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독수리 사는 숲

흔히 하늘의 제왕이라 불리는 최상위포식자를 보러 간 날은 혹독한 추위가 불던 12월 말이었다. 그는 종일 몇 번 자리를 옮길 뿐 가만 평야를 바라보기만 했다. 꿈쩍 않는 검독수리, 제왕의 자질은 인내에 있을까. 1월을 맞으며 의연하고 고고(孤高)한 모습 검독수리를 떠올린다.

겨울마다 검독수리가 찾는다는 곳은 서산의 여느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소나무 숲이었다. 쌍안경으로 숲 상단을 올려다보며 소나무 가지에 검은 점으로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흔히 하늘의 제왕이라 불리는 멸종위기 1급의 맹금류, 매의 무기가 속력과 부리의 치상돌기라면 검독수리의 무기는 날카로운 발톱에 있다. (경우에 따라) 늑대도 잡는다는 최상위포식자를 보러 간 날은 혹독한 추위가 불던 12월 말이었다.

그는 암컷 아성조(조류의 청소년기)로 종일 몇 번 자리를 옮길 뿐 가만 평야를 바라보기만 했다. 까마귀들이 덤벼들지 않았다면 검독수리는 더 잠자코 있었을 거다. 독수리들이 선회하고, 황조롱이가 화려한 비행술로써 들쥐를 사냥하는 동안 그는 계속 고개만 돌려가며 있었다. 뛰어난 시각으로도 마땅한 먹잇감을 찾지 못했는지 날이 저물 때까지 사냥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진 제공 : 한승욱
사진 제공 : 한승욱

영어로는 골든 이글(Golden Eagle), 중국에서는 금조(金雕)라 부른다. 금빛 갈기에서 기인한 이름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검독수리라 한다. 독수리는 대머리-독(禿) 자를 쓰고 동물 사체를 주 먹이로 하지만 검독수리는 대머리도 아니고 사냥 활동을 하는데 왜 ‘독’자가 붙었는지 의문이다. (홀로-독(獨) 자나 다른 한자를 쓰는 걸까, 한자어가 아닌 걸까?) ‘검수리’, 혹은 ‘금수리’라 한다면 보다 명징한 이름이 되지 않을까?1

불경에 등장한다는 상상의 새 금시조(金翅鳥)2를 떠올리기도 하며 그의 기품에 추위를 잊고 바라보았다. 꿈쩍 않는 검독수리, 제왕의 자질은 인내에 있을까. 당장의 배고픔에 허덕이고 말 한마디에 움찔하는 나로서는 동경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음 해 겨울 같은 곳을 찾아갔을 때 소나무 숲은 포크레인이 지나다니며 깎여나가고 있었다. 조마조마하며 찾은 그는 어엿한 성조(어른 새)가 되어있었다. 작은 숲 하나도 두지 못하는구나, 탄식을 했지만 검독수리는 더욱 진중한 태도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아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날 그는 몇 번 날아올랐다. 영역에 침범한 독수리들을 내쫓기도 하고, 한 번은 사냥을 위해 움직였다. 순간 날아올라 논밭으로 내리꽂더니 두렁 위로 깃털들이 흩날렸다. 식사 자리로 돌아온 그의 발톱엔 찢긴 작은 새가 있었다. 큰 덩치에 새 한 마리로 끼니가 될까, 시신을 해체하고 뜯어 먹는 그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숲이 훼손되고 별 먹을 게 없는 것을 그도 알 텐데 올해도 몽골에서 날아왔을까. 12월 넘어 1월을 맞으며 의연하고 고고(孤高)한 모습 검독수리를 떠올린다. 바다 절벽엔 매가, 한강엔 참수리가, 서산 그곳엔 검독수리가 있다.


  1. 독수리와 검독수리는 같은 수리과에 속하지만 영문에서는 Vulture(독수리)와 Eagle(수리)로 구분한다. (매는 Falcon을 쓴다) 독수리는 주로 동물의 사체를 먹어 자연의 청소부라 불린다. 적극적 사냥 활동을 하는 검독수리와 생태가 다르다.

  2. 매와 비슷한 머리에 여의주가 박혀 있으며 금빛 날개가 있는 몸은 사람을 닮고 불을 뿜는 입으로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한승욱

회화를 중심으로 글쓰기, 사진, 영상, 도자, 등을 다루며 창작하고 있습니다. 예술강사 활동을 했고 동료 예술가들과 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환경 활동을 하고, 탐조를 즐깁니다. 녹색서울시민위원회 간사로 일하며 창작과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댓글 4

  1. 대머리 독자를 쓰지만 이름은 확실히 정정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미지가 잘못 퍼진 사례 이지요. 금수리가 제일 잘어울리는 이름 같군요.

  2. 동물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본받을만한 삶의 태도를 제시해 주는 것 같습니다^^ 연초를 포근하게 해주는 좋은 글 즐겁게 읽고 갑니다

  3. 가꿔지지 않은 야생의 얼굴은 늘 멈칫하게 만드는 거 같아요. 더 많은 시간을 우리 인류가 공생으로 해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추운 날에 귀한 사진과 시선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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