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있는 이에게도 이렇게까지 안 했는데!

가족 돌봄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는 타인을 돌볼 때 가족에게 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는 습관이 있는 듯하다. 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아무 것도 계산하지 않은 호혜의 순간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재편할 수 있을까?

“내 부모한테도 이렇게까지 안 했는데.”

자원봉사를 하거나 유급 돌봄노동자를 만날 때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나의 부모가 아닌 다른 이를 돌볼 때 어쩔 수 없이 드는 감정인 듯했다. 자발적인 활동이냐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냐는 상관없다. 부모에게 하지도 않았던 돌봄을 타인에게 하는 게 죄책감도 들고 아쉬움도 든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가족 돌봄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모두가 겪는 마음의 습관일 듯했다.

동시에 이 말은 가족을 돌보는 것과 타인을 돌보는 것 사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이를 보살피는 힘이 사회적으로 연대하는 힘으로 이어질 수는 없을지 궁금해진다.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안 했는데’라는 마음이 어떻게 가족 울타리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우리는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앞뒤 재지 않는다. 친밀하고 사이좋은 가족끼리만 그런 게 아니다. 오랫동안 연을 끊고 지낸 가족도 응급실에서 연락이 오면 달려가게 된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호혜의 시간이 된다. 오직 그 상황에 집중하고 대처한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 취약해졌을 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돌봄과 연대를 할 수 있을까? 사진출처 : Min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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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아닌 누군가 취약해졌을 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돌봄과 연대를 할 수 있을까?
사진출처 : Min An

하지만 가족이 아닌 이가 나한테 급히 연락이 오면 어떨까? 응급실인데 와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어떨까? 가장 먼저 그의 가족이나 더 친밀한 사람을 언급하며 그 사람은 어찌 됐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은 순간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장 확실하게 작동하는 듯하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은 순간이 더 확장되고 재편될 수는 없을까? 누군가에게 계산하지 않고 가는 발걸음이 가족이 아니라 사회의 다른 구성원, 더 나아가 타국의 약자들에게까지 나아갈 수는 없을까? 가족 돌봄은 친밀성과 압박, 협력과 죄책감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나는 이런 속성을 가족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속성을 울타리 밖으로 끄집어내면, 가장 가까운 이를 돌보는 힘이 가장 멀리 있는 이를 돌보는 힘과 그리 다르지 않게 될 듯하다. 예를 들어 내 부모를 걱정하는 것과 저 먼 나라의 난민을 걱정하는 것 사이는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같은가? 누군가 취약해졌을 때 우리의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돌봄과 연대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선상에서 논의해볼 만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볼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가족을 돌보는 일이 가족이기에 당연히 감수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가족 돌봄을 동일시하기보다, 거리를 조절하며 때로는 남남처럼, 때로는 이 사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 돌보며 살아간다며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게 차근차근 가까운 것을 멀리, 먼 것을 가까이 두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우리는 이런 말을 내뱉고 있을지 모른다.

“저 멀리 있는 이에게도 이렇게까지 안 했는데!”

조기현

무언가 읽고 보는 시간이 삶의 동력이 됐다. 누군가 삶의 연료가 되고 싶어서 무언가 찍기도 했고 쓰기도 했다. 책 , 영화 , 공연 등이 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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