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2024년 12월 6일(금) 서울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된 〈2024한국기본소득포럼-‘생태-사회-경제’의 단초를 찾아서〉 중 「탈성장과 기본소득」 세션에서 발표된 내용으로, 주최 측의 허락을 받아 《생태적지혜》에 게재합니다. |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남원의 한 종가와 그 땅을 일군 농민들의 삶을 그린 불세출의 대하소설 『혼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잘못되고 부서진 것들은 복구되어야 한다. 제도와 관습이라는 허울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빼앗아 박살하여 버린 횡포는, 마땅히 역사와 사회로부터 철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와 환경을 모든 인간 앞앞에 각자의 몫으로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것을 받은 자가 제 몫을 어떻게 쓰든지 간에.1
이 대목의 화자는 종가의 일원이면서 구체제 혁신에 진심이었던 강호라는 캐릭터이다. 그런데 최명희 작가는 이 구절을 따옴표로 묶지 않았다. 강호라는 등장인물의 목소리에 서술자인 자신의 목소리를 얹은 것이다. 양반으로서 당대 최고의 교육(일본 유학)을 받은 계몽된 근대인인 강호(와 작가)는 ‘몫’이라는 담론을 들여옴으로써, 인신의 예속(신분제)으로부터의 해방뿐 아니라 경제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이 ‘몫’의 담론을 지금 우리 시대로 가져오면 기본소득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1930년대였을까? 추측건대, 최명희 작가는 그 시대를 일종의 ‘그라운드 제로’로 생각했던 것 같다. 제국주의라는 대재앙의 시대, 수탈당한 식민지로서 폐허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 자명하지만 그만큼 무언가를 새로이 올바르게 지을 수 있었던 시대. 어쩌면 작가는 그 시대가 한국 사회를 발본적으로 바로 세울 적기였다고 본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지금 우리가 기후 위기라는 전지구적 대재앙에 맞서 기본소득을 통한 생태-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을 꿈꾸는 것처럼 말이다.
위기는 기회: 코로나19라는 아이러니

사진출처 : Roger Bradshaw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우리 앞에는 노동윤리(’일 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철벽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 불균형(수도권-비수도권), 노동시장 불균형(대기업-중소기업, 원청기업-하청기업, 정규직-비정규직), 젠더 불균형(외벌이와 독박 육아) 등으로 드러난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졌고, 부동산 불패 신화(’집값은 오늘이 제일 싸다’)는 더 이상 ‘부모 찬스’나 ‘코인 떡상’ 같은 외부 요인 없이 근면한 노동만으로는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다는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다루는 등 대중매체에서도 기본소득이 심심찮게 언급되는 시절이 도래했지만, 노동윤리의 기능부전을 해소해 줄 대안을 경험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그 최초의 경험이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생태적 위기로부터 파생된 팬데믹을 통해 ‘긴급재난지원금’과 ‘상생국민지원금’이라는 이름의 보편소득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19 지원금은 단발성이었고 외국인 배제 등의 문제를 남겼다는 점에서 완벽한 의미의 기본소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심사 없이 (가구가 아닌) 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보편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3~4년이 흐른 올해, 코로나19 지원금의 효과와 순기능에 대한 연구가 속속 발표되고 있는 만큼2 기본소득에 대한 인식과 기대는 점점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UBIS: 한국형 보편복지의 시작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기본소득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기본소득이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대중의 인식이 어떠한가와 별개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물적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 기후 위기를 비롯한 탈성장 압박(지구 한계선, Planetary Boundaries)과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AI 주도의 기술 혁신으로 인해, 일자리(임금노동)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국민경제를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령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부족해 노동윤리에 따른 심리적 저항이 거세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임금이 아닌) 소득 패러다임으로 새 판을 짤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따라서 [발표 1]에서 다루고 있는 보편적 기본소득(UBI)과 보편적 기본서비스(UBS)의 상보적 관계3와 [발표 2]에서 강조되고 있는 불평등 완화와 기후 위기 완화에 복무하는 자금 흐름 설계는 기본소득이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가와 직결되어 매우 중요하다.
[발표 1]에서 소개하고 있는 생태경제학자 뷔흐스의 관점—UBI와 UBS를 배타적이고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적 맥락 속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복지 동학’으로 사고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태도이다. 압축 성장의 대명사인 한국은 산업화 이후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경험하지 못한 채 곧바로 신자유주의로 이행했고, 그 결과 보편 복지망이 터무니없이 성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 소멸과 인구 절벽이 디폴트값인 작금의 대한민국은, UBS 중에서도 사회주택 공급(예: 화순시 만원 아파트)과 고등교육의 공공성 강화(예: 지방거점국립대 중심의 산학 클러스터링-연구중심대학 이원화)가 매우 절실한 상황이다.
UBI와 UBS의 결합은 자금의 선순환과도 무관하지 않다. [발표 2]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기본소득의 목적과 탈성장의 목적 중 일치하는 부분인 불평등 완화”를 달성하려면 개개인에게 지급된 기본소득이 부동산이나 사교육처럼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하고, 이를 막으려면 사회주택과 공공고등교육이라는 UBS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기후 위기 완화를 위해서는 탄소 배출을 최소화한 교통망과 농수산물 유통망이 최소한의 UBS로 더해져야 할 것이다.
나아가 UBI와 UBS의 결합은 우파 버전의 기본소득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이미 2000년대 중반 독일의 거대 자본가 괴츠 베르너는 행정비용 감축을 명분으로 모든 사회보장제도를 현금 지원으로 ‘퉁치는’ 반동적인 기본소득안을 제출한 바 있다. 그리고 한국의 우파라면 가장 납작하고 속류적인 기본소득안을 채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대부분 탈성장 감수성이나 후속 세대에 대한 책임감 따위는 전혀 없는 기회주의자들이기 때문에, 탈성장과 생태-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추구하는 우리보다 훨씬 더 빠르게 결정하고 빠르게 실행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형 유비스(UBIS)의 설계를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
다시 한번 기본소득: 시간과 욕망의 재조직화
6년 전, 지금은 폐간된 웹진 〈문학3〉에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르게’ 욕망하기」4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키워드3’이라는 섹션에 실린 글로, 편집진이 키워드 2개를 주면 필자들이 자기만의 키워드를 더해 총 3개의 키워드로 글을 풀어나가는 프로젝트였다. 내가 받은 키워드는 ‘기본소득’과 ‘예술’이었고, 내가 더한 키워드는 ‘탈척도’였다. 기본소득은 노동가치론에 입각한 임금노동 패러다임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척도를 벗어나 있고, 예술은 ‘측정불가능한 방식으로 생산적인 행위’의 원류이자 전형으로서 척도를 벗어나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화된 상호작용 속에서 (예술과 돌봄이 그러하듯) 측정불가능한 방식으로 가치 생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논지의 글이었다. 그리고 글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탈척도만큼이나 중요하게 제시한 단어는 ‘시간’과 ‘욕망’이었다.

사진출처 : James Baldwin
본 세션 ‘탈성장과 기본소득’을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도 결국 시간과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세 편의 발표 모두 기본소득을 통해 시간과 소비를 탈성장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때 노동시간 단축(발표 1)과 노동 거부(발표 3)는 시간의 자율을, 생태적 소비의 정착(발표 2)은 욕망 회로의 재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맞물려 있다. 기본소득을 통한 시간의 자율은 시간을 다르게 쓸 가능성, 다시 말해 조건 없는 가처분 소득을 통한 가처분 시간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렇게 시간을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되면 욕망의 회로도 생태적으로 재편될 수 있다. 지구를 한계로 몰아가는 생태 파괴적 소비의 명분을 떠올려 보라. 사실상 유일한 명분은 ‘편리함’인데, 그 편리함의 절반 정도는 ‘시간 절약’에 해당할 것이다. 설거지할 시간이 없어서 일회용품을 쓰고, 내일 당장 받아야 해서 로켓배송을 쓰고, 대중교통은 너무 돌아가기 때문에 자동차를 몬다.
사실은 게으름 때문인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절반이라고 말한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게으름이 아니라 ‘귀찮음’이다. 그런데 귀찮음 역시 시간의 자율과 연결되어 있다. 뭔가가 귀찮다는 것은 그것에 대응할 에너지가 없다는 뜻이고, 에너지는 임금노동을 멈추고 온전한 쉼—그것이 잠이든 산책이든 취미 활동이든—을 취할 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가처분 소득(지원금)과 함께 반강제적 원격근무를 통한 가처분 시간 확보도 경험했다. 지옥철을 겪지 않고 출퇴근 시간이 온전한 가처분 시간이 되는 경험. 잠을 더 자건, 차를 마시며 멍을 때리건, 어제 못한 설거지를 하건, 아무래도 좋은 자율의 시간.5
이렇게 지금과는 다른 리듬으로 일상을 조직할 수 있다면 우리의 욕망도 달라질 것이다. 코로나19 지원금이 자전거, 소고기, 배달 음식, 전집 도서 등에 몰린 것은 그것이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일회성 소득이었기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본소득이 한국형 보편복지라는 마스터플랜의 한 마디로서 정규 정책으로 도입될 때 비로소 탈성장과 생태-돌봄 사회로의 전환에 기여하는 자금 흐름을 기획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이 특별한 사건이나 예외적 조치가 아니라 ‘제도’가 되어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생활인으로서 그것을 감각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설계가 가능할 것이다.6
다시 『혼불』로 돌아가 보자. 서두에서 인용한 대목 앞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런 세상은 반드시 바뀌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미구에 바뀌고 말 것이다. 그 징후는 이미 도처에 보이고 있다.)
작가는 이 구절에 괄호를 씌워 아직 발화되지 못한 채 마음속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무언가를 암시했다. 소설 속 시점으로부터 90년이 지난 지금, 이제 우리가 이 괄호를 벗겨낼 때이다.
코로나19 전후 소득분배 변화 및 공적이전의 효과(이원진, 보건복지 Issue & Focus 450호, 2024년, 1-11쪽), 코로나19 재난지원금, KAIST가 분석해 보니 “효과 뚜렷”(뉴시스, 2024년 10월 16일) 등. ↩
일본의 사회경제학자 야마모리 도루는 2009년에 출간한 저서에서 UBS를 ‘기본커먼즈'(basic commons)라 부르며 UBI와 UBS의 결합을 제시한 바 있다. 야마모리 도루, 『기본소득이 알려주는 것들』, 은혜 옮김, 삼인, 2018, 224-228쪽. ↩
폐간된 관계로 개인 링크 제공. ↩
자녀를 양육 중이거나 환자를 부양해야 하는 경우에는 시간의 자율을 누리기 어렵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이 시간의 자율을 온전히 누리려면 사회적 돌봄이라는 UBS가 반드시 필요하다. ↩
기본소득은 실행하면서 기획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은 실험실에서가 아니라 곧바로 임상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초보적인 보장 수준이라 하더라도 일상에서의 미시적인 변화가 하나의 경향으로 포착될 때까지 장기간 꾸준히 실행되어야 하며, 최적의 시나리오를 찾을 때까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거듭 기획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