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문학모임_일요 세미나(10월 모임 후기)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세미나가 2021년 10월 한달간 매주 일요일마다 오후6시 연구공간L 주최로 온라인을 통해 진행되었다. 11월 모임에서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어서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참여 문의: 010.2716.0746

잉문학모임 『지각의 현상학』_일요 세미나(online)

■커리큘럼 :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일시 : 2021년 10월 3일 (일요일) 오후 6-9시

■내용 :

  • 「반성과 물음」 장, ‘지각적 신념과 그 불투명성’
  • “우리는 사물 자체를 본다. 세계란 우리가 보고 있는 바 그것이다. … 그러나 신념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어서 우리가 이 신념을 명제 또는 진술로서 명확히 발언하고자 하면, 우리는 무엇이고 본다는 것은 무엇이며 사물이나 세계는 무엇인지 자문하게 되면, 우리는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들과 모순들에 봉착한다.”(17)
  • 철학자 특히 반성철학에 대한 비판적 언급. “철학자는 인류에게 자신을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생각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인류를 더욱 철저히 박탈시키기 때문이다. … 철학은 사물들을 침묵으로부터 끌어내어서 사물들이 표현하게 인도하고자 한다. 철학자가 자신의 내면에서 활동자들로서 끊임없이 스스로 형성되고 있는 세계와 세계에의 시각에 물음을 던지는 것은, 그러니까 결국 그들에 대해 무지한 척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철학자가 그것들을 신뢰하며 그것들로부터 자신의 미래 학문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것들에게 말을 하게 하고자 함이다. 여기서 물음은 부정의 시작이 아니요, 있는 것(존재)에 대치시킨 있을 수 있는 것(불확실한 것)이 아니다. 물음은 철학이 사실로서의 우리의 시각에 자신을 국한시키는 유일한 방식이며, 이 시각 안에서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는 것에, 이 시각을 이루고 있는 역설들에 상응하는 유일한 방식이다.”(18-19)
  • 주제적 물음. “어떻게 우리는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는가, 어떻게 꿈의 넝마 조각들이 꿈꾸는 사람 앞에서 진정한 세계의 잘 짜인 직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어떻게 현혹된 사람의 머릿 속에서 관찰한 적이 없는 이 무의식이 관찰한 적이 있다는 의식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20-21)

■일시 : 2021년 10월 10일 (일요일) 오후 6-9시

■내용 :

  • ‘지각적 신념과 그 불투명성’ 이어서
  • “내가 나의 나 자신에 대한 관점들만이 아니라 타인의 그 자신과 나에 대한 관점들을 고려하면 위에서 본, 사물과 몸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몸이 내가 지각을 못하게 방해할 수 있으며, 몸의 허락 없이는 지각할 수 없다는 점뿐이다. 또한 지각이 오면 그 순간 몸은 뒤로 빠져 버리기에 지각은 지각하는 과정에 있는 몸을 절대로 포착하지 못한다.”(24-25)
  • “나의 지각과 나의 지각이 겨누는 사물은 나의 머릿속에 있다고 말해 보아야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터이나 (단지 그것들이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점만 확실하다) 나는 부득이 타인을, 그리고 타인이 가지는 지각을 그의 몸 배후에 놓을 수밖에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타인에 의해 지각된 사물은 양분화된다. 즉 그가 지각하는 사물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있고, 내가 그의 몸 밖에서 보면서 진정한 사물이라고 부르는 사물이 있다.”(26)
  • “개인적인 세계들은 이름뿐인 자들, 즉 세계를 가지고 있는 개인들에게만 ‘세계들’일 뿐이요, 세계가 아니다. 단 하나의 세계, 즉 유일무이한 세계는 공통 세계(Koinos Kosmos)이리라. 그리고 우리의 지각이 열리는 것은 이 유일세계를 향해서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지각들은 무엇을 향해 열리는가? 내가 나의 자리에서 보는 바대로의, 타인이 체험한 것을 무엇이라 부르며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26-27)
  • “저 눈들 뒤쪽, 저 몸짓들 뒤쪽 어딘가, 뒤쪽이라기보다는 저들 앞쪽 어딘가, 저들 주변 어딘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의 이중 바닥에서 생겨난 하나의 다른 개인적 세계가 나의 세계의 피륙을 통해 말갛게 비쳐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에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다른 개인적 세계에서이며, 나는 나에게 건네진 말에 대한 응답자에 불과하다. … 내가 타인의 삶을 고유한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 내가 타인의 삶을 만나는 것은 그 삶의 목표들, 그 삶의 외적 특색들 가운데서뿐이다. 우리가 서로 교감하는 것은 세계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이 가지고 있는 분절화된 요소들에 의해서이다.”(27)
  • “커뮤니케이션은 … 우리를 유일한 세계의 증인으로 만든다.”(27)
  • “우리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라고 하는 감성세계에 대한 설명되지 않는 이 확신은 곧 우리 내면에서 진리의 토대가 되고 있다. … 감성세계는 눈에 보이며 비교적 연속적인 반면, 사유의 우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누락 부분들을 내포해 언뜻 보기에 전체를 구성하지 못하며, 감성세계의 기준적 구조들에 의거하는 조건에서만 자체의 진리를 가지기 때문이다.”(29)

■일시 : 2021년 10월 24일 (일요일) 오후 6-9시

■내용 :

  • ‘과학은 지각적 신념을 전제할 뿐 설명하지는 않는다’
  • 과학의 관점. “진실적인 것이란 내가 보고 있는 사물도 아니고, 또한 내가 나의 눈으로 보고 있는 다른 사람도 아니며, 감성적 세계의 전반적인 통일도 아니고,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조금 전에 기술을 시도했던 지성세계의 전반적인 통일도 아니다. 진실인 것은 객관적인 것, 즉 내가 측정에 의해 규정하는 데 성공한 것,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내가 어떤 사물들의 질서에 대해 나에 의해 정의된 변수들이나 존재자들이 허용하는 조작들을 통해 규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한 규정들은 사물과의 우리 접촉에서 힘입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러한 규정들은 근사법의 노력을 표현할 뿐이다.”(32)
  • “오늘날엔 물리학의 기술이 엄밀해짐에 따라 물리학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관계들을, 관찰자의 어떤 상황에 대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어떤 규정들을 충분한 권리를 지닌 최종적인 물리적 존재들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우주의 관찰자’와 그 상관자인 대객관의 존재론은 선-과학적 편견의 모습을 띤다. 그럼에도 이 존재론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물리학자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순수한 객관 앞에 선 절대적 정신처럼 생각하며, 또한 상황에 위치시켜진 육신의 물리학자와 관찰가능한 모든 것과의 유대성을 나타내는 진술들조차 자체적인 진리들의 수에 포함시킨다.”(33)
  • “어떤 순간에 살고 있는 어떤 개인의 구체적인 지각장을 총체적으로 규정한다 함은 일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살아 있는 개인의 지각장이 분리시킬 수 있는 ‘조건들’이자 분리되어 있는 ‘조건들’로 이루어진 객관적인 우주에서는 그 이름조차 없는 구조들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 내가 어떠한 고립화적 태도도 취하지 않고 두 눈으로 자유롭게 바라볼 때 가지게 되는 시야를 고찰할 경우, 나는 이 시야를 조건들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조건들이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서 또는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조건지어진 것’ 자체가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그러한 질서에 속하기를 그치기 때문이다.”(41-42)

■일시 : 2021년 10월 31일 (일요일) 오후 6-9시

■내용 :

  • ‘지각적 신념과 반성’(49쪽)
  • “내가 내 시선에 의해 세계에 접속되어 있다고 믿는 나의 확신 가운데 이미, 내가 내 시선이 떠돌게 내버려둘 때 환각들(판타즘)의 가짜세계가 나타날 가능성이 들어 있는 것이다.”(49)
  • 반성철학의 몇 가지 전제. (1) ‘지각작용이란 지각이 충만하거나 현재 이루어지고 있을 때 지각하고 있다.’ (2) 상상은 절반만 사유하는 사유이다.‘ (3) 반성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확신, 세계가 있고 진실의 관념이 주어진 진짜 관념이 있다는 확신을 존중한다. 다만 사물 자체로 간다는 이러한 무사려한 확신을, 반성은 단순히 반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 또는 의미하는 것으로 환원하고, 이 확신을 확신의 진실로 만들어 버리며, 반성은 이 확신에서 생각과 생각 사이의 합치와 합의를 보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이 생각을 하는 나에게 투명하게 나타남을 발견한다. 나는 세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에 내가 눈을 뜰 때, 세계를 발견한다고 믿었던 세계의 선행적인 본연의 실존은, 존재하자마자 곧 대자 존재로 존재하는 한 존재의 상징, 즉 정신이라고 불리는 것의 상징이다.’
  • 이렇게 해서 반성철학은 “순수한 주체 앞에 관념 대상이나 사유 대상이나 지향대상들만 남기고 더 이상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반성적 전환에 의해, 우리들은 마침내 지각적 신념의 애매성으로부터 벗어난다. … 사유란 정의상 내재적으로만 사유된다.”(53)
  • 반성철학은 “자체로서의 세계와 나 자신 사이의 외적 관계”를 “세계의 내부에서 전개되는 것들의 과정 타입으로, 요컨대 세계가 나의 내부에 침입한 것이라고, 또는 반대로 나의 시선이 사물 가운데를 배회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지각하는 나와 내가 지각하는 것 사이의 태생적 관계를 반성 철학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55)
  • “반성적 전환과는 다른 작전,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작전이 필요하다고, 일종의 초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초반성이란 반성 자체를 물론이요, 또한 반성이 장면 가운데 들여올 변화들을 고려”한다.(63-64)

연구공간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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