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은 그것을 생각하는 사유를 넘쳐 흐른다
Like the shadow of an idea not yet fully thought, a shadow from the future(another wonderful phrase of Shelly’s), the ecological thought creeps over other ideas until nowhere is left untouched by its dark presence. Darwin trusted the theory of evolutionary impermanence so much that he was prepared to suspend his disbelief in continental permanence, although in his day there was no tectonic plate theory.’ Such is the force of the ecological thought. As one philosopher put it (see this book’s epigraph), “infinity overflows the thought that thinks it.”
p. 2-3, Introduction: Critical Thinking, 『The Ecological Thought』
아직 온전히 사유되지 않은 어떤 생각의 그림자처럼, 혹은 미래가 드리운 그림자처럼(셸리의 또 다른 멋진 표현), 생태적 사유는 다른 모든 생각 위로 서서히 스며든다. 마침내 그 어디에도 생태적 사유의 어두운 존재감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된다. 다윈은 진화적 가변성을 너무나 신뢰했기에 그가 살던 시대에 판구조론이 없었음에도 대륙 고정설에 대해 불신의 유예1 를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생태적 사유의 위력이다. 한 철학자가 말했듯이(이 책의 첫머리 인용문 참조) “무한은 그것을 생각하는 사유를 흘러 넘친다”
p. 2-3, 서문: 비판적 사고, 『생태적 사유』
처음 읽은 날의 기록:
‘진화론, 적자생존, 비글호, 갈라파고스, 핀치새’ 고작 몇 개의 단어로만 상식 수준에서 다윈을 접했다. 이름만 아는 정도다.
다시 읽은 날의 기록:

처음 읽었을 때 ‘다윈은 ‘모든 생명이 변한다’는 진화의 원리를 확고하게 믿었기에 당대의 상식인 ‘대륙 고정설’을 불신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문맥상 판 구조론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땅이 움직인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 생태적 사유의 힘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suspend‘는 아무리 사전을 찾아봐도 ’중지하다, 미루다‘는 뜻이어서 ‘suspend his disbelief’는 ‘불신을 중지했다 = 믿었다’는 말이 되어 생태적 사유의 힘이 사라진다.
모튼이 ‘belief’를 ‘disbelief’로 잘못 쓴 게 아닐까 했지만 ‘suspend his disbelief’에 문학비평에서 쓰는 ‘불신의 유예’ 즉 영화를 볼 때처럼 가짜인 줄 알지만 그러려니 하고 보는 것(그래야 재미있다), 요즘 말로 하면 흐린 눈을 한다(그래야 살 수 있다)는 뜻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다윈은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네네 님들 말씀 다 맞아요’ 했을 거라 짐작해 본다. 1809년부터 1882년까지 생존하며 1831년부터 1836년까지 비글호에 탑승해 항해를 하고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하기까지, 나아가 그 이후에도 은둔 연구자로 살았던 다윈이다.
‘적자생존’은 흔히 알고 있듯이 ‘약육강식 = 강한 자가 살아 남는다’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다’ 혹은 ‘환경에 적합하게 변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며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이 아름답다는 걸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수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고, 덤불에서 노래하는 새들과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곤충들 그리고 축축한 땅 위를 기어다니는 벌레들로 가득 차 있는 뒤얽힌 둑(entangled bank)을 지긋이 관찰하면 참으로 흥미롭다. 또한 서로 너무나도 다르고,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는, 정교하게 구성된 이런 형태들이 모두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법칙에 의해 탄생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법칙들은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번식을 동반한 성장, 번식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대물림, 외부적 생활 조건의 직간접적인 작용과 사용 및 불용에 의한 가변성, 생존 투쟁을 초래하는 높은 개체 증가율, 자연 선택의 결과로 나타난 형질 분기와 덜 개량된 형태들의 멸절을 포함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대상인 고등 동물은 이 법칙들의 직접적 결과물로서 자연의 전쟁 및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탄생한 것들이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 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장대익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19, 650쪽.
다시 읽을 날의 기록:
May the force be with you!
왜 이토록 마음을 쓰는가
얼마 전에 독서 모임이 있었다. 아이들의 겨울방학 동안 쉬어서 오랜만에 모였다. 근황을 한참 나누다가 집에 가기 전 잠깐이라도 책 이야기를 하자고 펼쳐 든 책은 『세네카의 대화: 인생에 관하여』였다. 나는 서양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로고스’의 개념을 알려주는 짧은 영상(미리 찾아 놓았다)을 같이 보자고 했고, 책의 1권 ‘섭리에 대하여’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읽었다.
너희의 좋은 것들은 내면을 향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는 외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본성에 기뻐한다. 나는 모든 좋은 것을 안에 넣었다. 행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너희의 행운이다.
‘하지만 슬프고 두렵고 참기 어려운 많은 일이 생깁니다.’ 나는 너희를 거기에서 구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에 맞서도록 너희의 정신을 무장시켰다. 용감하게 견뎌라. 이 점에서 너희는 신을 능가할 수 있다. 신은 나쁜 것들을 겪지 않지만, 너희는 이를 극복한다. 가난을 무시하라. 태어난 순간보다 가난한 사람은 없다. 고통을 무시하라. 고통에서 해방되거나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죽음을 무시하라. 죽음은 너희를 끝내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준다. 운명을 무시하라. 나는 운명에 너희의 정신을 공격할 무기를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너희가 원하지 않는데도 누군가 너희를 붙잡지 않도록 조처했다. 출구는 열려 있다. 싸우고 싶지 않으면 도망쳐도 된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제1권 섭리에 관하여」, 『세네카의 대화: 인생에 관하여』, 김남우‧이선주‧임성진 옮김, 까치, 2016, 28쪽.
그런데 이 분위기 무엇? 나 혼자 떠들고 다들 잠 오는 듯…어쩌지? 싶은데 누군가 “철학 이야기하니까 사람이 표정이 달라지네. 눈빛이 반짝거린다.”고 했다. 아…, 뭐…, 내가 그랬나? 그랬구나! 어린아이처럼 마냥 신났구나 싶어 너무 웃겨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 왠지 점점 울컥해졌다. 나 철학 많이 좋아하는구나. 몰랐는데 사랑하네. 남들이 먼저 알아버렸다.
철학 같은 고리타분한 걸 좋아하는 별난 사람 취급받는 것 같아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나중에 티머시 모튼의 『생태적 삶』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왜 내가 마음을 써야하는가?’라는 소제목의 글이다.
무-심(care-less) […] 사랑의 반대는 아무것도 마음 쓰지 않는다는 저 바닐라 향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몹시 까다로운 이유는 깰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일종의 무-심의 태도로 이 책을 썼으니, 여러분도 무-심하면 좋겠다. 부디 무관심을 삭제하는 버튼을 누르지 말라. 그 대신 지금까지 우리가 한 것처럼 이 무관심을 탐구해 보는 것은 어떤가? 이 무관심의 탁한 영역에 부드럽고 고무 같은 무감각의 공이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감각은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감각이다. 이 무감각을 각별히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얻으려 고무 껍질을 벗기거나 가위로 찌르지 말라. 그 대신 외부에서 탐구하라.
티모시 모튼, 『생태적 삶』, 김태한 옮김, 엘피, 2023, 45-47쪽.

바닐라 향?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 아니고 바닐라 향이었나? 특별한 맛이 있지는 않고 보통 아이스크림 맛인데 ‘아무것도 마음 쓰지 않는 바닐라 향의 느낌’은 뭘까 생각해 본다. 익숙해서 그것이 ‘향’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되는 편안함 정도일 것 같다. 나도 어떨 때는 바닐라 향이면서 다른 사람을 바닐라 향이라고 지적할 수는 없다. 그러니 모튼의 말대로 무관심, 무감각을 무-심의 태도로 각별히 조심해서 외부를 탐구해야겠다.
철학은 어렵다. 사랑이니까. 사랑이 어디 쉽나?
‘일종의 무-심의 태도로 이 책을 썼으니’라고 모튼은 이야기했지만 전혀 전혀 무-심이 아니고 완전 치열하게 무-심에 마음을 쓰고 있는 역설이 느껴진다. 다윈의 ‘불신의 유예’스럽다.
철학자와 과학자의 이런 무-심의 태도에서 철학(philosophy)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지혜’가 아니고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어쩌면 이 사랑은 깊고 고독하고 지독한 사랑이겠지.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아니 찬사를 보내기엔 너무 애틋하다. 그렇다고 슬프게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반짝인다.
조약돌 일곱
‘이 사랑’을 가만히 놓아둔다.
불신의 유예(suspension of disbelief): 서사를 즐기기 위해 비현실적이거나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예컨대 추측적 허구 작품의 요소들을 이해할 때 비판적 사고와 논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말한다.(출처. 위키피디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