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호컨, 영성을 떠올리게 하다
기후 우울증(Climate Depression/Climate Blue)1에 코로나 블루(COVID Blue)2가 겹쳤던 2021년에는 사람들이 기후위기를 더 심각하게 느꼈던지, 관련된 책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듯하다.
환경운동가 겸 사회적 기업가 겸 저널리스트인, 『플랜 드로다운』3의 편저자 폴 호컨4은 2021년에 『한 세대 안에 기후위기 끝내기; 재생의 시대를 위하여』5 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67개 경영대학 교수들이 그의 책 『비즈니스 생태학』6을 ‘경영 및 환경 분야 최고의 대학 교재’로 선택한 책의 저자인 것을 보면, 그는 대단히 온건하며 자본 친화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주된 분위기는 ‘미래에 실존적 위협이 명백하다 하더라도, 현재 인류의 필요 또한 급히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저자는 그가 세계를 위한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의 전력화(electrifying everything)와 같은 다양한 문제해결 방법들을 제시하였는데, 저자는 이것들 모두를 재생(Regeneration)이라는 한 마디 말로 묶어 그 성격을 설명하였다. 김현우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사례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효과를 만들어낼지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이런 재생의 얼개가 짜여 있다고 보았다.7 여기까지 설명한 것을 보는 사람들은 호컨의 방식이 앞서 평한 바와 같이 온건하며 자본 친화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듯하다. 호컨의 방식은 기존의 추세 앞에서 지나치게 수세적이어서 현재의 기후급변에 대한 대책이 되기에는 너무 약한 책략이라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만 “지구를 구하는 것이 당신의 임무는 아니다”라면서 마음의 짐을 먼저 덜어주기까지 한다. 저자는 기후위기 해결이 ‘우리 인간에게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니 신념에 입각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고 하기도 한다. 주변에 기후위기를 더 예민하게 인식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도 그를 닮아 자연스럽게 변할 수 있으니, 우리를 바꾸는 것은 지인들의 행동이지, 운동가들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온건한 대안 속에서도 19세기 이전의 이성의 합리성을 굳게 믿는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향이 발견된다.
식물의 미생물들이 바람에 실려 하늘 높이 올라가서 우박의 종자 입자가 된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순환 과정이었다. 강우로 인해 숙주식물로 되돌아간 박테리아는 신속하게 증식하여 다시 위로 올라간다. 이 과정은 바다에서도 이루어져 조류의 박테리아들이 용승 해류에 실려 수면으로 이동하고 이곳에서 폭풍우에 의해 뒤섞여 파도 비말이 되어 바람을 타고 대기로 올라간다. 이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식물들이 땅에 강우를 일으키는 미생물들을 제공한다면, 식물이 부족할 경우 지역적으로 비와 눈이 감소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8

호컨은 비바람과 바다에서 일어났다가 스러져가는 폭풍우와 파도와 물거품들이 빚어내는 순환 속에 미생물이 개입되어있음을 강조하였다. 과학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생명의 개입을 인식하고 연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식물들이 미생물을 살게 하고 미생물들이 눈비의 생성 소멸에 개입하는 순환의 인식은 꽤 오랫동안 그런 현상을 연구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지금 이런 인식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공유되어야만 할 듯하다. 상황은 여러 방면에서 이러한 인식의 확산을 요구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확산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애니미즘(Animism)과 영성(靈性)(Spirituality)이 그 쉽지 않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애니미즘은 라틴어 아니마(anima)(영혼·생명)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바위·나무·강·바람 등등 자연계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 영혼이나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19세기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 1832~1917)가 처음 학문적으로 정립한 용어라고 한다. 20세기에 이 개념은 원시 종교관념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모든 존재에 영성이 깃들어있다는 주장의 이름이 되어갔다. 원시 종교에서 모든 존재에 영성이 깃들어있다고 하였던 것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불충분한 설명의 한 예로 취급되었었다.
그러나 지금 애니미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많은 비인간 존재들에게 영성이 깃들어있다고 확신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상정(想定)하려고 하는 듯하다. 이때의 비인간 존재의 예로 대비되는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하나는 식물이나 광물 같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봇이나 휴머노이드 같은 것이다. 식물이나 광물은 사람의 삶의 도구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그러나 기후환경위기를 느끼면서 더 이상 식물이나 광물을 도구로만 국한시켜서는 위험해지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사람이 식물이나 광물을 관계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른 이유에서이지만, 로봇이나 휴머노이드을 도구로만 국한시켜서는 위험해지겠다는 생각도 일어났다. ‘잘 만들어진’ 로봇이나 휴머노이드를 윤리적 갈등의 당사자로 상정하고 규범을 수립해야 하는 시기가 멀지 않았다고 볼 때, 지금쯤 그들에게 영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이른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영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존 호컨의 기후위기 대응을 보다 보면, 그 대응이 ‘온건하며 자본 친화적’이라는 평가를 쉽게 받을 것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에릭 홀타우스, 영성으로 지구를 돌보는 상상을 하다
2021년에 나온 에릭 홀트하우스9의 저서 『미래의 지구』10는 지구 기후가 온난화하는 시대에 무엇이 가능한지에 관한 급진적 비전11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있다.
제1부
지속적 비상사태
제2부
2020∼2030년: 극적인 성공
2030∼2040년: 획기적 관리
2040∼2050년: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영성
홀트하우스는 2020년 이전의 지구의 상태를 ‘지속적 비상사태’로 묘사하고, 2020~2050년의 30년을 세 단계로 나누어 첫 번째 10년(2020∼2030년)에 에너지와 경제의 전환에서 ‘극적인 성공’이 이루어지고, 두 번째 10년(2030∼2040년)에 에너지와 경제의 ‘획기적 관리’가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세 번째 10년(2040∼2050년)에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영성’이 지배적인 상황이 되는 세계의 모습을 제시한다.12 제1부에서는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탄소 배출과 해수면 상승, 더욱 강력해진 허리케인, 심각한 홍수, 극심한 가뭄과 산불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제2부에서는 종말론적인 시선에 그치지 않고 미래학자·기후학자·생물학자·경제학자·기후변화 운동가와 나눈 인터뷰를 통해 지구와 인간 사회가 공존할 수 있는 ‘미래의 지구’를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만을 보면, 홀트하우스의 생각은 허황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마치 기후 우울증(Climate Blue)을 앓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임시처방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책 속에는 무작위로 선발된 100명의 사람들이 시민회의를 구성하고 그들 각자가 원하는 2050년의 모습을 통해 하나의 희망적인 비전을 만들어내고, 모든 사람이 지지할 수 있는 실행 방안을 마련하는 모습이 실려 있기도 하다13. 마치 홀트하우스가 자신의 주장에 구체성을 더해주기 위해서 그런 모습을 애써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2부의 ‘2030∼2040년: 획기적 관리’에서 홀트하우스는 이런 변화가 자본주의를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 어떻게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일까? 끝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모델은 지구가 급변하는 시대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14 홀트하우스가 제시한 비전 구석구석도, 지금까지의 세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낱낱이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해 보였다. 그에 더하여, 변화를 위하여 자본주의를 버리라는 홀트하우스의 권고는 더 많은 강렬하거나 냉소적인 비판자를 끌어 모을 것만 같다. 많은 사람에게 자본주의 아닌 세계는 공포 그 자체인 듯 싶다. 욕망 추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삶의 태도는 쉽게 의혹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한 삶의 태도는 철저한 냉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래의 삶과 연관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홀트하우스의 판단은 “끝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모델은 지구가 급변하는 시대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15” 라는 김현우의 주장에 의해서 변호될 수 있을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자신에게 맞는 못을 찾아 입은 사람에게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자본주의를 버릴 것을 권고한 홀트하우스는 제2부의 ‘2040∼2050년: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영성’에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영성이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미래를 그려놓았다. 김현우의 정리에 따르면, 여기에서 홀트하우스는 사회운동이야말로 모든 분야에서 신속하고 광범한 탈탄소화를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라고 하였고, 지구를 돌보는 일은 새로운(오래된) 영성이라고 하였다.16
경원과 요청

많은 사람들이 기후환경위기를 걱정하지만,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기후환경위기의 해소를 위하여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권고를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권고 못지않게 사람들이 생경하게 느끼는 것이 영성일 듯싶다. 거의 20세기 전 시기에 걸쳐서 애니미즘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보라는 것이 상식처럼 통용되었다. 그런데 이제 21세기를 살면서 애니미즘을 세계에 대한 최신의 설명으로 만나고, 모든 존재 심지어 ‘비존재’에까지 영성이 깃든 것으로 상정하는 것이 관계적 삶의 기본 전제이고, 그 전제 위에서 무분별하고 자기중심적인 대상화로 환경을 파괴하는 일을 멈추고 안전한 세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만나는 것은, 20세기를 지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 한국인으로 특정하여 보면 어떨까? 한국인은, 이른바 근대화의 길에 대단히 늦게 동참하였지만, 열렬히 그 길을 달려서, 먼저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추월한 듯하다. 그리고 이런 추월에는 한국적 전통의 일부인 유교사상이 강하게 작용하였을런지도 모른다. 유교 경전 『논어』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번지(樊遲)가 지(智)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한다면 지(智)라 말할 수 있다.” 다시 인(仁)에 대하여 묻자, 또 말씀하셨다. “인자(仁者)는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하니, 이렇게 한다면 인(仁)이라고 말할 수 있다.”1718
이는 공자가 제자 번지의 성격상의 특성에 맞게 말하여준 권고라고 하는데, 여기에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한다면(敬鬼神而遠之)” 이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이를 줄여서 경원(敬遠)(공경하되 멀리하기)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으며, 이 말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쓰여 왔다. 여기에서 귀신은 알기 어려운 것(소난지(所難知))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앎을 추구함에 있어서 알기 어려운 것을 멀리(원(遠))하라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일까 아니면, 먼저 하려 들지 말고, 알기 어렵지 않은 것부터 알고, 그 다음에 알기 어려운 것을 알려 하라는 것일까, 해석이 분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논어』에서 만들어진 경원이라는 말을 통하여, 유교문화권에서는 이미 거의 2500년 전부터 사람들에게 귀신 달리 말하자면 영적인 존재와 거리두기를 권하여 온 듯하다는 추정으로 하여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경원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일 때, 그런 쓰임에서는 ‘멀리하라’ 혹은 ‘경계(警戒)하라’는 당부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먼 것(원(遠))은, 알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어려우니 먼저 덥썩 덤벼들지 말아야 할 탐구의 대상인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영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영성은 경원해야 하는 대상인가? 경원해야 한다면 그 경원은 그저 멀리하기인가 아니면 당장 쉽게 알기 어려우니 먼저 덥석 덤벼들지 말고 차근차근 다가가기인가? 이런 의문을 해결하려면 경원(敬遠)(공경하되 멀리하기)이라는 정돈된 말로부터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기)라는 말로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하런지도 모른다. 그러면 왠지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는 오늘날 우리가 영성(靈性)을 대할 때 요청(要請)되는 태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것의 영성을 적극적이고 즉각적으로 인정하라는 권고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청(要請)(Postulate)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요청(要請)(Postulate(포스튤레이트))은 칸트가 그의 철학을 펼치기 위해서 중요한 전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도덕적 삶을 실천하기 위해 이성이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세 가지 전제 즉 자유(Freedom)・영혼 불멸(Immortality)・신의 존재(God)를 말한다. 칸트는 도덕 법칙(‘~하라’라는 형식으로 주어지는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선(최고선)에 도달하려면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므로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불멸해야 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도덕적으로 산 사람이 그에 합당한 행복을 얻는 ‘정의’가 성립하려면, 도덕과 행복을 일치시켜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요청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절대적인 존재에 주목하여 보면, 그것을 요청한다는 것은 그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식물이나 광물에 대해서 빠른 속도로 세세히 알아가고 있으면서도 예전처럼 다 알고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 상황. 로봇이나 휴머노이드 같은 것들을 도덕적 주체로 인정하기 바로 직전쯤의 상황. 이런 상황이 모든 것들에 영성이 깃들어있다고 보는 태도를 그야말로 요청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성을 경원(敬遠)하는 것은 적절한가? 앞에서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는 왠지 오늘날 우리가 영성(靈性)을 대할 때 요청(要請)되는 태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경원(敬遠)의 여러 결에 대해서 생각하여보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도 유익할 듯하다. 사람들이 거의 한 세기 동안 유지해왔던 애니미즘과 영성의 정의가 바뀌긴 하였지만, 언제 또 반전이 일어나 애니미즘이나 영성이라는 말의 무게와 색깔이 지금과는 달리 자리매김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위기에 따라 그 말들을 사용하고 그런 태도를 취하면서도, 다른 의미와 태도 또한 상상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이러할 때, 영성을 요청(要請)(Postulate)으로 간주하고 대해 보는 것 또한 우리의 사유의 폭을 넓혀줄 수 있을 듯하다.
기후 위기로 인해 미래가 사라졌다는 공포와 환경 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만성적인 무력감, 슬픔이 우울감으로 이어지는 심리 상태를 뜻한다. ↩
코비드19와 우울감을 뜻하는 블루(Blue)의 합성어로, 감염병 확산으로 인해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한다. ↩
폴 호컨(엮음), 이현수(옮김), 『플랜 드로다운』기후변화를 되돌릴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계획』, 글항아리사이언스 2019-09-20. ((Paul Hawken(ed.), Drawdown: The Most Comprehensive Plan Ever Proposed to Reverse Global Warming, Penguin Group USA, 2017-04-18.) ↩
한글로 호켄이라고 쓰기도 한다. ↩
폴 호컨(지음), 박우정(옮김), 『한 세대 안에 기후위기 끝내기; 재생의 시대를 위하여』, 글항아리사이언스, 2022-02-25. (Paul Hawken, Regeneration: Ending the Climate Crisis in One Generation, Penguin Books, 2021-09-21.) ↩
폴 호컨(지음), 정준형(옮김), 『비즈니스 생태학』, 글항아리사이언스 2019-09-20. (Paul Hawken, The Ecology of Commerce: A Declaration of Sustainability, HarperBusiness, 1994-01-01.) ↩
김현우, 「탈성장의 사회상에 대한 역사적 시나리오 접근」,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기획), 『탈성장을 상상하라: 성장 신화의 종말과 이후 시대』, 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23-06-05, 110쪽 참조. 이 글은 2022년 7월 3일, 웹진 『생태적 지혜』2022년 7월 3일, 웹진 『생태적 지혜』에 게재에 게재되었던 것이다. ↩
폴 호컨(지음), 박우정(옮김), 『한 세대 안에 기후위기 끝내기; 재생의 시대를 위하여』, 글항아리사이언스, 2022-02-25., 248쪽.↩
한글로 홀타우스라고 쓰기도 한다.↩
에릭 홀트하우스(지음), 신봉아(옮김), 『미래의 지구; 온난화 시대에 대응하는 획기적 비전』, 교유서가, 2021-11-05. (Eric Holthaus, The Future Earth: A Radical Vision for What’s Possible in the Age of Warming, HarperOne, 2020-06-30.)↩
김현우, 「탈성장의 사회상에 대한 역사적 시나리오 접근」, 107쪽. ↩
위의 책, 107쪽 참조.↩
위의 책, 107쪽 참조.↩
위의 책, 108쪽 참조.↩
위의 책, 108쪽.↩
위의 책, 108쪽 참조.↩
『論語』 「雍也」20: “樊遲 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問仁. 曰: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論語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1,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0, 11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