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문서는 무엇입니까?

도시농부인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서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가을걷이를 마친 텃밭을 둘러보며 느끼게 되는 것들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우리집 가장 중요한 문서는 아빠의 월급명세서와 제 성적표예요.”

정신과 전문의 김현수가 쓴 『무기력의 비밀』이라는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말이다. 작가가 상담했던 아이가 한 말이란다. 문득 이 말이, 내 생각을 사로잡았다.

농부인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서는 무엇일까? 사진출처 : congerdesign
농부인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서는 무엇일까?
사진출처 : congerdesign

나는 도시농부이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농부가 잠시 쉬어가는 계절인 겨울을 맞이하며 “우리집 가장 중요한 문서”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농부인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서는 무엇일까? 소득현황부? 병충해피해보고서? 작부계획서? 농사일지? 일기예보 예방대책 기록지?

한동안 수시로 찾아든 질문. 농부로서 너에게 가장 중요한 문서는 뭐니? 숲길을 거닐다가도,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도 텃밭을 정리하면서도 찾아드는 질문.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수시로 떠오르는 걸 보니 나에게는 중요한 질문인가보다.

한동안 김장 무며 배추가 무럭무럭 자라던 이웃 밭은 가을걷이를 다 하고 난 후 마늘, 양파, 시금치 등 겨울작물을 심는 땅으로 바뀌었다. 부지런한 농부들을 보면 부럽기는 하지만, 나의 게으름은 감추고 ‘그래도 땅도 쉬어야지.’ 혼자 중얼거리며 빈 땅에 나뭇잎을 두껍게 덮는다. 11월 말을 지나는 텃밭은 그야말로 쓸쓸함의 절정을 달린다. 찬 서리로 얼어서 볼품없이 스러져가는 잡초들은 농부를 째려보던 그 여름의 당돌함은 온데간데없고 불쌍하리만치 축 처져 코가 석 자는 빠져있다. 휑한 밭을 낮게 훑으며 불어 닥치는 바람은 매섭고 차가워 몸서리를 치게 한다. 그 쓸쓸한 밭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뭉클함이 가슴으로부터 올라온다. 이 감정은 뭘까? 변화무쌍했던 몇 평짜리 텃밭에서 맛보았던 순간순간의 감사에 대한 되새김질인가?

도시농부들의 밭은 포물선을 그리는 그래프다. 쌈채소 같이 키 작은 봄 작물로 시작해서 토마토, 가지, 넝쿨같이 지주대가 필요한 키 큰 작물이 밭을 꽉 채우다가 가을이 오면 일제히 지주대를 뽑아내고 가을작물인 무, 배추, 쪽파 등을 심어 밭높이를 낮춘다. 그리고 겨울이 되기 전 마늘, 양파, 시금치 등을 파종해 밭의 높이는 더욱 낮아진다. 물론 나처럼 게으른 농부는 빈 밭으로 봄까지 그냥 놔두기도 한다.

지금 지렁이는 땅 속 깊이 내려갔겠지? 어린 배추 모종 줄기를 갉아 말라죽게 하고 통통하고 예쁘게 자라던 무의 하얀 종아리를 갉아 먹어 볼썽사납게 만들어놓았던 굼벵이 고놈도 겨울 추위를 피해 내려가고 있겠구나. 흙 속의 갖가지 생명들은 어떻게 겨울을 날 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텃밭을 둘러보며 느꼈던 뭉클함은 땅에 대한 깊은 고마움에서 기인한 것 같다. 많이 애썼어, 고마워, 네가 품고 있는 생명들의 살림살이는 괜찮았니? 무식한 농부로 인해 여러 피해를 입지는 않았니? 욕심 많은 농부로 인해 혹사당하지는 않았니? 남은 양분마저 내놓으라고 쥐어짜이지는 않았니? 경작본능 넘쳐나는 농부로부터 끊임없이 엎었다 매쳤다 패대기 당하지는 않았니?

건강한 땅이 주는 것을 먹거리라는 덤으로 받아왔는지,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해 건강한 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지 자문해본다. 
사진출처 : allybally4b
건강한 땅이 주는 것을 먹거리라는 덤으로 받아왔는지,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해 건강한 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지 자문해본다.
사진출처 : allybally4b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먹거리가 나온다’는 말을 정의인 양 후배농부들에게 열심히 설파하던 나는 생각해 본다. 건강한 땅이 주는 것을 먹거리라는 덤으로 받아왔는지,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해 건강한 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지. 전자는 땅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그가 품은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봐주고 필요에 따른 최소한의 개입만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건강한 땅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농부가 주체가 되어 토양시료를 채취하여 분석하고 그에 따른 유기물과 영양상태, 습한 정도를 살펴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것이다.

산림치유를 진행할 때 일이다. ‘나무도 자살을 한다고 해요’라는 나의 말에 ‘자연은 인간과 다를 줄 알았다. 항상 힘들 때 숲에 가서 위로를 받았는데 나무도 자살을 한다니 너무 충격적이다.’라고 말한 참여자가 있었다. 이 말의 밑바탕에는 ‘인간과 자연은 별개’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 사람도 자연이다.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조각이다. 인간은 자연 밖에 있으며 자연을 이용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 안에서 타 생명체와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그냥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땅을 경작하여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부인-가장 중요한 문서는 땅과 나눈 대화록인 것 같다. 땅을 경작하는 것에서 멀어지고 생산하는 것에서 멀어지고 다만 땅이 내주는 것을 덤으로 받아먹고 심신이 건강하게 사는 도시농부이고 싶다. 농부가 농한기 잠시 쉬어가듯 땅도 쉼이 필요함을 아는 농부이고 싶다.

나는 오늘도 땅에게 묻는다. “네 집 식구들은 한 해 동안 살 만했다던?”

어치

안녕하세요. 저는 도시농부이며 심신의 치유를 위해 사람들을 산림으로 이끄는 일을 하는 어치입니다. 맨발로 밭 일구고 숲속을 다닐 때 제일 좋습니다. 어치는 산까치라는 새를 일컫는 말로 십여 년 넘게 이 이름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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