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발명] ㉔ 지역과 시간

미래주의적 시간관은 근대올림픽이 지향하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와 같이 속도숭배와 양적숭배의 바탕이 된다. 포스트포디즘과 함께 유럽의 여러 도시들은 문화도시로 재생되고 있다. 하지만 ‘볼로냐 2000프로젝트’와 같이 건축물의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면서 내부를 최첨단 문화공간으로 바꾸며 시간을 지키고 있다. 편리와 성장, 효율 중심의 직선적 시간관을 넘어 순환되는 시간관을 통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2021년 2022년 2023년 앞으로만 가는 시간은 직선의 선형적 시간이다. 청소년들에게 무엇이든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자주 하는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은 세대에 걸쳐 선형적 시간을 유산으로 내려주는 꼴이다. 이렇게 앞을 향해 직선으로 연결된 시간 앞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며 불온한 퇴보이다. 하물며 옆을 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언제나 시간은 발전과 진화를 위해 앞으로만 가야한다. 또 선형적인 시간 속 모든 가치는, 모든 운동은 미래를 향해 움직여야만 하는 미래주의적 시간관이기도 하다. 선형적인 시간으로 흐르는 사회는 더 빨리 앞으로 갈 수 있는 속도숭배와 더 많은 것을 축적할 수 있는 양적숭배를 특징으로 속도와 양이 절대적인 가치가 된다. 이 안에서 생성과 성장은 있어도 성숙과 소멸은 없다. 전진과 진화는 있어도 순환과 퇴화는 없다. 기존의 오래된 가치들은 그것이 아무리 인간을 안전하게 하고 포근하게 하더라도 가차 없이 깨뜨려버려야 한다는, 모든 낡고 익숙해져버린 존재와 인간관계는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이유로 없애버려도 좋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근대올림픽이 지향하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라는 슬로건은 속도와 양의 삶을 추앙하는 오늘의 삶의 방식에 최고의 찬사가 된다.

정말 선형적 시간만이 있을까? 앞만 보고 뛰는 것은 마치 나의 삶은 과거와 현재에 남겨둔 채 신기루를 향해 뛰어가는 무망한 질주는 아닐까? 과거라고 부르는 시간으로부터 욕망 속에 희망되는 미래라는 시간을 향해 화살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보는 것은 나의 삶에서 시간을 떼어내어 실험실에 가둔 채 과거와 현재, 미래를 분절하여 해석하는 유치한 모습이 아닐까. 동양에서는 직선적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태어난 해를 병오년(丙午年)생이라고 말하면 나의 시간은 나의 생에서 61년에 한번 다시 돌아 내게 오는 순환적 시간이 된다. 육십갑자가 돌아 만나는 순환적 시간이다. 여기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따로 있지 않고 함께 있다. 양자물리학과 동양고전에서 들은 대로 현재 이 순간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다. 그래서 미래를 향해 현재를 허비하지도 않고 현재를 위해 과거를 지워버릴 수도 없다. 이렇게 되면 시간은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퇴화라 부르는 것처럼 다른 어떤 시간은 반대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시간은 화살이 아니라 물결처럼 사방팔방으로 상하로, 역으로 돌아가면서 회오리 되어나간다. 함께 있고 함께 움직이는 총체적 시간이다.

속도숭배와 양적숭배를 낳는 직선적 시간관

지역의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오늘의 시간 안에 함께 살아간다. 이 쌓인 시간들이 미래의 틈을 벌리면서 공존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유행처럼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100년, 10년이 연결된 풍요로운 시간을 지역에서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지역이라는 범위 안에서 공존하는 시간의 모습들을 지역의 문화들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지역의 시간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리고 있다. 지금도 지역에서는 오래된 건물의 시간들이 철거되고 수령 깊은 나무의 시간들이 잘려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곧게 뻗은 새 길과 높이 솟은 새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인천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어린 시절의 친구이며 연인과의 사랑, 부모님과의 추억 그리고 영화에 나온 수많은 이야기를 꿈꾸게 한 인생의 최대사건이 벌어진 시간이었다. 사진출처 : PuzzletChung
인천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어린 시절의 친구이며 연인과의 사랑, 부모님과의 추억 그리고 영화에 나온 수많은 이야기를 꿈꾸게 한 인생의 최대사건이 벌어진 시간이었다.
사진 출처 : PuzzletChung

지역마다 벌어지는 개발을 앞세운 직선적 시간의 광풍에서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모임’은 인천지역에서 한국 극장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문화유적인 애관극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행정의 늦장을 기다리지 못해 시간의 보물을 지키려고 나선 시민들의 모임이다. 인천 경동거리에 있는 애관극장은 1895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조선인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실내극장 겸 공연장으로 영화상영과 함께 신파극이나 창극, 남사당패들의 공연을 했었고 지금까지도 영화상영중인 극장이다. 1920년대 ‘애관’으로 이름을 바꿔달았지만 127년 동안 어린이가 청년이 되고, 청년이 노년이 되는 시간 동안 인천시민들과 함께 한 반려건물이다. 인천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어린 시절의 친구이며 연인과의 사랑, 부모님과의 추억 그리고 영화에 나온 수많은 이야기를 꿈꾸게 한 인생의 최대사건이 벌어진 시간이었다. 이미 원주의 아카데미나 마산의 시민극장도 이렇게 살아남은 지역의 시간들이다.

우습게도 그토록 애쓰며 따라가려는 서구 시간은 바뀌고 있다. 1980년대 포스트포디즘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럽의 산업도시들은 문화도시로 변모를 하기 시작한다. 산업도시의 추악한 모습을 예술과 문화로 지우고 문화도시로의 변화를 시작했다. 그 이유는 시장이 성숙되면서 새로운 문화산업으로의 이행과 도시민들의 삶의 질의 욕구였지만 도시의 생활에서 근대의 상징인 직선적 시간을 탈피한 것은 분명하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있는 ‘유럽의 문화도시’로 선정된 볼로냐(Bologna)는 1970년대 말부터 역사적 시가지 보존과 재생이라는 볼로냐 방식의 도시재생전략을 채택하고 시행했다. 볼로냐를 새롭게 주목받게 한 창조적 도시재생을 이룬 ‘볼로냐 2000프로젝트’의 핵심은 도시 건축물의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면서 내부를 최첨단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포르투갈의 항구도시 포루트(Porto)는 미래 도시의 상징적인 BI를 만들면서 영롱한 푸른색으로 포루트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건축물과 꽃, 사물들을 아이콘으로 조합하여 시간이 공존하는 도시의 매력을 발산하였다. 볼로냐와 포루트 뿐 아니라 많은 유럽도시들의 도시재생은 순환하는 총체적 시간을 축으로 하고 있다.

직선적 시간을 멈추고 총체적 시간으로

안타깝게도 직선적 시간으로 사라지는 것은 건물들만이 아니다. 직선적 시간은 자신을 돌아볼 틈도, 사람사이의 관계가 두터워질 틈도 없이 마음까지도 새로운 마음으로 갈아치우고 있다. 편리와 성장, 효율이 생활의 절대적인 가치가 된 직선적 시간에서 지역생활은 더 많은 부와 더 많은 자유를 위해 경쟁하고 한시도 만족할 수 없는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서울을 향해 더 빠르게 가야하고 서울과 닮아야한다는 지역개발의 주장이 호응을 얻고, 인간 개인의 자유는 어떠한 공공선과 균형적 제도로도 제한할 수 없기 때문에 배려와 포용보다는 혐오와 차별이 당연시 되고 있다.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직선적 시간을 멈출 때가 되었다. 지역의 순환적시간이 훼손되어 나온 기후위기를 해결할 방안으로 나온 파리의 ‘15분 도시’의 15분은 지역에서 일, 교육, 돌봄, 에너지 등의 순환이 가능한 시간이다. 기후위기뿐 아니라 시간이 순환되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세대갈등으로 불리는 청년과 노년의 반목은 청년과 노년의 직선적 시간을 순환적 시간으로 연결시키면 청년과 노년을 또 다른 나의 시간으로 배려하며 살 수 있게 할 수 있다.

지역에 있는 모든 시간을 남길 수는 없다. 하지만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시간은 남겨둘만 한다. 미래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과거로 가겠지만.

이무열

지역브랜딩 디자이너. (사)밝은마을_전환스튜디오 와월당·臥月堂 대표로 달에 누워 구름을 보는 삶을 꿈꾼다. 『지역의 발명』, 『예술로 지역활력』 책을 내고는 근대산업문명이 일으킨 기후변화와 불평등시대에 ‘지역이 답이다’라는 생각으로 지역발명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하며 곧 지역브랜딩학교 ‘윤슬’을 시작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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