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철학하기] ⑦ 먼 미래에서 만나자. 기다리고 있을게.

셸리의 시적 표현과 모튼의 생태적 사유를 따라가며 미래의 그림자를 만난 순간의 기록이다. 피아노 선율이 하이데거의 사방(Gevierte)과 어우러지고 지혜를 사랑하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나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응시하며 사물과 세계에 다정하게 조현(attunment)하는 법을 배운다.

미래가 드리운 그림자

Like the shadow of an idea not yet fully thought, a shadow from the future(another wonderful phrase of Shelly’s), the ecological thought creeps over other ideas until nowhere is left untouched by its dark presence. (p.2, Introduction: Critical Thinking, 『The Ecological Thought』)

아직 온전히 사유되지 않은 어떤 생각의 그림자처럼, 혹은 미래가 드리운 그림자처럼(셸리의 또 다른 멋진 표현), 생태적 사유는 다른 모든 생각 위로 서서히 스며든다. 마침내 그 어디에도 생태적 사유의 어두운 존재감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된다. (p.2, 서문: 비판적 사고, 『생태적 사유』)

처음 읽은 날의 기록:

a shadow from the future를 ‘미래에서 온 그림자’로 옮겨보니 SF나 타임슬립 영화 같은 느낌이 난다. 셸리의 표현이라면 좀 더 시적일 텐데…

다시 읽은 날의 기록:

‘미래로부터 드리워진 그림자’라고 해석하면 ‘드리워진’이 수동형이어서 그림자가 내려앉은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모튼이 말하는 어두운 생태학, 어두운-우울함, 어두운-기이함에서 도망칠 수 없다.

‘미래가 드리운 그림자’는 ‘드리운’이 능동형이어서 미래가 그림자를 던지는 느낌이다. 모든 존재가 상호연결된 그물망에서 한 번도 분리된 적 없었음을 알아차리라고 미래에서 보내는 신호 같다.

피아노를 친다

시타북빠(시+타이포그라피+책+술). LP, cd 청음 bar. 사진제공 : 김진희

월요일 낮 시타북빠(라운지형 북카페)는 조용했다. 숙소(마음스테이)를 이용하는 손님들은 소금빵 조식을 먹고 어디론가 나갔고 며칠간 같이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 스태프도 육지로 떠나고(여기는 제주도, 스테이에는 안녕이 많다) 실장님(사장님보다 실장님이 거리감이 없다는 실장님, 나는 언니라고 부른다)과 둘이 있었다.

그냥 그런 마음이 들어 피아노를 쳤다.

“언니한테 피아노를 쳐줄게요. 지금 연습하는 곡이라 앞부분만 칠 수 있어서 짧아요.”

라며 연주 수준은 아니니 기대하지 말고 들어달라는 뜻을 전했다.

넓고 조용하고 고요한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니 쑥스럽다. 헨델의 ‘파사칼리아 passacaglia’의 한 부분을 누군가가 쉽게 편곡한 곡이다. 언니는 와! 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더 쑥스럽다. 향수, 그리움 같은 게 느껴진다는 언니에게 뒷부분은 연습해서 다음에 들려주기로 했다.

워케이션센터에서 나타난 미래의 그림자

질그랭이 거점센터 워케이션센터. 사진제공 : 김진희

마음스테이가 있는 제주 세화에는 마을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질그랭이 거점센터’(질그랭이는 지긋이라는 제주말)에 워케이션센터가 있다. 하루 이용료 1만원에 멋진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베케이션 기분으로 워크를 할 수 있다. 나는 생태 철학 개념어로 ‘미래진행형’ 정리하기를 하며 워크를 했다. 미래가 드리운 그림자를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책상 넓고 높이도 적당하고 의자도 편해서 좋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쪽 바다보고 저쪽 바다보고 다른 생각에 빠졌다가 책상 위 종이에 끄적끄적하다가 노트북에 ‘나는 다음에 언젠가 언니한테 피아노를 쳐주고 있을 것이다.’라며 타닥타닥 자판을 치는데 갑자기 그 그림자가 나타났다.

‘오늘 피아노를 쳤고 이제 연습을 하겠지. 이거 미래진행형이잖아.’ 현재의 의도가 미래에 작용한다는 점이다.

한 문장에 담겨 있는 것들

언니에게 피아노를 쳐주고 싶다는 마음, 다음에 또 들려주기로 한 약속, 그동안의 만남으로 생긴 우정, 신뢰감, 피아노가 있는 공간, 피아노라는 사물, 피아노 선율이라는 신적인 것!, 이런 것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 무엇보다도 순간을 공유한 사람이 한 문장에 겹겹이 모여 있다. 하이데거의 순간이다.

사물은 사물적이 되어 땅, 하늘, 신적인 것, 죽을 자들(유한한 인간들)의 넷을 결속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통일된 네 겹의 결(사방 四方)이 단순한 한 겹으로 어우러져 머물게 한다.

Thinging, the thing stays the united four, earth and sky, divinities and mortals, in the simple onefold of their self-unified fourfold. (p.202-203, ‘’THE THING’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lations and Intoroduction By Albert Hofstadter)

시타북빠의 피아노는 단순히 놓여 있는 사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것들이 모여 다른 세계를 펼쳐준다. 하이데거가 알려준 사방(四方)과 내가 경험한 것을 같이 놓고 보니 잠깐의 머무름 속에 사방(四方)이 뜨개질하듯 얽혀 하나의 무늬를 보여주는 것 같다.

피아노 선율이 만드는 사방의 어우러짐 속에 잠시 머물면 어떨까요.

(Jimmy Mannah 라는 분의 연주 영상을 링크합니다)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선다

천정에 타이포그라피는 ‘사랑을 배운다’
김수영의 시 ‘현대식 교량’에서. 사진제공 : 김진희

생태적 사유를 이해하고 싶어 마을에서 철학하기 에세이를 쓰며 읽고 있는 모튼의 책은 휙휙 읽어 나갈 수가 없다. 문장 속에 머물며 생각하고 삶을 돌아보게 한다. 서양 철학의 클래식인 스토아 철학에서는 머무름을 관조라고 했다. 지혜를 사랑한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나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찬찬히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사물은 직접적으로 알 수도 없고 온전히 알 수도 없다 그것에 다소간 친밀하게 조현attunement할 수 있을 뿐이다. 조현은 기본적으로 어떤 텅 비어 있는 연장延長 실체에 “단지” 미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나타남을 어떤 사물의 현실성에서 단호히 떼어 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조현은 다른 존재와의 살아 있는 역동적 관계이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티모시 모튼 『생태적 삶』 174-175쪽)

자연은 자신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스스로 알고서, 위대한 장관의 관객이 될 우리를 낳았습니다. 만일 그토록 크고 빛나며 섬세하게 생겨난, 그렇게 찬란하며 전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에 오로지 적막함이 드리운다면 자연의 결실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자연이 단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관찰되기를 원했다는 것을 아시려거든,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위치를 주었는가를 보십시오. 자연은 우리를 자신의 중간에 놓고 모든 것에 대한 조망권을 주었습니다. 단지 사람을 일으켜 세웠을 뿐만 아니라 관조하는 능력을 갖추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별들의 생성과 소멸을 좇을 수 있고, 모든 것을 쳐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네카의 대화: 인생에 관하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까치글방, 김남우, 이선주, 임성진 역, 2016, p.254-255, 제8권 ‘은둔에 관하여’)

조약돌 여섯

“먼 미래에서 만나자. 기다리고 있을게”

헤어지며 언니가 말해주었다. 따뜻한 인사. 먼 미래는 시간이기도 하고 사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물을 조약돌로 놓았다. 사물에 깃들어 모여드는 다정함, 마음씀, 사랑을 배운다.

*다시 읽을 날의 기록:

우리가 드리운 그림자는 너를 닮은 꽃 한 송이

김진희

만화리 비조마을에 살며 만가지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마을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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