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2024년 12월 6일(금) 서울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된 〈2024한국기본소득포럼-‘생태-사회-경제’의 단초를 찾아서〉 중 「기획주제. 생태적 전환과 기본소득」 세션에서 발표된 내용으로, 주최 측의 허락을 받아 《생태적지혜》에 게재합니다. |
‘탈성장’은 인류가 걸어온 삶의 방향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향할 것을 제안하는 최근에 출현한 대안적인 생태적 관점이다. 짧게는 산업혁명 이래로 지난 2-3세기 동안, 길게는 인류사 전체를 통해 우리는 성장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지구와 인간 자신을 오로지 이전보다 더 많은 재화와 이윤을 생산하는 자동기계로 만들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와 생명 위기는 그것의 현실적 결과이다. 이러한 기후 및 생명의 위기는 그저 앞으로 다가올 먼 미래의 사안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실질적이고 긴급한 사태이다. 지구생태계의 여러 다양한 구성요소 중 일부는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거나 임계점에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곳곳에서 확인된다. 산업화가 본격화된 19세기 후반과 비교했을 때 현재의 지구 평균 온도는 1.2℃ 이상 더 뜨거워졌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최근의 평가보고서들은 온난화의 목표를 1.5-2°C로 설정하고 그 기조를 줄곧 유지해왔지만 1.5℃ 상승은 파국의 전조일 뿐 절대 안전한 수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기후학자들의 견해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1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당장 지구의 생태계를 안정되게 유지시킬 특단의 조치와 행동이 필요하다. 현재에도 지구 전역의 탄소배출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며, 그와 연동된 지구 총인구는 이제 80억 명을 돌파했다. 지구 인구가 향후 20-30여 년 안에 100억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탄소배출량 역시 그에 비례해 증가할 것이며 지구의 여러 요소들(남북극 빙하, 산호, 해양생태)의 파괴는 더욱 가속화‧가시화될 것이다. 탈성장 사회를 주장하는 근거는 바로 이러한 부정적 진단에서 시작된다. 즉 파국과 죽음의 위협이 지구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지가 ‘탈성장 사회’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진단에도 불구하고 탈성장 사회는 또한 더 안전하고 행복한 삶,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며 그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긍정적이고 구성적인 기획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그리고 생태계를 바라보는 태도,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국가와 정치권력에 대한 입장, 인간을 규정해왔던 언어와 관점 등)을 획기적으로 변혁하자는 ‘탈성장’의 구호는 그것을 실행하는 어려움과 함께 여러 가지 내적 난관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기본소득은 탈성장 전환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어 현재까지 인류가 도달한 가장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그리고 지난 팬데믹 동안 실현된 바 있었던) 대안적 제도이다. 기본소득은 상호부조와 돌봄에 기반해 사회를 재구축하고, 경제성장이 아니라 좋은 삶을 지향할 수 있는 삶의 물질적 제도형태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탈성장론과 기본소득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관점을 살펴보고 그것이 또한 어떤 제도적 활동과 공존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탈성장 전환사회

사진출처 : ImagineThatStudio
디그로쓰/데크로상스(de-growth/decroissance)라는 말을 번역한 단어인 탈성장은 앙드레 고르에 의해 1972년 파리의 어느 토론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고르는 이렇게 질문했다. “지구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 생산에 있어서 무성장, 나아가 탈성장이 필요조건이다. 그렇다면 지구의 균형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양립가능한가?” 이러한 질문 이후 몇 년 뒤 고르는 탈성장의 관점을 보다 분명한 전망 하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결국 문제는 더 많은 소비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아직 남은 자원을 보전하는 길은 이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생태적 현실주의이다. … 오늘날 비현실적인 주장은 탈성장을 통해 더 많은 복지를 이루고,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삶의 방식을 전복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경제성장이 여전히 인간 복지를 증진하고, 물리적으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이 바로 비현실적이다.”2
이처럼 탈성장론은 처음에는 경제성장 추구의 종식을 내세우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이 단지 자본주의적 정책입안자들이 내세우는 고통스런 내핍을 요구하거나 프로테스탄티즘이 이상화한 욕망 억제의 금욕주의적 세계를 만들어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경제성장을 삶의 목표로 내세우는 지금 현재의 사회가 바로 그 목표인 성장을 실현하기 위해 금욕주의와 내핍정책을 모두에게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성장론은 지구생태계 곳곳에서 위기를 증폭시키는 산업생산 시스템, 토지‧삼림‧해양에 대한 개발주의적 접근, 이윤중심의 팽창적 자본주의를 중단하면서 지구에 사는 모두를 풍요롭게 하면서 더 건강한 삶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삶과 경제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즉 탈성장론은 “행복한 삶을 삶과 사회의 목적으로 삼음을 옹호”하는 것이며, “모두를 위한 좋은 삶을 건축하려는 움직임을 촉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3
또한 탈성장론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낭만적 주장이 아니다. 오늘날 탈성장은 전세계에서 여러 형태의 실재적 운동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가령 2000년대 초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탈성장의 구호가 2004년 이탈리아에서 녹색 및 반세계화 운동가들에 의해 시위에서 활용되기 시작했고, 2011년에는 “긴축 반대, 금융권 구제 중단, 빈곤 퇴치와 실업문제 해결, 이민자 공격 중단” 등을 내세운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시위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2004년 이후 프랑스에서 열린 여러 학회 행사 등에서 탈성장은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다뤄지고 있으며, 〈라 데크로상스: 삶의 즐거움에 관한 잡지〉 같은 잡지의 발행을 계기로, 보다 대중적인 관심을 얻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대중들의 직접행동과도 연결되는데, 가령 2004년 프랑수와 슈나이더는 탈성장을 알리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1년간 프랑스 전역을 여행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슈나이더는 2007년에는 데니스 바욘, 파브리스 플리포와 함께 〈연구와 탈성장〉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설립하고 이후 환경정의 단체들과 일련의 국제회의를 조직하면서 탈성장론을 전파하고 있다. 탈성장을 주제로 삼는 국제 연구 공동체들의 연합회의가 2008년 파리를 시작으로, 바르셀로나(2010), 몬트리올(2011), 베니스(2012), 라이프치히(2014), 부다페스트(2016) 등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는 유럽과 1세계 지역만이 아니라, 멕시코, 브라질, 푸에리토리코에서도 깊은 공감을 받으며 사회운동, 학술행사, 정치기획으로 확산되고 있다.4 우리나라에서 탈성장론은 아직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일부 단체나 기후행동 조직 그리고 ‘기후비상행동 연석회의’의 일부(해당 참여단체가 모두 탈성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에서만 자신의 구호로 수용되는 데 그치고 있긴 하지만, 최근 1-2년 동안에는 『문화과학』, 『여/성이론』, 『뉴래디컬리뷰』를 비롯한 여러 주요 정치적‧학술적 잡지에서 ‘탈성장’을 주제로 한 특집호를 발간하면서 한국 내에 잠재된 탈성장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반영하기도 했다.5
탈성장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성장, 그것도 경제적으로 수치화된 이윤이나 소득, 생산량, 수출량 등의 양적 증가에 기반한 경제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최근에는 더 넓은 개념적 의미에서 성장의 관점을 문제삼는 방향을 취하는 이들도 있다. 비록 성장이 모든 존재에게 중요한 삶의 과정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성장 자체를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바라보거나, 모든 생명활동 및 상호작용을 성장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경제성장을 이데올로기의 근간으로 삼았던 근대적 세계관의 반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가 우리 자신에게 추동시켰던 성장은 늘 더 크고, 더 많고, 더 화려하고, 더 정교하고, 더 복잡한 것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사에서 성장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한 인격체의 성장을 ‘키가 늘어났다, 몸집이 더 커졌다. 하루에 할 일이 더 많아졌으며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외모를 꾸미고 더 비싸고 좋은 의복을 착용했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세상만사를 두루두루 살핀다’와 같은 신체와 정신이 양적으로 팽창하거나 질적으로 더 정교하고 복잡해지는 것과 동일시하곤 했다. 키가 줄어들거나 하루에 할 일이 더 적어지거나 외모가 더 투박해지거나 더 느려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근대인들에게는 신체가 늙어간다는 것, 노동보다는 휴식을 취하며 단순한 생활을 즐기는 것, 천천히 걷고 적게 움직이며 고민거리를 줄이는 것은 생명력의 감소나 지체, 퇴보로 간주되었다. 여러 저자들이 탈성장을 반-경제성장론에 한정시켜 해석하는 데 그치는 데 비해, 권범철은 성장중심의 세계와 우리의 노동 관념이 서로 연결되었음을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자본주의에서 새롭게 발명된 것은 ‘노동의 끝없는 부과’다. 즉 자본주의란 무엇보다 우리에게 일을 강제하는 시스템, 우리를 끝없이 일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시스템이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우리가 각자의 본분을 지킬 때—열심히 일할 때—번성하는 시스템이다. … 일자리에 종사하는 이들은 자신이 별달리 할 일이 없더라도 늘 바쁘게 일하고 있다는 인상을 상사에게 남겨야 한다고 느낀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전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노동자는 자기감시를 수행하는 판옵티콘 속 재소자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6 탈성장론은 물론 반-경제성장론이지만, 그것은 그 이상으로 발전주의적 국가 이데올로기나 성장중심의 세계관에 맞서는 정치적‧철학적‧문화적 기획이 될 필요가 있다.7
이런 점에서 탈성장론은 경제 지상주의의 논리로부터 삶의 방식을 분리해내고, 경제성장을 사회의 공동 목표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면서, 더 적은 자연 자원을 이용하고, 오늘날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구성하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반영한다. 그런 이유로 탈성장은 ‘적을수록 풍요롭다’는 발상과도 연결된다.8 탈성장은 생산과 분배 규모의 경제를 공정하게 축소하는 것을 지향하며, 이러한 축소에 따라 사회의 에너지와 원료 처리, 폐기물의 양을 줄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때 탈성장론은 단순히 ‘성장’과 팽창의 반대말인 ‘적거나 작음’, ‘수축’의 실현보다 정확히는 ‘다름’에 초점이 있음을 강조한다. 탈성장은 더 적은 신진대사 활동을 지향하지만, 이는 그것이 다른 구조와 새로운 기능을 가진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회를 지향한 결과라는 의미이다. “탈성장의 목표는 코끼리를 날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를 달팽이로 변환하는 것이다. 탈성장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즉 다른 활동, 다른 에너지 양식과 이용, 다른 관계, 다른 성 역할, 유급과 무급 노동 간의 시간 할당 변화, 인간과 비인간 세계 사이의 관계 변화 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9
이런 이유로 해서 탈성장론은 다른 생각‧개념‧제안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적어도 다음 3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경제적 팽창을 목표로 하는 발전중심의 성장관에 대한 비판, 둘째, 영속적 성장을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셋째, 생명과 공존을 중심에 두는 세계 및 사회의 구축이 그것이다. 상품화에 대한 비판이 이러한 논점에 뒤이어 나온다. 상품화는 사회적 생산이나 사회 생태적 교류, 인간 활동의 특수한 형태, 자연력, 심지어 인간 신체 자체 등 지구 전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명활동을 화폐 가치로 환산해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는데,10 이러한 상품화에 맞서 탈성장론은 교환가치와 이윤증식 중심의 가치화에서 탈가치화, 재가치화, 자기가치화로의 전환을 모색한다.11 이러한 새로운 가치화 과정에서 가치판단의 중요한 요소에는 돌봄의 재생산 경제와 ‘공통적인 것’(혹은 공유재)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돌봄과 공통 경제는 오늘날의 생태공동체나 ‘사회적 경제’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삶의 방식 혹은 보다 전통적으로는 마을공동체나 공동육아모임 등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마을사업이나 인문실험, 예술가 지원사업, 기본소득(사회적 보장소득) 등 새로운 공적 제도 등에서도 확인되는 바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도들은 유급 노동시간을 줄이게 하면서, 무급의 공공‧돌봄 노동을 장려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탈성장론이 국내총생산을 조건없이 줄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탈성장 사회의 구축과정에서는 국내총생산 감소가 결과로서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친화적인 돌봄과 공유경제는 좋은 삶과 주변 환경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국내총생산 증가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탈성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경제가 성장하거나 몰락하는 경향을 보이는 자본주의 구도 안에서 불가피하면서도 또한 올바를 수 있는 국내총생산 감소가 현재의 사회형태(그것도 민주주의적인 사회형태)를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경제학자들을 포함해 정부관료, 언론, 기업들은 성장을 늘 개선, 풍요, 심지어 행복의 절대적 요소로 간주하면서 그것이 사회의 필연적 방향인 듯 전제하며, 그런 이유로 많은 진보적이면서도 비판적인 학자들조차도 ‘탈성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거부감을 갖기도 한다. ‘탈’성장은 성장에 반대하는 부정적인 단어이며, 따라서 성장주의와의 관계 속에서만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비판일 것이다. 그러나 돌봄과 공생, 공유를 지향하는 긍정적인 사회기획에 이처럼 부정적인 어휘(‘탈’)를 쓰는 것은 사회 전체를 성장에 매진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지배적 질서체제를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탈성장은 성장을 바람직한 사회와 삶의 태도로 연결시키는 고리를 끊으면서 그와는 다른 삶을 연상시킬 수 있다. 사회적 불문율로 자리잡은 ‘성장에의 욕구’와 양적 경제성장이 이뤄지지 않을 때 발생되는 여러 사태들에 대한 걱정, 불안정한 삶에 대한 우려가 남아있는 한 ‘탈성장’이라는 용어는 현행의 질서, 자본주의와 산업 중심의 사회를 전복하는 실천 개념이자 저항개념으로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제도화의 한 형태로서 기본소득

탈성장으로의 이행은 한편으로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모두가 더 적게 가지고 살아가는 유쾌한 사회로 전환하는 것”12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통적인 것’을 생산‧유통‧공유함으로써 공생공락을 실현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러한 탈성장 사회로의 이행은 너무 먼 얘기고 현재의 기후위기의 긴급성을 고려했을 때 너무 느리고 뒤늦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기후위기가 긴급하다고 해서 그것을 일방적으로 위로부터 실행할 수는 없다. 그것은 차라리 현재가 더 나을 정도로 더 고통스러운 강압과 행동구속의 형태로 실현될 것이며 이는 그에 맞서는 별도의 투쟁과 저항으로 더 시간을 지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래로부터 탈성장 전환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실행과 제도에 관한 아이디어, 실행과 제도를 연결하고 활성화하는 방안에 대한 아이디어는 유토피아적 추상이 아니라 이미 나와 있으며 작은 단위에서 실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기존의 국민국가 기반의 자유주의적 제도가 사람들의 기본 필요를 충족하는 데 실패하면서 풀뿌리 경제실천. 생태공동체, 온라인 커뮤니티, 협동조합, 도시텃밭, 공동체 통화, 시간은행, 물물교환시장, 보육 또는 의료 서비스 연합 등 비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실천과 제도가 세계 도처에서 자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풀뿌리 경제실천은 크게 5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 ‘교환을 위한 생산에서 사용을 위한 생산으로의 변화’, 둘째, ‘임금노동을 자원활동으로 대체함으로써 강제화된 노동을 비상업화‧비전문화된 형태로 전환시키기’, 셋째, ‘이익 추구가 아닌 상호 선물 교환을 통해 재화가 활발하게 순환하는 논리’, 넷째, 자본주의 기업의 축적과 확장의 논리와는 달리 사용과 공유의 논리를 전제하는 풀뿌리 실천활동. 마지막으로 다섯째, 풀뿌리 실천은 ‘공통적인 것’의 형성과정의 산물이다. 참여자들이 서로 정동적‧물질적‧소통적으로 연결되는 관계는 이와 같은 새로운 자기가치화로 나타난다. 탈성장론은 그런 점에서 경쟁과 적자생존의 제도화에 맞서는 행복의 제도화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행복의 제도화’는 자본주의적 성장주의 내에서 우리가 은밀히 길러내는 힘, 즉 지적‧정동적‧문화적‧예술적 능력과 다른 인간들의 삶의 형태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해 이 힘을 증가시키면서 자연-생명-동식물-사물-인간의 연합체를 보다 대칭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로 변화시키고 그래서 우리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확장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단순히 어떤 변신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주체성 생산은 “다중-만들기”이자, “공생자” 만들기로서의 “공-산”과 점점 더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13 이 새로운 주체성이자 ‘공-산’에 기초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제도가 얘기될 수 있다. 우선 이 제도는 오늘날의 지배질서가 사람들에게 압박하는 비참한 삶과 그에 따른 경쟁질서(더 많은 노동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만드는 노동강제 사회)로의 편입을 막을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우리는 여기에 ‘무조건적 보장소득’으로서의 ‘기본소득’을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난 팬데믹 동안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서 모든 시민들이 존엄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추도록 기본소득을 제공했거나 그와 유사한 제도를 운영했음을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이 아니어도 이미 상당히 많은 나라들에서 모든 시민들에게 기본적인 의료서비스와 기초교육 서비스를 무료로 혹은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세계 전역의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전지구적 보장소득’과 ‘보편적 의료 및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 맹아를 한국의 기본소득 운동에서 확인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국의 ‘기본소득 네트워크들’에서 확인하는데, 탈성장론은 바로 이 네크워크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연결시켜 제도화를 실행할 운동의 힘으로 뒷받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에 더해지는 ‘공통적인 것’의 제도화
하지만 기본소득은 사람들을 비참에서 빠져나와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하게 하는 진입점이지 탈성장 사회를 위한 미래기획의 전부일 수는 없다. 더욱 구체적인 생태적 실천이 필요한데, 가령 ‘대안적인 유기농 식품망’은 기업식 농업에 비해 비료나 농약, 화석연료를 적게 쓰더라도 상품 단위당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실업문제를 감안하면 이는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며, 또한 탈성장 사회에서 노동은 성장을 위한 힘의 쥐어짜기가 아니라 흙과 강, 숲과 더 친화적인 존재를 만들어내는 생태실천적 노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이나 에너지 생산에서 분권화된 협력 시스템’은 노동 단위당 또는 투입되는 자원 단위당 더 적은 물이나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으며, 이는 이전보다 더 친환경적일 수 있다. 낮은 생산성이 규모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유화/공통화의 대안활동들’은 공공서비스를 갱신하고 사유화를 방지하기 위한 혁신의 원천이다. 가령 협동 의료, 대안교육 시스템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는 의사와 환자의 지역 네트워크를 만들어 예방 건강 검진과 기본적인 응급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실행될 수 있다. 환자에 대한 친밀한 정보에 바탕을 둔 예방 의료 서비스는 첨단 기술을 통한 진단과 치료보다 훨씬 저렴하다. 이처럼 이용자들이 참여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공공서비스는 일반적으로 비싼 가격으로 민간에 비싸게 위탁하는 사적 의료서비스보다 더 저렴하고 민주적이다. 그런 점에서 탈성장은 기존의 공공서비스를 침식시키지 않고도 보완적이면서도 다른 형태의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
탈성장으로의 이행에서 필요한 새로운 제도화에는 남아메리카지역이나 스페인, 포르투갈 등과 같은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실행되는 ‘일자리 나누기 위원회’, ‘좋은 일자리 위원회’와 같이 새로운 생태노동의 일자리를 네트워킹 시켜줄 위원회를 설립하는 것도 포함한다. 일자리 나누기는 유급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래서 피고용자 간에 일을 재분배해 소득 손실 없이 실업률을 줄이고 부를 재분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일부 지역에서 실행했거나 실행되고 있는 ‘지역 화폐’도 그 대안적 제도로 검토될 만하다. 가령 시간은행 및 지역 내 거래 체계는 경제활동 규모를 축소하고 재지역화하는 데 기여하며, 또한 지역 내 유통을 촉진한다. 지역화폐는 위기가 닥친 시기에 시장경제로부터 외면받는 이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완제로 기능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의 제도화’의 역동적 생산
공동체 내부에서 작은 실험이 이루어질 때, 그것은 제도 창안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제도 생산과정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가령 기본소득과 관련된 제도화를 위해서, 일단 공동체 자체에서 기본소득에 해당하는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이를 통해 만약 목표와 지향점은 기본소득의 제도화에 둔다면, 기본소득이 작동하는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 그에 우선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대정부 투쟁이나 거리 시위도 중요하겠지만, 직접적으로 관계망을 바꾸어내는 실천이 매우 중요하다. 그랬을 때 탈성장과 기본소득은 저기 저편의 유토피아적 제도가 아니라, 공동체 자체에서 지금-여기-가까이에서 실현해야 할 관계망 안에서 실질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관계망이 제도를 만든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 제도주의(=현실주의=점진주의)도 인정할 것이 있지만, 관계망을 의제를 추출할 기본 재료로만 간주하고 일단 의제선정 과정이 끝나면 사용기한이 다한 재료나 원료 취급을 한다. 의제 선점이 시민단체의 주요한 업무였던 시절에는 관계망에서 싹트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아 의제화하는 것을 시민활동가의 임무로 삼았다. 그런데 문제는 관계망에 대한 태도에 있다. 일단 제도로서의 의제를 만들 재료로만 간주되는 관계망은 자칫 제도와 분리되어 잡다하고 일관성 없는 소재로만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의 문제점은 제도와 관계망은 긴밀히 관련되어 있고, 자신이 제도를 만들 특출한 두뇌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관계망의 성숙과 강렬도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무대의 연사가 화려한 연설을 하는 이유는 그 연사의 재주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단 아래에 있는 대중들의 강렬도와 집중도, 추임새 등도 한몫을 한다. 이 점에서 아무리 특이하고 기발한 제도라 하더라도 그 공동체가 가진 집단적 요구와 사회적 배치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관계망이 창발한 제도를 제도에 대한 특출한 아이디어를 지닌 전문가의 재능으로 여기는 것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결국 제도주의 이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제도=관계망’이라는 점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전문가주의에 입각한 제도화의 과정은 다극적·다의미적·다차원적인 관계망의 일부를 전문가들이 모델화하고 의미화하여 제도를 추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처럼 ‘의미화=모델화=표상화’의 능력을 가진 전문가들이 제도에 미친 영향이 막대한 때가 있었다. 전문가들의 제도 생산의 과정은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적 모델이 무의식의 심층에 있는 관계망을 포섭함으로써, 분명한 의미와 기능,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은 ‘관계망 → 제도’로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무의식의 양상으로 실존하는 관계망에서 전문가의 의식적인 모델화 과정이 제도를 추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만 보면 의식은 굉장히 우월하고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문가들이 화려하고 세련되게 제도화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망의 입장에서는 의식적인 제도는 생활과 삶의 영역 즉 무의식 속으로 파고들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즉 제도가 반복, 순환, 중복, 함입, 재진입 등의 습관의 양상으로 이루어진 생활양식 자체에 영향을 줄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관계망의 입장에서의 제도는 ‘의식의 무의식화’ 과정으로 향할 때 의미가 있다. 전문가들의 의식적인 모델화와 의미화 작업도 중요하지만, 사실상 제도 자체가 의식을 절약하는 무의식으로 삶에 파고들 때 유효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의식의 무의식화 과정은 ‘제도→관계망’으로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협치가 작동하는 현실 속에서는 ‘의식의 무의식화와 무의식의 의식화의 교섭’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도와 관계망이 따로 상향, 하향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향하여 삶이 드러나며, 무의식의 의식화를 수행했던 전문가들이 함께 교직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제도는 ‘의미화’라면, 관계망은 ‘지도화’의 입장에 서 있다. 제도는 입구와 출구, 원인과 결과, 문제제기와 대답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의미화의 방법론을 따른다. 반면 관계망은 입구와 출구의 분열, 문제제기와 대답의 분열 속에 위치한다. 이에 따라 지도그리기를 통해서 관계망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학생인권에 대해서 논의할 때 의미화의 방향에서는 학생의 권리에 대해서 주목하겠지만, 지도화의 방향에서는 학생의 자율성에 대해 주목할 것이다. 이에 따라 의미화의 방향에서의 권리주의적 시각에서는 학생이 천부적으로 가진 자율성이나 인권으로서 명시된 권리 등을 따지겠지만, 지도화의 방향에서의 자율주의적 시각에서는 오히려 학생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에 대한 논의들이나, 두발, 복장 등이 유행에 따라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도와 관계망이 교직하고 교섭하는 과정은 사실상 ‘제도의 의미화’와 ‘관계망의 지도화’가 만나는 지점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의 과정은 지도화에 따라 여러 의미와 여러 모델을 끊임없이 횡단하고 이행한다. 이에 따라 공통적인 것을 제도화하는 과정은 “~은 ~이다”라고 정확하게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거나 ~이거나”로 끊임없이 연결접속되는 과정 자체를 그려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망의 기반 위에서 생산되는 여러 의미들과 모델들의 지도그리기를 해야 하는 것(=메타모델화)이 공통적인 것의 제도화 과정인 것이다.
여기서 기본소득은 지도그리기의 과정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려나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 다양한 주체성들이 모여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상상하고 고려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정 자체를 ‘차이를 낳는 차이’의 과정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즉 제도를 현실화하기 위한 배치를 색다른 이차적 특이점으로서의 제도 생산의 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기본소득을 비롯한 공통적인 것의 제도화 과정은 상상력과 아이디어, 영감 등이 넘치는 공동체적인 자리로 설계될 필요가 있다. 가령 친밀하고 유대적인 관계, 자연스러운 분위기, 위계가 없는 솔직한 대화, 무슨 얘기가 나와도 유머와 해학으로 느낄만한 느낌 등을 통해서 차이를 낳은 차이로서의 지도그리기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 ○○위원, ○○임원 등의 부여된 직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풍부하고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제도와 관계망의 교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공통적인 것의 제도화 과정은 제도적 위상보다 관계망의 위상이 더 강조되어야 하며, 그 자체가 공동체적 배치를 형성하여 지도그리기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즉 구성적 임무를 일차적인 것으로 한다.
요한 록스트룀, 오웬 가프니, 『브레이킹 바운더리스』, 전병옥 옮김, 사이언스북스, 2022를 보라. ↩
자코도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탈성장 개념어 사전』, 강이현 옮김, 그물코, 2018, 21-22쪽, 재인용. 강조는 나의 것이다. ↩
요르고스 칼리스,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수전 폴슨, 『디그로쓰』, 우석영‧장석준 옮김, 산현재, 2021, 29쪽. ↩
이에 대해서는 자코도 달리사 외, 『탈성장 개념어 사전』, 21-26쪽을 참고하라. ↩
이에 대해서는, ‘기후위기에서 기후 정의로’, 『뉴래디컬 리뷰』, 통권 2호, 도서출판b, 2021. ‘탈성장: 기후위기와 불평등 심화, 방향전환의 열쇳말’, 『여/성이론』, 통권 47호, 도서출판 여이연, 2022. ‘기후 생태 커먼즈’, 『문화과학』, 통권 109호, 문화과학사, 2022 등을 보라. ↩
권범철, 「생태위기와 돌봄의 조건」, 『문화과학』, 통권 109호, 2022, 77-78쪽. ↩
이러한 관점을 구현하는 책으로,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기획 『탈성장들: 하며 살고 있습니다』, 모시는사람들, 2024를 보라. ↩
‘적다’는 것은 ‘소유’의 관점에서 더 적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적을수록 우리는 더 가난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더 좋은 삶의 풍요를 가져오기도 한다. 가난 때문에 풍요롭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난은 서로를 더 강하게 연결시키고, 그러한 연결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가난은, 그것을 구성과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결여가 아니라 풍요로운 정치적 구성을 이루게 하는 계기이자 사랑을 정치적으로 실현하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가장 장수하는 니코야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가족, 친구, 이웃들과 견고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들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스스로가 가치있다고 느낀다. 실제로 가장 빈곤한 가구들이 가장 긴 기대수명을 갖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의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제이슨 히켈, 『적을수록 풍요롭다: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김현우‧민정희 옮김, 창비, 2021. 244쪽. ↩
자코도 달리사 외, 『탈성장 개념어 사전』, 27쪽. ↩
때로는 자본은 비생명활동이나 폐기물조차도 가치화한다. “소말리아 해안가에 유해 폐기물을 실은 녹슨 컨테이너들 … 유럽 기업이 아프리카의 뿔에 우라늄을 뿌리는 데 톤당 2.5달러가 든다. … 이것은 유럽에서 그 물질을 깨끗하게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의 백분의 일에 해당한다.” 데보라 코웬, 『로지스틱스: 전지구적 물류의 치명적 폭력과 죽음의 삶』,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7, 220쪽. ↩
‘자기가치화’는 1970년대 이래로 이탈리아의 노동운동과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에서 제기된 개념이다. 자본의 가치화(가령 자연의 원료화-불변가치화, 인간의 임금화-가변가치화, 전체 생명의 상품화-교환가치화)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사보타지는 비가치화로 한정되기보다는 노동자들의 자치적 삶의 비자본주의적 가치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창조하는 노동계급 자기활동성의 모든 형식”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해리 클리버,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18, 36-37쪽을 참고하라. ↩
자코모 달리사 외, 『탈성장 개념어 사전』, 43쪽. ↩
‘다중-만들기’와 ‘공-산’에 대해서는 또 다시,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공통체』와 『어셈블리』, 그리고 도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참고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