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싶습니다. 가까이에서 정치를 느껴본 적이 있나요? 정치로 욕망을 계획한 적이 있으세요? 별로 없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 곁에서 정치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생명을 돌봐야 할 정치는 여의도와 용산에서 드잡이하느라 밀양과 금강, 병원과 학교 등 정작 있어야 할 곳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품은 몸으로 감각 할 수 없으니 ‘없는 정치’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권력을 향한 거짓 욕망으로만 작동되니 ‘거짓정치’라고 하는 게 더 낫겠습니다.

사진 출처: Franz26
합정에는 ‘오키로북스’라는 작은 책방이 있습니다. 오키로북스라는 이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하건대 주인은 책방을 드나드는 손님들의 관계 범위를 그쯤으로 보지 않았을까 합니다. 오키로북스로 연결된 관계 범위 안에는 많은 것들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눈인사를 할 수 있고, 책방이나 마을가게에서 만나면 안부를 묻을 수도 있습니다. 마을 일이 생기면 의논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급하게 반려동물 돌보는 일을 부탁하는 등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을 봐줄 수도 있습니다. 공감과 신뢰, 호혜로 비정형적인 생활을 나누는 관계망의 범위입니다. 이만큼이 우리가 매일 몸으로 느끼고 감각할 수 있는 범위입니다.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프랑스 파리의 ‘15분 도시’는 관계 범위를 시간으로 바꾼 정치기획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역은 이렇게 공간에서 시간으로 또 시간에서 공간으로 개개인의 삶의 양식이 직조(織造)되어 만들어집니다. 직조된 문양이 켜켜이 쌓이면 지역문화가 되고 비로써 고유한 장소애(Topophilia)와 장소감(Sense of Place)이 생성됩니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 안에서 생명은 순환성, 관계성, 다양성, 영성으로 닫힌 실현지를 누리면서 역설적으로 진화를 위한 탈주로는 늘 열어 놓고 있습니다. 『지역의 발명』(착한책가게, 2022)에서는 지역의 최소범위를, 지역학자 샤프토 H. Shaftoe가 말한 인구 약 오천 명 정도나 슬로시티선언에서 규정한 인간적 삶이 가능한 적정인구 5만 명 또 옛 사람들이 작은 하천을 끼고 모여 살았던 4km 정도로 소개했습니다. 정치가 할 일은 여기서 매일매일 지역의 관계망과 살림을 점검하고 개선하고 돌보는 일입니다. 여기에 정치가 없으면 없는 겁니다.
이러한 정치를 김지하 시인은 ‘구릿골 기행’에서 서로 어울리고 기대는 생명운동의 법칙을 인위적으로 실천하는 동양의 정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양에서 정치는 본래 하늘의 뜻을 받아 그 뜻이 가진 법칙에 따라 인위적으로 세상을 조절해 가는 행위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 우주적인 후천개벽의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도 우주적인 생명운동의 법칙에 따라 그것을 인위적으로 적극적_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의미에서의 포괄적 정치성이라 불러야 하겠습니다.’

어떤가요? 하늘의 뜻, 우주적 생명운동의 법칙, 후천개벽 어마어마한 것 같지요. 조금 다르게 말하면 하늘의 뜻과 후천개벽, 생명운동의 법칙은 개인의 존재 욕망으로 볼 수 있고 정치는 그것을 실현하는 포괄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정치의 역할을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지역에 거주한다는 것은 단지 그 지역에 거주한다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자기 본래대로 진가를 발휘하며 만개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내고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하는 것은 우선 살리는 것이고 이는 더 오래된 의미로는 무엇이라도 그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에 거주한다는 것은 사물들을 돌보아 존재하게 하거나 그 자체가 되게끔 하는 것이다.’ 살 맛 나겠지요. 꿈꿔 볼 만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는 폭우와 폭염, 자살률과 출생률, 수도권과 지방, AI와 미래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의제 앞에서도 아무런 정책과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의도와 용산을 오가는 고함과 조롱으로 오염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정치를 마주하며 어디서부터 정치를 다시 재발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근본으로 돌아가 “정치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물을 수도 있습니다만, 왠지 설레지 않습니다. 이 물음에 정치학자들의 책을 들춰 답을 찾을 수는 있지만 쉽지도 않고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서 정치의 근본을 ‘내 삶과 욕망을 위해 어떠한 정치가 필요한지?’ 지극히 개인적으로 정치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사회와 국가와 공동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내가 꽃 피워 열매 맺을 수 있는 나를 위한 진짜 정치가 무엇인지?’를 물으면 어떨까요. 질문 하나로 정치가 재미있어지고 정치 앞으로 바짝 다가서게 됩니다. 베르그송이 말한 ‘생을 약동시키는 욕망’으로 정치를 다시 구성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개인적인 정치라는 말에 화들짝 놀랄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인과 사회는 교육받은 것처럼 생각으로는 분리될 수 있지만 떼어내고 싶어도 떼어낼 수 없는 개체집합적 존재이고 창조적 생명으로의 인간은 사회적성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살림을 위해 생활의 최대 순환관계망이 작동되어야 할 지역에서 개인의 욕망을 돌보며 꽃 피우고 열매 맺게 할 정치는 개인의 욕망을 개체집합적으로 적당하게 조율할 수 있습니다. 이 말들이 익숙하지 않고 낯선 만큼 정치의 문법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권정치, 중앙정치, 패권정치, 서열정치, 특권정치 등의 근대정치를 작동시키는 공식에서 벗어나 가까이 감각할 수 있고 서로 기대어 사는 포괄적 돌봄 관계로 작동되는 정치를 발명해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문법의 정치가 지역을 배경으로 실험 중이고 실험될 수 있습니다.
실험들은 가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설은 일반적으로 맥락적이지만 때로는 초맥락적으로 중력을 벗어날 때 더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흥미로운 지역정치와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진 지역정치를 상상해보겠습니다. 그 처음은 정치전환 흐름으로 호기롭게 등장했지만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지역정치운동부터입니다.
실패할 지역정치와 성공할 지역정치 실험
외면하고 싶고 바꾸고 싶은 심지어 분노를 일으키는 정치의 민낯을 볼 때마다 지역정당과 직접민주주의, 지역자치, 분권을 핵심으로 하는 지역정당(정치)이 자주 등장하고 실험되고 있습니다. 필요성이 강조되는 만큼 관심과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대부분은 기존 정치(정당)의 자장(磁場)으로 흡수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지역정치(정치)의 실험 대부분이 기성 정치제도를 개혁하자는 기존의 지역정당(정치)이론이나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권 진입을 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결과를 향한 급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지역정치(정당)운동을 하는 분들의 공심(公心)과 노력을 존경하고 한편으로 이렇게 해야 지역정치가 가능해지고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말에 공감이 되기도 합니다. 또 좋은 지역정치인들이 곳곳에서 지역의 문제와 필요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지원하고 있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 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기성정당으로 흡수되거나 좌절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기존정치체제의 중력이 이처럼 강해서인지 지역정치도 서울을 향해 줄 서 있고 지역에서 주민들이 지역정치의 효능감을 느끼기란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일 뿐입니다.
제가 가장 재밌게 봤던 지역정치 사례는 스페인이나 스위스, 일본의 지역정당제도 보다는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생생한 해외의 사례들입니다.
‘독일 최초로 녹색당 시장을 탄생시킨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는 지역정당의 도시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곳에 ‘비둘기 전략’이 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행사를 한 후부터 국내에서도 비둘기 개체수가 급증하고 도시 곳곳에 비둘기 배설물이 떨어져 골머리를 앓게 돼 2009년부터 비둘기가 유해동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프라이부르크도 비둘기 문제로 주민들 민원들이 쏟아지고 도시 공공시설과 집마다 발코니에는 그물과 뾰족한 못을 설치해 다치거나 죽은 비둘기 사체들이 발견되는 등 주민과 비둘기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이때 프라이부르크 녹색당은 시청에 비둘기 전략을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둘기 전략’이 [비둘기의 집]입니다. 모여 사는 비둘기 생활 특성을 고려해 주민 거주지와 거리 등에 [비둘기 집]을 만들고 비둘기가 지정된 지역에 모여 살 수 있도록 하면서 개체수를 조절했습니다.’
‘프랑스 낭트 조안나 롤랑시장(사회당)은 코로나19팬데믹 기간 동안 시민들의 건강한 먹거리 공급차원에서 공원뿐 아니라 건물 사이사이의 시내 유휴공간을 이용해 대규모 텃밭사업을 시작해 약 2만 5000제곱미터를 조성했고 여기에서 수확된 야채들을 1천여 저소득가정에 무상으로 공급했습니다. 게다가 고용된 250명의 정원사들이 텃밭을 조성하지만 시민단체와 자발적인 가족 단위의 시민들이 함께 텃밭을 일구도록 독려했습니다.’
이 밖에도 지역정당의 생생한 해외 사례는 많이 있지만 이 사례들이 가진 보이지 않는 축적된 시공간의 노력을 보지 않고서는 해외의 좋은 사례는 우리에게 실패 사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지역정치는 과정입니다. 결과로는 지역정치를 세울 수 없고 축적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은 지역주민과 이제는 비인간까지 포함하는 지역구성체들과의 돌봄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선문답 같지만 지역정치는 따로 없어야 하고 모두가 지역정치가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는 이 과정으로 몇 가지 시나리오를 써보겠습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4km 정치, 15분 도시, 오키로북스~ 보다 더 미시적이어도 좋을 정치를 들여다보는 관점과 방식이 중요하겠네요~ 연구소도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한 연결망의 지혜를 나누는 곳이고요~ 후속 글 기대할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