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조 선장, 바다

길고양이 ‘바다’에게 배우는 사랑과 인생 이야기.

2020. 08. 01.

깡마른 작은 고양이 나비가 내게 온 날은 햇살도 좋고 너무 덥지도 않은 여름날이었다. 일기예보는 비가 내린다고 했지만, 선선하니 좋았다. 공간을 낯설어할 나비가 어디로 숨을지 몰라 평소 건드리지 않았던 침대 밑, 책장 밑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잘 안 쓰던 그릇들을 꺼내 밥그릇 물그릇으로 준비해두었고, 당일배송으로 급하게 고양이 화장실도 구비해두었다.

나비는 한두 살이 된 길고양이였다. 그간 캣맘이 주는 밥을 얻어먹고 살다가 나와 만나기 삼 주 전쯤, 한 커플을 만나 집에 얹혀살고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월셋방에 살고 있던 커플은 반려동물과 함께할 형편이 아니었다. 길에 내보내야 했지만, 이미 아늑한 집 맛을 알아버린 나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커플은 나비의 평생 반려인을 찾아주기로 했고, 페이스북에 공고를 냈다.

공고를 본 뒤, 나비를 데려올까 말까… 일주일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데려올 순 없었다. 누군가 나비를 어서 데려가 이 어려운 고민을 덜어주길 바라며 매일 공고를 확인했지만,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깽이들이 똥꼬발랄해질 시기인 여름이었다. 안 그래도 입양 공고가 많이 올라오는 시기인데, 성묘가 입양을 간다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배트맨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 흰색 바탕에 검은 꼬리, 동글동글한 무늬가 등에 있는 바다. by 이연우
배트맨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 흰색 바탕에 검은 꼬리, 동글동글한 무늬가 등에 있는 바다. by 이연우

“임보라도 해보자!”

당장 갈 곳이 필요한 것 같으니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임시 보호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메시지를 보냈고, 바로 다음 날 나비를 보러 갔다.

나비는 깡마른 소녀처럼 작은 체구의 암컷 고양이었다. 배트맨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 흰색 바탕에 검은 꼬리, 동글동글한 무늬가 등에 있는 *젖소였다. 수줍은 분홍색인 코와 발바닥은 그녀의 매력 포인트였다. 처음 보는 날 낯선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신기하게도 경계를 하진 않았다. 만난 지 5분 만에 내 손을 핥고, 옆에 누워 발라당 하는 나비를 보곤 그간 고민했던 마음은 바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비는 *한 모금의 바다(a.k.a 바다)가 되어 내게 왔다.

*젖소 : 코리안 숏헤어 중 흰색 바탕에 검은색 반점들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별칭.
*한 모금의 바다 : 나비를 한두 달 정도 임시 보호하다 결국 함께 살게 되면서 지어준 이름.

논비건(Non-Vegan)인 너와 어떻게 살지?

바다는 특별히 가리는 것이 없이 뭐든 잘 먹는다. 예민할 수 있다던 화장실의 두부모래도 첫날부터 아주 잘 적응했다. 우리 집에 오자마자 침대 밑으로 쏙 들어가긴 했지만 금방 호기심에 이끌려 집안 여기저기를 구경했고, 첫날부터 내 옆에서 잠이 들었다. 잘 지내주는 바다가 고마웠고 예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고민이 등장했다.

나는 8년째 채식을 하는 비건이다. 평소 육류와 해산물, 계란, 유제품을 먹지도 집에 들이지도 않는다. 친구들이 놀러 오더라도 내 집에서만큼은 고기를 자제해 달라 부탁하는 정도인데, 육식동물인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어릴 때 고양이를 키워도 봤고, 한 달 정도 새끼 냥이를 임시 보호한 적도 있지만, 그때는 비건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고양이 먹거리에 대해 크게 고민한 기억도 없다. 찾아보니 고양이는 잡식인 강아지와는 달리 완전한 육식동물이어서 채식 사료를 먹일 수 없는 것 같았다. 고양이용 채식 사료가 있긴 하지만 토한다는 후기가 많았고, 아무래도 육식동물에게 채식을 먹이는 건 내 욕심인 것 같았다. 허나 공장식 축산으로 만들어지는 육류, 어류는 먹지도 사지도 않겠다는 내 신념에 어긋나는데… 이를 어째! 내가 직접 길러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상 기른다고 해도, 내가 사랑을 주고 키운 아이들을 어찌 바다에게 먹일 수 있을까! 이미 사료와 간식을 사서 먹이고 있긴 했지만, 한두 달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결론은, 이미 바다는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고, 고기를 꼭 먹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선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고 내렸다. 대신 바다도, 바다의 먹이가 될 그 아이도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 몫까지 더욱 열심히 비건 생활을 실천해야지…!

너와 함께 살려면 잃어야 하는 것들

엄마는 바다를 데려오는 걸 극구 말리셨다. 고양이를 데려오는 순간 내 삶이 그 아이에게 묶여버린다는 것이다. 어딜 자유롭게 갈 수도 없고, 그 아이가 아프지 않도록 평생 보살펴야 하며, 행복할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그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평생 외동으로 산 데다가 어린 시절부터 유학 생활로 혼자 보낸 시간이 많았던 나에게, 엄마의 말들은 충분히 공감되지 못했다. 다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저 청소를 더 깨끗이 하고, 부지런해져야 한다고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바다와 함께해서 겪는 희생보다 행복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게 좋다. by 이연우
바다와 함께해서 겪는 희생보다 행복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게 좋다. by 이연우

바다와 약 9개월을 함께 한 지금에 와서 다시 얘기하자면, 엄마의 말이 맞았다. 온전히 나에게 의지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버거운 일이다. 밖에 있으면 날 목 빠지게 기다릴 바다가 생각나 집에 꼬박꼬박 들어와야 하고, 여행도 마음껏 할 수 없다. 단순히 친구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영역 동물인데다 낯을 많이 가리는 고양이의 특성상,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함께 다닐 수도 없을뿐더러 낯선 곳에 맡기는 건 대대적인 일이다. 돈도 많이 나간다. 같이 살면 살수록 바다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이 생겼고, 결국 내 집에는 캣타워와 수많은 장난감, 스크래쳐들이 놓이게 되었다. 아프지는 않을까 매일 눈곱을 떼 주고, 이도 닦여야 한다. 좋은 사료와 간식을 먹이려면 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코로나에 걸려서도 안 된다. 이 모든 걸 엄마는 미리 경고했고, 그녀의 말이 맞았다는 걸 지금은 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에겐, 바다와 함께해서 겪는 희생보다 행복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게 좋다.

사랑은 어찌 보면 ‘바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도 처음에는 나에게 밥을 바랬고, 지금은 늘 함께하길 바란다. 나도 바다가 건강하길 바라고, 내 옆에 평생 있어 주길 바란다. ‘바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바라는 만큼 상대에게 해줘야 하는 일도 많고, 누군가의 바람에 부합하지 못할까 봐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장과 단이 있듯이, ‘바람’과 ‘사랑’도 그러하다. 오롯이 나의 편인 우리 엄마는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가져다주는 단점이 날 힘들게 할까 봐 걱정하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장점을 더 크게 볼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아마, 엄마가 내게 충분히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바다를 통해 사랑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고, 날 사랑으로 키워준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이 더 커졌으며, 엄마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일상

요즘 내 일상은 침대 왼쪽, 내 겨드랑이 사이에서 기지개를 펴는 바다에게 인사하며 시작된다. 작은 얼굴을 부여잡고 콧등 뽀뽀를 연신 날린 뒤에는 밥과 물을 챙겨준다. 배를 조금 채우면 바다는 다시 낮잠을 잔다. 햇살이 잘 드는 오후 서너 시쯤엔 창문에서 바깥 구경을 한다. 어느 날은 침실, 어느 날은 작업 방, 어느 날은 베란다 창틀에 오르는데, 가끔 다른 고양이를 볼 수 있는 베란다를 특히 좋아한다.

그냥 지나쳤던 일상의 소소한 모습들을 바다 덕분에 새롭게 보게 된다. by 이연우
그냥 지나쳤던 일상의 소소한 모습들을 바다 덕분에 새롭게 보게 된다. by 이연우

매일 보는 풍경이 뭐가 그리 재밌어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볼까? 나도 바다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그냥 늘 보던 모습이다. 그래도 계속 봐본다. 오, 기다리니 나에게도 하나둘 씩 보이는 것 같다. 바람이 보이고, 저 멀리 지나가는 고양이도 보이고… 풀내음도 보인다. 고인 웅덩이 위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도 본다. 서서히 흐르는 구름을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이런 걸 보고 있었던 거니? 지나치기만 했던 일상의 소소한 모습들을 바다 덕분에 채운다.

이 외에도 바다로 인해 바뀐 것들은 많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청소.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탓에 별로 깔끔하지 않았던 내가 날마다 청소를 한다. 냉장고 위, 창틀, 변기 커버, 침대 밑, 현관까지…. 나 혼자 살았으면 이사 온 순간부터 이사 나갈 때까지 터치하지 않았을 공간들이다.

내 인생의 보조 선장

얼마 전 넷플릭스에 있는 일본 드라마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을 봤다. 출판사에서 일하던 주인공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식당을 처분하려다가 갑작스레 퇴사하게 되면서 그 자리에 샌드위치와 수프 가게를 차리게 되는 이야기다. 건조했던 그녀의 삶은 맛있는 음식과 북적이는 사람들 그리고 고양이 식구가 더해지면서 따듯함으로 채워진다. 이 드라마를 보며, 바다가 내게 온 시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서른 즈음. 정착하고 싶어 하는 나에게 바다가 왔다. 여기저기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경험을 우선시하던 나였는데, 점점 자리를 잡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던 차였다. 이젠 세상을 구경하는 것보다, 나만의 공간을 잘 꾸려 그 안에서 무언가 펼치고 싶었다. 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바다는 아직 많은 것이 어설픈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혼자 있었다면 침대 위에 퍼져 있을 날 움직이게 해주고, 적당한 책임감으로 내 삶을 잘 항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 인생의 보조 선장이랄까. 그런 바다가 옆에 있어 주어 감사하다. 나도 바다의 인생이 좋은 기억들로 가득 차도록,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다. 바다야 사랑해!

이연우

생물과 무생물을 모두 좋아한다. 직업은 시각예술작가이자 출판/콘텐츠/문화기획자, 한마디로 프리랜서다. 독립출판물 가지가지도감과 장롱다방:대화집, 방산어사전 등을 엮었으며, 〈Portrait in Plastic〉과 〈정서적고향〉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동물권과 환경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고 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