자라면 광인 되기를 어떻게 했을까를 상상하게 합니다.

노르웨이의 철학자 닐스 크리스티(Nils Christie, 1928~2015)는 『외로움과 시설을 넘어서』(울력, 2017)라는 책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없는 캠프힐 마을을 소개합니다. 그는 특이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의 실험을 좌충우돌하는 삶의 스토리로 잔잔히 엮어냅니다. 이 책은 시설에서 탈주하기 시작해 그룹홈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장애인들에게 의미 있는 참조점이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스피노자의 구도가 보여주듯이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으로서의 마을이며 공동체이며 그룹홈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 다른 신체조건을 가진 특이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공동체는 미래진행형적인 시간 속에 있습니다.

마치 미래에서 편지를 보내듯 스피노자가 『에티카』 후반부 작업을 했던 것처럼, 국내의 그룹홈 실험에 참여했던 한 친구가 어느 늦은 밤에 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온갖 자랑을 늘어놓는 친구의 말 속에서,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으로서의 공동체가 우리 사회에서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우리는 소수자를 발명해야 한다!

스피노자주의자인 가타리는 “소수자를 발명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왜 공동체에 소수자가 필요할까요? 마치 누룩, 효모, 촉매제처럼 공동체의 관계망을 성숙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자는 공동체의 관계망을 더 성숙시킬 수 있는 다양한 표현 소재의 원천이 됩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무리 중에 아이가 있다고 한다면 냄새,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맛 등으로 다양하게 자신을 표현하려는 아이의 행동 속에서 공동체의 관계망은 발효되고 성숙됩니다. 공동체는 소수자의 다양한 기호에 의해 더없이 자유로우면서도 고도로 조직되고 성숙한 모습으로 무르익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 장애인, 동물, 광인 등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더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 소재를 이용하기 때문이지요.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낙서와 흔적과 냄새와 시끌벅적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떠드는 생활협동조합 행사나 프리마켓, 골목장터 같은 곳에 가면 사람 사는 느낌이 나고, 공동체가 훨씬 더 성숙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성이 느껴집니다.

공동체는 소수자의 다양한 기호에 의해 더없이 자유로우면서도 고도로 조직되고 성숙한 모습으로 무르익게 된다. 사진출처 : Kitty Hutchinson

또한 소수자는 특이점이 되어 공동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소수자는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이고 단조로운 삶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요철과 굴곡이 있고 복잡한 삶의 내재성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삶에서 선택할 경우의 수로서의 특이점 하나하나를 만들어낸 건 소수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대부분 어른들만 참여하는 집회에 아이 한 명이 끼어 있으면 집회가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장터에 동물이 끼어들어 오락가락하는 때도 그렇습니다. 어떤가요? 생명평화 세상이 바로 여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러한 특이점 하나하나가 복잡계로서의 삶의 내재성을 구성합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공동체의 내재성은, 어쩌면 탄력성, 유연성, 복잡성, 다양성, 신축성을 가진 21세기 네트워크 사회를 미리 전망한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소수자는 사랑, 욕망, 정동의 강렬함과 반복을 만들어줍니다. 일단 공동체에 소수자가 등장하면 정동과 사랑의 강렬한 흐름이 발생합니다. 아이 하나, 동물 한 마리에게 간이며 쓸개며 마음이며 정성이며 다 줄 요량으로 돌보고 쓰다듬고 아끼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욕망, 정동의 강렬한 흐름은 공동체에서 특이성이 생산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소수자라는 특이점을 관통하는 사랑과 정동의 흐름이었지만, 그 강렬함에 따라 색다른 특이한 주체성이 등장하여 춤추고 노래하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에서는 어쩌면 소수자를 발명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피노자를 생각하면 상상력의 엔진이 오늘날에도 무한하게 발동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와 그의 제자 가타리가 오늘 저녁을 풍성하게 만드는군요.

왜 소수자 되기에 주목하는가?

왜 그렇게 소수자 되기에 주목하느냐고, 친구들이 이따금 묻곤 합니다. 아예 소수자 되기를 입에 달고 산다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소수자 되기는 저에게는 색다른 인생의 좌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왜 거기에 매료되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여기서 소수자 되기는 무엇일까요? 어떤 인생의 과정을, 어떤 무의식의 행렬을, 어떤 정동과 욕망, 사랑의 흐름을 지도로 그리면 어떤 모양이 나올까요? 먼저 평화를 통해, 비폭력을 통해, 사랑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소수자 되기입니다. 폭력으로 증오로 슬픔으로 원한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길을 따라 삶의 내재성이 갖고 있는 무한한 생성과 긍정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방향성인 것이죠.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여전히 제게는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은 저를 유별난 몽상가나 공상적 이상주의자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과 욕망과 생명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할 때 다른 사람들의 가치와 의미, 생명력을 존중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감싸 안고 부둥켜안고 포용하고 되기의 안간힘을 발휘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동시에 긍정하는 실험에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소수자 되기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관용이 아니라, 나 자신의 끊임없는 신체변용의 과정입니다. 그것은 색다른 삶을 창조하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체변용이 가진 능동적인 힘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변신과 도주에 능한 신체로 변용될지, 어떤 특이성을 발휘할지, 어떤 웃음과 정동의 변화를 촉매할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체변용의 역능이 우리의 삶을 재발견하고 재창안할 원동력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문명의 성장이나 기술진보의 무한한 능력이 아니라, 유한한 신체의 무한한 변용 능력에 기반해서 삶을 재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판과 구도가 바로 공동체이지요.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주의자들이 뛰어 놀 수 있는 배치와 판, 구도는 바로 공동체입니다.

또한 뜻과 지혜와 아이디어를 가진 우리 중 어느 누군가를 만들 수 있는 방법도 바로 소수자 되기입니다. 소수자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해낼 사람을 사랑과 욕망의 능력을 통해 동시에 만들어냅니다. 어떤 목표 지점과 화려한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과 목표 자체가 그 일을 해낼 사람이라는 점에서, 소수자 되기는 시작이면서 끝입니다.

가타리는 오늘날 스피노자 사상의 가장 큰 과제가 바로 주체성 생산, 특이성 생산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지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들이 필생을 걸고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놓았습니다. 공동체의 사랑과 욕망, 정동의 강렬도가 높아질 때 홀연히 등장하는 주체성 생산의 현상에 대해서 신비주의적, 영성주의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물론 스피노자는 삶의 내재성의 자기원인에 따라 기하학적인 구도를 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어찌 됐건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을 만드는 주체성 생산은 소수자에 대한 사랑과 욕망이 활성화되는 소수자 되기의 과정에서 출현하는 색다른 현상임에 분명합니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결국 소수자 되기를 통해서 “사랑이 곧 혁명이다!”라고 일갈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자동적으로 찾아오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당연히 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처럼 공허한 말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사랑을 한다는 것은 혁명적 순간입니다. 어떤 사랑의 특이점, 소수자 되기의 특이점이라는 작은 변화는 수많은 사회화학적인 변화를 촉매하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사랑을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구성적 실천의 과제로 본다는 점에서 우리는 늘 혁명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혁명가도 혁명운동도 없지만 늘 진행 중인 혁명이고, 그래서 혁명을 하자는 것이다”라고 가타리는 일갈합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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