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그리의 『야만적 별종』 세미나(10월 모임 후기)

네그리 『야만적 별종』에 관한 세미나가 2021년 10월 한달간 매주 화요일마다 오후1시 연구공간L 주최로 온/오프라인을 통해 진행되었다. 11월 모임에서도 『야만적 별종』를 이어서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참여 문의: 010.2716.0746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세미나

■커리큘럼 : 네그리, 『야만적 별종』, 윤수종 역, 새길, 1994.

■일시 : 2021년 10월 5일 (화요일) 오후 1시 30분-4시 30분

■내용 :

  • 3장 첫 번째 근거, 2절 ‘무한자의 조직화’
  • “헤겔이 따랐던 역사철학자들뿐만 아니라 헤겔이 스피노자적 절대자 안에서 극복할 수 없는 비규정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은 옳은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런 해석의 전개과정에서 스피노자에서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읽는 열쇠를 인지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런 해석가들은 절대적 관념론의 용어로 그 관계를 위로부터 규정했던 변증법적 만능열쇠를 사용해 암묵적으로 스피노자를 셸링에 밀착시키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159)
  • 『에티카』에서 속성은 존재를 침범한다. “속성은 실체와 동일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제의 요소들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속성이 속성 그 자체가 표상하는 동일성이 지닌 침범적 역동주의의 실체화로써가 아니라면, 실체와 동일시를 추구하는 경향일 수 없다는 것을 덧붙여야만 한다. … 존재 안에 속성이 뿌리내리는 것은 속성의 기능을 동일성의 침범이라는 이유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속성은 실체와 같은 사물이지만, 지성과 관련해서 하나의 차이가 진술된다. 자생성과 조직화의 관계에서 현대철학자들이 의식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인지할 수 없지만 근본적 차이가 바로 속성, 즉 존재의 단성성 안에서 논리적 발산의 어떤 계기, 물질적 지평을 가치의 지평으로 변형시키기에 충분한 하나의 계기이다.”(159-161)
  • 속성 문제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과 객관주의적 해석의 문제
  • 속성은 두 가지 운동을 한다. 한편으로 발산적, 원심력적, 생산적, 세계구성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운동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수렴적, 구심력적, 반응적, 세계보존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운동도 있다. 주관주의는 전자를 이해하지 못하며, 객관주의는 후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전자로 인해 세계는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자기생산과 구성을 현실 안에서 해낸다. 후자로 인해 세계는 해체되지 않으면서 자기를 보존하고, 체계의 안정성을 꾀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1-2부가 후자에 초점을 두었다면, 그 이후부터는 이제 전자의 운동이 더욱 중요성을 띠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시 : 2021년 10월 12일 (화요일) 오후 1시 30분-4시 30분

■내용 :

  • 3장 첫 번째 근거, 3절 세계의 역설
  • 『에티카』 1부 정의5(“나는 양태를 실체의 변용으로, 또는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의해 생각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를 참고했을 때, 어떻게 이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의해 생각되는 것이 무한한 생산적 흐름 안에서 조직되는가?가 문제된다.
  • 『에티카』 2부는 위기의 조건을 선언하는데, 이 조건들은 더 높은 심급에서 문제를 재정식화하고 도약하게 한다. 그러한 조건은 세계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주목하는 2부의 첫 번째 정리들에서 우선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이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절이며, 윤리학을 위한 근본적인 서론들이자 자연학의 제시이다.
  • 그렇다면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실재성과 완전화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에티카』 2부 정의6) 원리적으로 세계의 실존은 자신의 존재론적 유효성을 위해 어떤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존이 지닌 이러한 존재론적 유효성은 그것이 특이성의 지평이 지닌 광대함과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 유효성은 자신 안에, 자신의 신체적 특이성 안에 실존한다. 신체는 본질적으로 실존하며, 그것은 각 사물을 정의하는 관계의 특이성 안에 있다. 그리고 신체는 어떤 목표를 향한 연합적 활동이 동시 발형하는 단일체 속에 집단적으로 실존한다. 따라서 세계는 결국 특이성들의 다변적이고 복잡한 조합이다.
  • 그렇다면 특이성의 세계는 실제로 어떤 매개로 필요로 하지 않는가? 양태의 실존적인 현존은 그 자체 충분한가? 그러면 우리는 결국 이 세계를 산출한 수단들처럼 보이는 논리-형이상학적 수단화를 순수하고 단순한 기계화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논의가 양태에 초점을 맞추고 분석이 혁명적 금욕주의가 특이성이나 운동을 지닌, 특이성이 표현하는 투쟁을 지닌 사랑을 지니고 특이성으로 돌아갈 때, 자생성의 매개라는 수수께끼는 그 자체로 문제삼아져야 한다.

■일시 : 2021년 10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30분-4시 30분

■내용 :

  • 3장 「첫번째 근거」, 3절 세계의 역설
  • 스피노자적 유토피아의 전개는 형이상학적 생산의 기제를 수평면으로 환원하는 경향을 지닌다.
  • 특이성의 영역 위에서 과정의 연장적 무한성, 바로 비한정성은 능동적이고 강력한 무한성과 모순적이지 않다. 따라서 인간 실체성을 특이한 연계들로 용해하는 것은 인간적 실체성의 특이한 실존과 모순되지 않는다. 특이성은 신적 실체 및 원리로서의 무한자와 모순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이 신성하면 할수록, 특이하며 분산적이고 확산적이다. 오직 이 점에서만 그것을 배타적으로 신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유토피아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부정을 긍정하는 지점에 있을 때처럼 그렇게 강력하게 자신을 재구성하지 않는다.
  • 『에티카』 2부 정리13은 스피노자 체계의 첫 단계에서 세계의 역설적인 연역이 지닌 극단적 한계를 표상한다. 정리 13과 함께 형이상학에서 물리학으로의 이행은 철학적 지평의 전도로 각인된다. 양태 관념이 구성적이고 발생적이며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 안에서 고려되고 세계의 실체적 질서에 의해 보장받는 한, 양태의 유물론은 근거이다. 신체는 결국 근거인 것이다. 이제 실체에 대한 인식은 총체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물리적이다.
  • 정리13과 보조정리를 통해 유토피아라는 직물은 완벽하게 전개된다. 대안의 표현이 발본적이라면 극단적 한계까지 전개된다. 분석이 출발했던 그 발산적 흐름은 공시적이고 구조적인 구성력을 지니고 전개된다. 속성의 지속성과 조직화가 지닌 기능은 양태의 역설이 심화되는 것에 직면하여 끝나게 된다. 대안적 극단들, 신의 자생적 총체성과 인과적 운동의 불명확한 복수성이 함께 있으며, 그들 대립의 절대성 만이 자신들의 상보성을 보장한다.
  • “세계의 역설은 자유의 역설이 되도록 성숙되어야 한다.”(178)

■일시 : 2021년 10월 26일 (화요일) 오후 1시 30분-4시 30분

■내용 :

  • 4장 「이데올로기와 그 위기」, 1절 이데올로기로서의 스피노자주의
  • 스피노자는 자유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사상보다는 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연상되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피노자의 전통을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구성요소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만약 스피노자 사상의 이데올로기적 변형 안에 현실적인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이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보다 더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훨씬 더 치밀하다는 것이 사실이므로 신중할 필요가 있다.
  • 스피노자와 그 서클의 혁명적 유토피아는 총체성과 복수성의 일치라는 토대 위에서 스스로를 구축한다. 유토피아를 구축하는 결정적인 선택은 관념적 동질성에서, 근원원리에서 논리적 상응관계를 본다. 그러나 상응이라는 용어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포괄하고 총체성 지평의 발본화와 복수성의 극단주의가 제기하는 절대적 대립의 잠재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유토피아는 위반된다. 그래서 한편으로 모든 조직적 매개는 고려되지 않으며, 매개과정에 대한 위계적 정의라는 신플라톤주의적 주체는 제거된다. 다른 한편으로 유토피아가 자기 자신의 효과에 대한 내재적이고 외재적인 검토를 치르고 있으며, 그 자신 안에서 자신을 구성하는 절대적 긴장 안에서 자기 자신의 부정과 자기 자신의 비변증법적인 지양이 지닌 역능을 이해하는 이데올로기는 이 모든 것을 폐기한다. 스피노자의 유토피아는 바로 그것이 부정하는 것이라고 간주된다. 실재의 적대적 일치(상응)는 스피노자에서 스스로를 총체성의 동질성이라는 수수께끼로 만드는 지점까지 계속 성장하여, 필연적으로 실재의 증명을, 수수께끼가 실천으로 해소되었다는 증명을 재천명한다. 그와 동일한 동질적이고 수수께끼적인 상응에 이제 타당화의 기준으로서, 조직화 형태로서 가치가 부여된다. 이것이 시장관념, 즉 가치, 위계, 지배명령인 교환이다. 그리고 이것이 스피노자‘주의’가 묘사하는 존재이다. 스피노자주의는 스피노자의 접근법을 무시하고 파괴한다. 대신 스피노자에 대한 신비화만 남게 된다.(183)

연구공간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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