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제안하는 외로움 대처 방식 -기후 위기 속에서 『논어』 「학이」편 제1장 읽기

최고의 스승이라고 추앙되기도 하고 최초의 스승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공자는 바로 그러한 면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식을 후세에 전하였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공자는 알고 보면 은하계 역사상 가장 대차게 당대 사회의 주된 흐름에 거역한 사람임을 모두 알아야 할 듯하다. 오늘 사회의 주된 흐름에 거역하고 있거나, 내일부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공자의 어록이 도움을 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공자의 어록인 『논어』는 전 2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학이」편은 제1장이다. 이러한 「학이」편은 다시 16개 장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첫 번째 장인 동시에 『논어』 전체의 시작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呼. 有朋自遠方來, 不亦樂呼.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呼.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이 부분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여기에서의 공자 말씀을 세 문장으로 나눌 때, 첫 번째 문장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와 “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는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쓰이는 말이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 때로 익힌다는 것은 실천을 거듭한다는 것

성백효 저, 『현토완역 대학·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성백효 저, 『현토완역 대학·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많은 사람이 ‘배우고 때로 익힘’을 보고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떠올리는 것 같다. 문자 그대로 읽자면 이것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는다는 말이다. 공부만 하고 싶지만 먹고 살기 위해 일부터 해야 했던 청소년들이 넘쳐났던 시절에는, 그 본래의 뜻과 무관하게, 이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라면, 이 말은 직업적 활동과 자기계발의 병행하라는, 준엄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사회의 압박으로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듯하다.

주희가 편찬한 『논어』 주석서인 『논어장구집주』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습(習)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우기를 그치지 않음을 마치 새 새끼가 자주 나는 것 같이 행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주희는 정자의 말을 인용한다 “습(習)은 거듭함[중습(重習)]이니, 때로 다시 생각하고 연역(演繹)해서 가슴속에 무젖게 하면 기뻐지는 것이다.” 주희와 정자는 지식이란 것이 그 지식이 가리키는 바람직한 행위의 실천을 거듭함을 통하여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이 중시하였던 지식들 가운데 그들이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은 인간관계를 원만히 하는 데 필요한 태도 혹은 마음가짐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 예로,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인간관계인 가족 관계 속에서, 자식이 어버이를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 혹은 마음가짐[효(孝)], 연소자가 연장자를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 혹은 마음가짐[제(弟)], 어버이가 자식에게 가져야 할 태도 혹은 마음가짐[자(慈)] 등을 들 수 있겠다. 주희나 정자 같은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이러한 태도 혹은 마음가짐을 희미하게라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신념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 즉 각자가 자기 마음속에 그런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 가능성을 키워나가는 것, 즉 깨달음과 수양에 관한 지식이, 앞서 말한 학(學)과 습(習)의 대상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이라고, 주희와 정자가 생각하였다고 가정한다면, 지식이란 것이 그 지식이 가리키는 바람직한 행위의 실천을 거듭함을 통하여 비로소 완성된다는 주희와 정자가 말하는 주장의 설득력이 커질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공자와 맹자의 단계에서 이른바 ‘성선설’이라고 후대에 이름 붙여진 인간본성론이 싹텄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효(孝), 제(弟), 자(慈) 등의 태도 혹은 마음가짐을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으리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 인간본성론과 ‘배우고 때로 익힘’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니, ‘학이시습지’에서의 습(習)을 거듭함[중습(重習)]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공자의 생각에 근접한 해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공자도 그렇고 공자 사상의 계승자를 자처한 주희와 정자도 그렇고, 성선설을 굳게 믿음과 동시에, 바람직한 행위의 실천을 거듭함을 통하여 그 바람직한 행위를 설명한 지식이 체화되는 과정이 없이는 성선설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믿음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람직한 행위의 실천을 거듭함을 중시한 공자, 정자, 주희의 말들은, 이른바 ‘동양철학’은 마음을 중시한다는 속설이 그야말로 속설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는 추측의 근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른바 ‘동양철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은 대개, 마음의 일인 깨달음뿐만 아니라, 호수 위의 오리가 수면 아래에서 물갈퀴 달린 발을 계속 움직이듯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을 촉구하는데, 『논어』 「학이」편 제1장도, 위의 해설들에 따르면, 수양의 일환으로서 바람직한 행위의 실천을 거듭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바람직한 행위의 실천을 거듭함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후 위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많다. 기후 환경의 미세한 악화도 감지하면서 그때마다 개탄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후 환경 위기를 저지하거나 지연시키기 위하여 작은 실천이나마 꾸준히 반복하는 행위가 위기를 개탄하는 목소리보다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까? ‘습’에 대한 주희와 정자의 설명을 보고, 『논어』로 돌아가 ‘학이시습지’의 뜻을 나름대로 풀이해 보면서, 위기를 인식하는 것이나, 위기에 대하여 개탄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위기를 저지하거나 지연시키는 작은 실천을 거듭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재확인하였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 뜻을 같이 함 즉 동지에서 우정과 환대로 넓혀가야 할 관계의 지평

“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라는 문장에 대한 『논어장구집주』의 주석은 붕(朋)을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어지는 주석은 다음과 같다. “먼 지방으로부터 온다면 가까이 있는 자들이 〈찾아옴을〉 알 수 있다.”

위기에 대하여 개탄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위기를 저지하거나 지연시키는 작은 실천을 거듭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사진출처 : TheLight
위기에 대하여 개탄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위기를 저지하거나 지연시키는 작은 실천을 거듭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사진출처 : TheLight

이 문장과 관련하여 정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고 한다. “선(善)을 남에게 미쳐서 믿고 따르는 자가 많다. 그러므로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열(說/悅)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요, 낙(樂)이란 발산(發散)함을 주장하니 외면에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기뻐함[說/悅]과는 달리 즐김[樂]은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나를 믿고 따르는 자가 많은 듯이 만방에 보여줄 수 있을 때, 즐김을 더 활발히 겉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으로, 정자의 해설을 풀어 볼 수 있겠다.

“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멀리서 온다면 주변 사람들도 뒤늦게나마 그것을 알아볼 것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어느 집에 멀리서 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으면, 이웃들은 그 집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집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말인가? “가까이 있는 자들이 〈찾아옴을〉 알 수 있다”라는 부분 때문에 전자보다는 후자와 같이 해석해야 할 분위기가 강하여지는 듯하다. 이에 따라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를 좀 과감하게 해설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설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하려면, 멀리서 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 집을 찾도록 하라.’ 그러면 여기에 “불역낙호(不亦樂乎)” 즉 “즐겁지 않겠는가”를 이어 붙인 문장 전체는 어떻게 새겨 읽어야 할까? 바로 앞에 인용하고 풀어 본 정자의 해설을 감안한다면, “그러고 나서 즐거움을 겉으로 드러내면 이웃들은 더더욱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믿게 될 것이다” 정도의 해설도 가능할 듯싶다.

(원문) :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呼.)”

(직역) : “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의역) :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하려면, 멀리서 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 집을 찾도록 하라. 그러고 나서 즐거움을 겉으로 드러내면 이웃들은 더더욱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믿게 될 것이다.”

(원문)만을 보면, (직역)으로 충분하고, (의역)은 지나쳤다고 할 수 있을 듯싶다. 그러나, 해당 (원문)에 관한 『논어장구집주』의 주해 특히 정자의 해설을 보면, 거기에는 (의역)처럼 뜻을 풀어 볼 수 있는 단서들이 있었다. 그리고, (의역)처럼 풀이하다 보면, 동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공자에게는 분명 동지 즉 확고하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동지가 많았다고 정자가 판단하였다면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에 대한 정자의 해설이 위에서 본 것보다는 담백하였을 것 같다. 정자의 해설은 짧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필요하였고, 그의 해설을 따라가면서 (원문)을 보니 (의역)에 도달하게 되었다.

공자는 구세(救世) 즉 난세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포부를 이루기 위하여 천하(天下)를 철환(轍環) 즉 수레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도 많이 생겼다. 몇몇 지배자들이 그를 정치고문이나 고위관리로 기용하려 하였으나, 좀처럼 그는 기용되지 못하였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에는 이러한 전후 사정에 따른 공자의 회한도 어느 정도 담겨 있는 듯하지만, 유세의 과정이 공자의 인간관계론에 미친 영향도 반영되어있는 것으로, 정자는 보았던 것 같다. 붕(朋)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다. 공자의 시대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정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분명 그러하였다. 그런데 정자의 짧은 해설이 풍기는 분위기는 뜻의 같음을 그리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때의 분위기는 오늘날 사람들이 벗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풍기는 정도의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어쩌면 공자는, 뜻을 같이하는데 이르지 못하더라도, 우정과 환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들을 넓게 아우르는 인간관계를 권하며, 그러한 관계가 이어질 기미가 보이면 즐기는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어서 더 많은 벗을 만들라고 권한 것인지도 모른다. 공자가 말한 것은 확고히 뜻을 같이하는 혈맹 수준의 결속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천하를 유세하면서 꽤 많은 환대를 받았음에도 어디에서도 기용되기 쉽지 않았던 공자의 체험은 혈맹 수준의 결속을 믿기 어렵게 하지 않았을까?

임박한 위기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후 환경 위기에 대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인간 관계는, 혈맹 수준의 결속이 아니라, 오히려 우정과 환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들을 넓게 아우르는 인간관계여야 하는 것 아닐까? 임박한 기후 환경 위기는 분명 심각하다. 그러나, 심각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심각성에서 느끼는 온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추구하는 대안은 더더욱 다른 것을 목격하는 순간은 비일비재하다. 출생률의 저하에서 볼 수 있듯, 사람들이 모두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는 듯하지만, 위기의 구조와 정체에 대한 인식이나 대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차이를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위기 인식 자체의 공통성을 무게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 상황에 따른 선택이 필요하겠지만, 난세에 구세를 위하여 천하를 유세한 공자는, 일치하는 뜻을 중심으로 하는 굳은 결속도 중요하지만, 우정과 환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들을 넓게 아우르는 인간관계도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 즐김, 주어진 것을 받아들임, 견딤

『논어』 「학이」편 제1장을 채우고 있는 공자의 말 가운데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앞의 두 문장이 사람들의 입에 매우 자주 오르내리는 데 비하여, 이 문장은 거의 인용되지 않는 것 같다.

주희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 덕(德)이 이루어지는 소이(所以)는 또한 학문이 올바라야 하고, 익히기를 익숙히 하고, 기뻐하기를 깊이 하여 그치지 않음에 말미암을 뿐이다.” 여기에서 특히 “기뻐하기를 깊이 하여 그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할 듯하다. 덕이 이루어지려면 기쁨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희의 해설에 따르면 덕을 이룬 자가 군자이니, 군자의 내면에서는 기쁨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문장을 해설해 보면, 알아주지 않음을 내면의 기쁨이 이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정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낙(樂)은 열(說/悅)을 말미암은 뒤에야 얻어지는 것이니, 낙(樂)이 아니라면 군자(君子)라고 말할 수 없다.” 내면이 기쁨[說/悅]으로 가득 찬 이후에 즐김[樂]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이러한 즐김이 불가능한 사람은 군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즐김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을 현상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무시를 견디는 것이다. 이는 낙(樂)을 ‘즐김’으로 새기는 것에 더하여 ‘주어진 것을 받아들임’ 나아가 ‘견딤’으로 새겨보면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사회의 주된 흐름에서 벗어나거나 그 흐름에 맞서는 사람은 어떤 정서를 가지게 될까? 그에게는 아마도 분노하는 순간이 이어질 것이다. 사회의 주된 흐름이 명백히 잘못되었음에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을 가능성이 크며, 알면서도 외면하는 사람들을 적대시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내면에서 그런 심정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생생하게 느꼈을 법한 사람이 공자이다. 공자는 천하를 유세하면서 따르는 자들이 생기는 보람도 체험하였지만, 좀처럼 기용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연금되거나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를 양성하였다. 공자라는 이름을 가리고 보여주면 많은 사람이 이 인생을 실패한 것으로 평가할 것이다. 또 많은 사람이 그런 평가를 거부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갑자기, 기후 환경 위기를 앞장서 인지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대안을 실천하는 사람들과 공자 사이에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들도 공자가 유세를 통하여 겪은 일들과 유사한 일들을 겪는다고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닐 듯하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의 처지는 공자보다도 더 외로운 것일 듯하다. 『논어』 「학이」편 제1장 특히 그 세 번째 문장은 자신이 처하였던 외로움에 대처하는 공자만의 방식을 집약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사회의 주된 흐름에서 벗어나거나 그 흐름에 맞서는 사람 예컨대 기후 환경 위기에 관하여 발언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공자만의 방식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은 아닐 듯싶다.


[TEXT :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論語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1,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0.]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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