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는다. 치약에는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글리세린이 들어가는데, 이는 주로 소나 돼지의 지방에서 얻는다. 클렌저로 얼굴을 닦는다. 피부 탄력과 보습을 위한 콜라겐은 소, 돼지, 장어, 연어에서 추출된다. 샴푸와 트리트먼트로 머리를 감는다. 보습과 영양을 위해 벌의 꿀과 소의 젖이 쓰이고, 모발 강화와 큐티클 보호를 위한 케라틴은 말, 양, 소의 털과 뿔, 발굽에서 추출한다. 이후 얼굴엔 보습제를 바른다. 여기엔 콜라겐, 라놀린, 밀랍, 프로폴리스, 달팽이 점액, 스쿠알렌이 포함되며, 이 성분들 역시 소, 돼지, 양, 벌, 달팽이, 말, 상어에게서 온 것이다. 밥을 먹는다. 닭, 돼지, 소는 물론 고등어, 조기, 삼치, 멸치, 갈치 같은 다종의 동물이 식탁에 오른다. 옷을 입는다. 소, 양, 거위, 누에, 오리, 토끼, 염소, 알파카, 악어, 뱀 등 수많은 동물의 가죽과 털이 사용된다. 소지품을 챙긴다. 볼펜에는 소와 돼지에서 유래한 글리세린이, 접착제에는 토끼 가죽과 뼈가, 노트에는 소가죽 커버가, 연필심에는 스테아르산이 들어가며 이 역시 소, 돼지, 양, 말 등에서 얻은 것이다. 출근길엔 가죽 시트에 앉아 이동하고, 퇴근 후에는 가끔 술도 마신다. 맥주는 가오리와 상어의 방광에서 얻은 이징글라스(부레풀)로 여과되고, 와인은 달걀흰자로 정제되며, 양주는 소와 돼지의 피부와 뼈에서 추출한 젤라틴으로 불순물이 제거된다. 그리고 잠자리에 든다. 침구에는 거위, 오리, 양, 염소의 털이 들어 있다.

사진 출처 : Vitaly Gariev
단 하루라도 동물 유래 성분 없이 살아보라고 하면, 전혀 몰랐던 부분에서 할 수 없는 일이 많아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삶 대부분을 비인간동물에게 의존하고 있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기대면서도, 그 의존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는 잘 모른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그에게 보답하거나 받은 호의를 다른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그런데 인간은 비인간동물에게서 막대한 이익을 얻으면서도, 그들을 위하려는 생각은 대부분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이 돈을 벌었는데 마음 편히 쓰는 것도 못해!” 시장에서 정당하게 돈을 내고 샀으니 다른 책임은 뒤로하고 효용만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우리는 비인간동물에게 얻은 이익에 보답하기 위해 그들의 자연스러운 삶을 존중하기는커녕 어떻게든 더 쥐어짜려고 온 정성을 쏟는다. 왜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어떤 이유도 우리가 매년 수십억 명의 비인간동물을 잔혹하게 착취해서 “품위”있는 삶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명심해야 하는 단순한 사실은 무언가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는 그에 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그 책임을 회피한 결과, 인간의 근간인 지구가 오염되어 인간이 살아남기 힘든 곳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이런 행위는 생명 대부분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에 절대 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절대악에 동조하거나 묵인하지 않는 비교적 쉬운 방식이 있다. 그것은 비인간동물을 먹지 않는 것이다. 식량이 부족한 곳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면, 유통과 공급이 활발한 도시에서 사는 우리는 얼마든지 비인간동물을 먹지 않고도, 식물성 식단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비인간동물을 고려하는 훌륭한 태도다. 나는 비건이다. 동물을 먹거나, 입거나,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최대한 엄격하게 실천하고 있다. 나는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의 결과로 생산된 이익을 거부한다. 식물을 먹고, 중고 옷을 입고,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은 화장품을 선택한다.

사진 출처 : Greta Hoffman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식물로부터도 이익을 얻고 있는데, 식물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 역시 식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태도는 모순처럼 느껴졌고, 스스로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인간동물을 고려하는 삶을 살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식물을 죽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식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했고, 내가 먹은 것을 다시 땅으로 돌려주면, 그 영양이 식물에 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퇴비를 만들기로 했다. 실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간이변기를 만들고, 왕겨를 구했다. 그 뒤로 간이변기에 일을 보고 왕겨를 잘 섞어 보관하며 퇴비 재료를 모았다. 약 두 달 동안 내가 먹은 것을 기록하고, 그에 따른 배설물을 모았다. 이후 지인의 밭에 그 재료를 가져다 놓고 발효되기를 기다렸다.
1년쯤 지나자, 그 퇴비는 왕겨가 섞인 부드러운 흙이 되었다.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다. 나는 이 흙을 내가 자주 먹는 작물들이 자라는 곳의 땅에 돌려주기로 했다. 쌈케일이 자라는 홍성, 양배추가 나는 제주, 현미가 재배되는 함양. 그곳의 농지에 찾아가서 퇴비를 뿌릴 것이다. 내가 식물에서 얻은 수많은 이익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적어도 이익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헛짓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아도, 모순이 있어도, 어리석더라도 그 의도가 생명을 향한 존중과 책임에 있다면, 그 실천은 절대로 작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