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 진부화와 의도적 게토화

구매력을 가진 경제 집단이 최신 승용차, 스마트폰, 공기청정기를 구매하지 않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시민의 일정 숫자, 아마도 3-4%가 의도적으로 적게 소비하고 오래 이용하며 나눠쓰고 고쳐쓰는 실천을 한다면? 이 글은 생태위기 상황의 해법은 결국 지구와 국가 그리고 지역이 ‘살림’의 원리를 체득하고 구현하는 데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돕는 여러 제도들이 필요할 테고 시스템으로는 순환 경제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주류적 소비 문화와 시장으로부터의 소비자의 작은, 상대적인 탈동조화일 것이다.

녹색 성장, 녹색 자본주의, 또는 더 넓은 범주로 ‘생태적 현대화’ 이론과 관념들에 공통적인 것은 성장을 하면서도 환경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체르노빌의 핵기술이 아니라 더 정교하게 개발되고 관리되는 현대화된 친환경 기술, 그리고 환경 오염에 적절한 가격을 부여함으로써 기업과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환경을 보호하도록 하는 시장을 활용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지탱하는 중요한 개념이 ‘탈동조화(de-coupling)’다. 경제 성장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원을 덜 소비하거나 환경에 부담을 덜 미치게 하는 원리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3만 달러에 이르면 탈동조화가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탈동조화의 실체는 논박당하고 있다. 국지적으로 또는 한정된 시간 동안은 탈동조화가 관찰되기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넓혀서 보면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오염 산업은 중국과 제 3세계로 옮겨졌을 테고, 지금은 효율이 향상되고 오염이 줄어든 것처럼 보여도 부담은 미래 세대와 미래의 지구로 전가되었을지 모른다. 물론, 핵심은 상대적 탈동조화 정도가 아니라 지구의 행성적 한계를 넘어서지 않을 절대적 탈동조화 또는 절대적 유지와 감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시장은 탈동조화와 절대적 감축 모두를 보장하기는커녕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의도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는 의도적으로 제품 수명을 제한하거나 수리를 불가능하게 하여 불가피하게 수요를 창출하거나 광고를 통해 과시적 소비를 유도하는 것 등이다. 
사진출처 : Darlene Alderson (https://www.pexels.com/ko-kr/photo/7971696/)
의도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는 의도적으로 제품 수명을 제한하거나 수리를 불가능하게 하여 불가피하게 수요를 창출하거나 광고를 통해 과시적 소비를 유도하는 것 등이다.
사진출처 : Darlene Alderson

끝없는 확장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시장과 이윤을 위한 경쟁이 낳는 폐해 중 대표적인 현상 또는 전략이 ‘의도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다. 계획적 진부화일 수도 있고 노후화일 수도 있다. 1920년대 전구 회사들의 담합이나 제너럴 모터스의 알프레드 슬론의 경영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의도적으로 제품 수명을 제한하거나 수리를 불가능하게 하여 불가피하게 수요를 창출하거나 광고를 통해 과시적 소비를 유도하는 것 등이다. 경영학과 마케팅 연구에서 다뤄지기도 하고, 애플이 집단 소송을 당한 것처럼 기업들이 치밀하게 구사하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의 내재적 속성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 세르주 라투슈의 『낭비 사회를 넘어서』는 이런 의도적 진부화를 통렬하게 고발한 책으로 널리 읽혔다. 그는 의도적 진부화가 단지 자원 소비를 부추길 뿐 아니라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는 문화적 병리 현상으로 이해했다. 인간이 소비를 할 때만 존엄과 가치를 확인하게 되는 본말전도를 극명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는 제이슨 무어와 라즈 파텔이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에서 말한, 어떤 것들은 의도적으로 저렴하게 하고 어떤 것들은 체계적으로 희소하게 만드는 동학은 자본주의의 생태적 그물망을 짜는 원리다.

의도적 진부화는 기후위기의 원인과 해법 모두를 알려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제이슨 히켈은 『적을수록 풍요롭다』에서 2010년에서 2019년 사이에 IT기업들이 총 130억 개의 스마트폰을 팔았는데, 10년 동안 이미 100억 개의 스마트폰이 버려졌다고 말한다. 매년 1억 5천만 대의 아직 쓸만한 컴퓨터가 버려져서 제 3세계의 야외 쓰레기장으로 향한다. 물론 스마트폰과 컴퓨터 모두, 판매조차 되지 않고 폐기되는 의도적으로 진부화된 제품들이 몇 개인지는 짐작하기 조차 어렵다. 이런 제품들을 만들기 위해 희토류를 포함한 천연자원, 화석에너지, 그리고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반대로, 만약 세탁기와 스마트폰을 지금보다 네 배 오래 쓸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자원을 1/4만 이용해도 되며 온실가스 배출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물론 우리의 행복과 안녕이 줄어들지 않거나 더 나아지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히켈은 “포스트 자본주의 세계”로 가는 길의 첫 단계로 의도적 진부화 끝내기를 꼽고, 두 번째 단계로 광고 줄이기를 말한다. 프랑스 파리의 안 이달고 시장이 재선에 도전하면서 2020년 6월 “파리를 위한 선언”이라는 선거 정책에서 디지털 광고판 퇴출을 포함하는 것과도 맥이 닿는다. 프랑스는 2015년에 ‘진부화 방지 프로그램’을 법제화하여 제조업체들이 의무적으로 제품의 예상수명, 지원방법, 재활용 가능성을 공지하도록 하고 위반시 징역 또는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는 최근 유럽과 미국의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 입법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고, 최근 한국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도 이런 내용의 공약을 밝혔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구매력을 갖고 시장 흐름을 좌우할 능력이 있는 경제 집단이 최신 승용차, 스마트폰, 공기청정기를 구매하지 않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절대로 안 사는 것이 아니라 최신품이 출시된 후 바로 구매하지 않고 6개월 또는 1년을 기다려 구매하게 된다면? 아마도 시장이 급속히 얼어붙고 관련 주가가 폭락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기업과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위협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안달복달하며 소비를 자극하는 광고의 매력도 줄어들 것이고 결국 자원과 에너지 소비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어떤 용도와 내구성을 지닌 제품을 어떤 공정으로 얼마만큼 만들어 판매 또는 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정부와 시민, 기업 대표들이 모인 위원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참여적 계획경제 같은 게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행성의 한계 앞에, 탄소예산의 시간표 앞에서, 이런 구상조차 하지 못한다면 과연 2050년 탄소제로가 가능하기나 할까?

그러나 결국 문제는 차분한 연구나 제안으로 의미있는 변화가 시작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시민의 일정 숫자, 아마도 3-4%가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모습이 없다면 정부, 언론, 제도 모두 호응하기란 기대 난망이다. 결국 행동의 티핑포인트를 만들어야 하는데, 의도적 진부화에 대응하는 작은 반란, 어쩌면 자발적인 게토화의 실천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적게 소비하고 오래 이용하며 나눠쓰고 고쳐쓰는 실천 말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그게 뭐 새롭거나 대단하겠느냐는 생각이 들 텐데, 실제로 엄청나거나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런 자발적 반란에 나선 사람들은 이미 많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들을 다시 만나고 우리의 의식적 반란과 게토화를 시작해야 할 따름이다.

독일의 볼프강 M. 헤클은 『리페어 컬처』에서 자신이 수영장 펌프를 고치려 악전고투했던 경험부터 시작하여 의도적 진부화의 세상을 어떻게 간파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수리 덕후’가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알려준다. 헤클은 수리할 권리 같은 제도적 해법에도 기대를 걸지만, “나를 둘러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곧 인간으로서의 나를 말해준다”는 말로 이 자발적 실천이 갖는 커다란 철학적 의미를 요약한다. 일찍이 “자전거로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한 이반 일리치, 물레를 돌리는 행동으로 적정기술 운동의 한 기원이 된 마하트마 간디는 기후위기 시대에 다시 소환되어야 할 이들이다.

일본 기자 사이토 겐이치가 『전기없이 우아하게』에서 보여준 행동과 철학은 어떤가? 그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한 일본 사회에 대해 통탄하다가, 자기 집의 계약전력을 5암페어로 낮추고 초절전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생활에서 꼭 필요치 않은 가전제품들을 하나씩 줄이고 요령을 익히면서 그는 우아할 정도는 아니어도 살 만한, 나름 재미있는 삶을 꾸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말미에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영웅이나 초인적인 모범을 보이고자 한 게 아니라, 작은 선택의 변화가 더 큰 인식과 행동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소비자 행동, 소비자 계몽이 답인가? 개인용 텀블러를 지참하고 절전형 멀티탭을 쓰는 것으로는 절대로 기후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해법은 결국 지구와 국가 그리고 지역이 ‘살림’의 원리를 체득하고 구현하는 데에 있다. 이를 돕는 여러 제도들이 필요할 테고 시스템으로는 순환 경제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작은 주류적 소비 문화와 시장으로부터의 소비자의 작은, 상대적인 탈동조화인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 것이다.

여기에 의도적 진부화를 거부하는 유쾌한 반란자들의 역할이 있다. 다만, 너무 독보적이거나 고립적이어서도 안 될 테고, 너무 자족적이거나 선지자스러워도 곤란하겠다. 많은 존재가 많은 방법으로 의도적 진부화를 거부하고 할 수 있는 수리와 순환을 시작하되, 그것의 의미를 시도 때도 없이 서로 알리고 공유하며 개선해 나가는 것, 그리하여 우리 실천의 도넛들을 서로 키우고 서로 엮이게 하는 것, 의도적 게토를 넘어서는 영토를 만들고 확장해 가는 것, 그런 느낌과 용기까지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김현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활동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10년간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에너지체제의 정의로운 전환과 에너지 민주주의를 연구했으며, 에너지 전환, 도시 정치, 대중교통, 거버넌스의 민주화 등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썼다. 지금은 탈핵신문 운영위원장으로 신문 발간을 돕고, 기후위기를 알리는 교육과 탈성장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안토니오 그람시』, 『정의로운 전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를 되찾자』, 『GDP의 정치학』, 『녹색 노동조합은 가능하다』,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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