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다면적인 문화생활에 대해 생각해보다 –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언젠가 ‘이 복잡하고 비정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전원에서 여유를 즐기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서 누군가 홀로 일어나 ‘대도시의 얽히고설키고 다면적인 문화생활’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서, 좀 더 많이 모여 살자고 했다. 1960년대 이후 많은 사람에게 생각의 계기가 된 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이 바로 그런 것이다.

1898년, 에버니저 하워드(Sir Ebenezer Howard, OBE, 1850~1928)는 “런던의 성장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종류의 도시를 건설하여 마을이 줄어들고 있던 시골에 사람들을 다시 거주하게 하는”[39쪽] 런던 도시계획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을 바탕으로 그가 만들려고 했던 것은 전원도시Garden City로 불리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 1916~2006)에 의하면, 하워드의 제안에 담긴 발상은 오랫동안 많은 도시계획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아, 1950~60년대에 이르러서도 당대의 주류 도시계획 전문가의 생각의 바탕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 책은, 저자가 “현대의 정통 도시계획과 재건축을 모양 짓고 있는 원칙과 목표”[21쪽] 라고 표현한, 1950~60년대 미국의 주류 도시계획과 재건축을 비판하고, 저자 나름의 원칙과 목표를 제시하는 제안이다. 그러다 보니, 1950~60년대 미국의 주류 도시계획 이론에 짙게 스며있다고 저자가 생각하는 하워드의 발상부터 문제 삼고 있다.

사실 ‘유순하고 자기 나름의 계획이 전혀 없이 독자적인 계획이 전무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을 보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사람’은 희귀하다

“19세기 후반 런던 빈민들의 주거 조건을 관찰한 하워드는 당연하게도 자신이 보고 듣고 냄새 맡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워드는 런던이라는 도시의 해악과 오류를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이 도시 자체를 혐오했으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몰아넣는 것은 철저한 악이자 자연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하워드가 내놓은 처방은 이 도시를 없애는 것이었다.”

39쪽
제인 제이콥스 저,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그린비, 2010)
제인 제이콥스 저,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그린비, 2010)

저자가 정리한 하워드의 생각이다. 이 정리가 적절한 것이라면, 하워드의 심정은 상당히 넓고 깊게 이해가 된다. 1854년 런던에서 콜레라가 유행하였다. 콜레라가 먹는 물을 통해 퍼진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후였다. 그 시기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에서는 우물, 부실한 하수도, 수세식 화장실이 공존하였다. 시민의 상당수가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지와 목축지로부터 도시로 밀려난 ‘비자발적’ 임금노동 대기자들이었다. “전원도시(Garden City)를 통해 도시 빈민들은 다시 자연 가까이에서 살게 될 것이었다. 도시 빈민들이 생계비를 벌 수 있도록 ‘전원도시’에 산업 시설을 세울 예정이었다. 하워드는 도시를 계획한 것도, 교외 주택지(domitory suburb)를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하워드의 목표는 자급자족적인 소도시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39쪽] 하워드는 농지와 목축지를 등떠밀려 떠나서 콜레라로 고통받은 런던의 도시 빈민들을 자연 가까이에서 살게 해주려고 한 것 같다. 하워드의 선의가 느껴진다.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농지와 목축지 혹은 바닷가를 출발점으로 하였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원에 향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워드는 도시 빈민을 그들의 조상들이 등 떠밀려 떠나온 전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19세기 말의 런던에서 빈민들이 떠나면 런던은 잘 돌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잘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기를 1760년 쯤으로 잡을 때, 1800년대 후반은 벌써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후였고, 그 사이 영국의 산업구조는 빠른 속도로 변하였다. 1886년,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는 자동차가 발명되었다고 한다. 이는 석유의 대량 사용을 예고한 것이다. 석유의 사용과 자동차 산업의 탄생 등 산업과 문명 전반의 구조 자체가 격변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런던에 살아야 하는 그리고 제대로 살 수 있는 적정 인구의 수가 그 이전에 비하여 급격히 줄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런던의 빈민들 가운데 상당수를 더 이상 런던에 붙잡아 둘 이유가 없어졌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하워드는 레치워스(Letchworth)와 웰윈(Welwyn) 두 전원도시를 그럭저럭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가 ‘그럭저럭’이라는 낱말을 쓴 이유는, 두 전원도시 이후 저자가 이 책을 쓰던 시대까지 ‘전원도시’의 원리에 입각한다고 표방한 도시들이 계속 건설되고 있으나, 저자가 보기에 그것들은 하워드의 구상을 불완전하게 변용한 사례들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왜 불완전하였을까? 아마도 도시의 사정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하워드가 전원도시를 구상했던 시점에 잠깐 런던의 빈민 수가 줄어들 필요가 있었던 시기가 반짝 지속되었을런지 몰라도, 또다시 런던은 더 많은 노동자와 소비자를 필요로 하는 도시로 급변하였을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도시들은 점점 더 많은 노동자와 소비자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변했다. 그러니 하워드의 이상 그대로 전원도시를 만들고 노동자를 그곳으로 분산시키는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원도시를 계속 지어 도시 빈민들은 ‘귀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필요로 하는 노동자와 소비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도시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논리적일 듯하다. 나아가 저자는 하워드의 전원도시가 인간의 본성에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본 것같다. 저자는 하워드가 만들고자 하였던 자급자족적인 소도시가 “유순하고 자기 나름의 계획이 전혀 없이 독자적인 계획이 전무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을 보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사람.”[39쪽] 에게나 어울릴 것이라고 적었다. 또한 저자는 하워드가 제시하는 자급자족적인 소도시를 “이익분배 제도를 갖추고 일상적인 보호 관리의 정치 생활은 학부모교사협의회(Parent-Teacher Association)가 책임을 맡는 모범 기업도시”[40쪽]라고 재정의한다. 하워드가 구상한 것은 “온정주의적인 정치·경제 사회”[40쪽]라고도 적었다. 전원도시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상당히 과격하다. 하워드가 구상한 것의 결과를 저자가 온정주의적인 정치·경제 사회라고 했을 때, ‘온정주의적인’ 이라는 말은 ‘선의의 간섭이 행하여지는’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고, 여기에서 강조점은 선의가 아니라 간섭에 주어질 것이다. 모범 기업도시가 있다면 거기에서는 기업이 시민을 간섭할 것이다. 이때 간섭이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기업이 베푸는 선의는 이윤추구와 무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앞서 인용한 인간상 즉 “유순하고 자기 나름의 계획이 전혀 없이 독자적인 계획이 전무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을 보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사람”을 떠올려 보면, 그러한 인간상은 수동적이며 수용적인 인간상이라 바꿔 말할 수 있다. 저자가 하워드의 구상을 이해한 방식이 타당하다면, 하워드가 구상한 ‘전원도시’는,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넘쳐나게 된 도시 빈민이 귀향을 대신하여 가는, 네이선 글레이저(Nathan Glazer, 1923~2019)에 의하면 “영국의 시골 소읍”[40쪽] 비슷한 곳이라기보다는, 기업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선의의 간섭을 저항없이 수용하는 3만 이하의 노동자가 살고 있는 도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은퇴자가 아니라 주어진 일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노동자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의 말이 맞다면, 전원도시의 규모나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완전히 수동적이며 수용적인 인간이 없기 때문에, 하워드의 구상은 현실화되기 불가능했던 것이다.

저자는 하워드의 구상이 일련의 정적인 행위라고 보았다. 그 구상은 “권위주의적이지는 않더라도 본질상 온정주의적”[41쪽]이었으며, 하워드는 “건강에 좋은 주거의 제공”[41쪽] 같은 “자신의 유토피아에 이바지할 내용을 추출할 수 없는 도시의 다른 측면들”[41쪽]에는 관심이 없어서, “대도시의 얽히고설키고 다면적인 문화생활”[41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저자는 보았다. “얽히고설키고 다면적인” 상황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 하워드와 저자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나아가 저자는 사실 “유순하고 자기 나름의 계획이 전혀 없이 독자적인 계획이 전무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을 보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인간 유형이니, 그런 사람들이 3만 명 정도 모여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성립 불가능해 보이는 하워드의 구상은 지속 불가능하다고 본 듯하다. 하워드는 선의를 가지고 등 떠밀려 전원을 떠났던 사람들에게 전원을 돌려주려 하였을런지 몰라도, 전원도시는 결국 기업이 수동적인 노동자를 관리하는 구역일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존중하지 못한 탓에 지속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듯하다.

탈집중론자들(Decentrist)의 ‘전원도시’, ‘빛나는 도시’, 기념비적인 도시’가 반도시적인 정통 도시계획이 되다

저자는 하워드의 구상을 “도시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구상”[41쪽]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이 구상이 1920년대의 미국에서 이른바 탈집중론자들(Decentrist)이라고 이름 붙여진 지역계획가들에 의하여 열렬하게 수용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가 보기에 1920년대 미국의 일부 헌신적인 지역계획가들에게는 “미국 인구가 노령화되는 동시에 안정화될 것처럼 보였고, 따라서 이제는 급속하게 증가하는 인구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정적인 인구를 재분산 하는 것이 문제인 듯 보였다”[42쪽]고 한다. 이들의 계획은 직접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고 저자는 평가하였다.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2쪽]고 단정하였다. 그 대신 이들의 계획은 “도시계획 및 주택 공급 재원에 영향을 미치는 입법”[42쪽]에 영향을 주었다고 저자는 보았다. 탈집중론자들의 구상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을 배정하고 민간의 투자를 일으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입법이 그럴듯해 보이도록 꾸미는 도구로 사용되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듯 탈집중론자들의 구상이 법 꾸미기에 동원된 결실이 주택단지라고 보았다. “가로는 사람을 위한 환경으로는 좋지 않은 것이며, 주택은 가로를 등지고 안쪽, 즉 안전하게 감춰진 잔디밭을 바라봐야 한다. …… 도시설계의 기본 단위는 가로가 아니라 블록, 더 정확히는 슈퍼블록이다. 상업은 주거지 및 녹지와 분리되어야 한다. …… 훌륭한 도시계획은 적어도 고립감이나 교외의 사생활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43쪽] 달리 설명하자면 이러한 주택단지는 넓은 뒷마당을 갖춘 집들로 가지런히 채워져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슈퍼블록들의 조합이다.

저자는 1920년대에 발생한 이러한 주택단지 계획을 반反도시계획이라고 하였고, 이것이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통 도시계획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는데, 그 중간단계에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1920년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빛나는 도시(Radiant City)’를 꼽았다. “우리가 탄 빠른 자동차는 웅대한 마천루들 사이로 난 전용 고가도로를 탄다. 가까이 접근함에 따라 하늘을 배경으로 선 스물네 개의 마천루가 반복적으로 보인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 개별 구역의 가장자리에 도시 행정 건물들이 있고, 박물관과 대학 건물들이 이 공간을 에워싸고 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공원이다.”[45쪽] 이러한 르 코르뷔지에의 글을 보면 그가 생각하는 도시는 전원도시와 다른 듯도 하지만, 저자는 ‘빛나는 도시’가 ‘전원도시’의 “기본적 이미지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높은 밀도에 현실적으로 맞게 변경했다”[47쪽]고 보았다. 저자는 르 코르뷔지에의 계획이 자동차를 위한 도시계획이기도 하였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전원도시’에서 시작하여 ‘빛나는 도시’가 제안되면서 수정된 도시계획 구상에서 “재건축 기법은 대부분 어떻게 하면 많은 노후한 건물을 그냥 놔두면서도 그 지역을 ‘빛나는 전원도시’의 적당한 버전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눈속임”[48쪽]이라고 적었다.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전원도시와 탈집중론자들의 구상이 거주자에게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안락함을 주었을런지는 몰라도 그것이 ‘진정한’ 도시생활을 아니라는 것이고, 르 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는 도시전체가 공원같은 느낌을 주지만, 자동차와 도로가 도시의 중심이 되면서 개개인들은 전원도시 이상으로 고립되어, 이 역시 상호 관계가 활발한 ‘진정한’ 대도시는 아닌 것이 된 것이다.

또한 저자는 1893년 시카고 컬럼버스 박람회(Columbian Exposition)의 박람회장 계획이 발단이 된 ‘도시 미화’운동의 목표였던 ‘기념비적인 도시(City Monumental)’가 “시카고의 근대 건축들을 냉대하고 그 대신 퇴행적인 르네상스적인 양식 모사를 극적으로 부각”[48쪽]시켰던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이런 경향에 따른 도시에서는 “기념물들이 도시의 나머지 지역과 구별되고 가능한 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한곳에 모아졌으며, 독립적이고 명확한 방식으로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단위로 간주되었다”[49쪽]고 지적하면서, 이렇듯 ‘기념비적 중심부(Center Monumental)’를 가지게 된 도시들에서는 “중심부를 둘러싼 평범한 도시가 향상 되기는커녕 황폐해졌고, 어울리지 않게도 중심부의 가장자리는 초라한 문신점(tatoo parlor)이나 중고 옷가게들이 늘어서거나 아니면 형언할 수 없이 쇠락하곤 했다.”[49쪽]고 적었다.

저자는 ‘기념비적인 도시(City Monumental)’를 목표로 삼는 ‘도시 미화’가 ‘전원도시’, ‘빛나는 도시’ 등과 어깨동무를 한 것을 정통 도시계획이라고 하고, 그것이 만들어 낸 ‘빛나는 전원도시 미화(Radiant Garden City Beautiful)’의 일례로, 뉴욕의 거대한 링컨스퀘어 프로젝트에서는 “기념비적인 ‘도시 미화’ 문화센터와 나란히 일련의 ‘빛나는 도시’와 ‘빛나는 전원도시’ 주택, 쇼핑센터, 대학센터 등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50쪽] 썼다.

기념비적인 도시는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무상으로 제공하고, 시민에게 자부심과 문화 향유, 교육 향유의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도시가 사람들에게 ‘중심’을 존중하도록 만든다고 우려한 듯하다. 그러한 문화적 정신적 압박은 미세하게라도 개개인의 상상력과 정신적 유연성을 저해할 것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위기의 징후로 보이는데, 저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욕망, 관계, 다양성 ; 기념비적인 도시는 다양하면서 다양하지 않다

‘전원도시’, ‘빛나는 도시’, 기념비적인 도시’의 구상을 따라가다 보면, 그 구상들이 빚어내는 도시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만하다는 생각이 들고, 이 구상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자칫 억지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저자의 글을 주요 개념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서, 저자가 그 구상들에 대하여 ‘정통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면서 경멸하다시피 한 이유를 제시하여 보겠다.

교외주택단지는 대도시의 얽히고설키고 다면적인 문화생활을 누리에는 너무나 정적이다. 도시의 문제란 하나의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진출처 : David Dixon https://www.geograph.org.uk/photo/5048848
교외주택단지는 대도시의 얽히고설키고 다면적인 문화생활을 누리에는 너무나 정적이다. 도시의 문제란 하나의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진출처 : David Dixon

첫째, 저자는, 정통 도시계획과 그것의 명분이 되어준 하워드의 전원도시 구상에 선의가 깃들어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을 수동적 수용적 존재로만 보며 도구화하는 틀로 작동하게 된다고 본 듯하다. 하워드의 전원도시가 정적이라고 한 저자의 평가에 이러한 인식의 단초가 이미 드러나 있다. 빛나는 도시에 이르면 사람들은 공원화된 도시 속 수직상승한 건물의 한 칸을 차지하며 프라이버시를 보장받는 동시에 공원과 빛나는 경관을 누리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하게 허용된 것은 아마도 재충전일 것이다. 그에게는 그가 가지고 있는 다양하며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욕망 가운데 하나만이 허락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재충전 후 다시 이어지는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욕망이다. 선의의 간섭이 작동하는 모범 기업도시는 대도시의 얽히고 설킨 다면적인 문화생활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탈중심론적 도시계획의 기본 단위인 슈퍼블록과 ‘빛나는 도시’의 각종 도로 그리고 자동차 문화는 인간이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지나치게 소홀히 한 발상이다. 1960년대의 미국인들은 더했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도, 자동차는 생활필수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동차의 효용을 높이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각종 도로와 도시구획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삶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게 떠오른 장애물인 듯하다. 자동차나 도로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들이 관계를 가로막는 부수적 피해를 발생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셋째, 정통 도시계획은 다양성을 충분히 허용하지 않는다. 기념비적인 도시의 예라고 볼 수 있는 뉴욕은 다양한 인종이 함께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도시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바탕에 깔려있는 가치가 과연 다양할까? 19세기 말 영국 전원의 자급자족적 소도시에서마저 기업에 의한 선의의 간섭이 행하여지는 재충전 기계의 징후를 감지하였던 저자라면, 뉴욕을 가치의 면에서는 정적인 도시, 경직되어있는 도시라고 할 것이다. 뉴욕 거리의 벽면들을 뒤덮고 뉴욕 사람들의 귀를 24시간 두드리다시피 하는 상업광고들을 관통하는 가치는 복잡하지 않다. 1960년대에 이미 사람들은 정보를 얻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여가를 즐기기 위하여 매스미디어를 향유한다고 생각했지만, 자본은 상업광고를 위하여 매스미디어를 이용했다. 지금은 매스미디어의 자리에 소셜 네트워크를 넣어도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다. 더 근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30년대에 독일의 전체주의자들은, 전국민에게 라디오를 보급하고, 꽤 비싼 돈을 주고 표를 사야만 연주회장에서 들을 수 있었던 고전음악을 방송하여서 호평을 받았지만, 그 기계를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와 상업광고는 모두 가치의 다양성을 은밀하면서도 강력하게 퇴색시킨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기념비적 도시 뉴욕은 대단히 다양하면서도 절대적으로 다양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예외적인 것이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어떤 위기를 앞장서서 돌파하는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 속에 다양한 예외와 일탈과 비주류를 적절히 품지 못하게 하는 경직성은 위기의 징후라 할 수 있다.

‘전원도시’, ‘빛나는 도시’, 기념비적인 도시’를 선망하며 질주해 온 발걸음을 잠시 멈추다

정통 도시계획의 문제점을 넘어서기 위하여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를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주거지역이라고 할 때, 그곳에 살림집만 있지 않고, 다양한 용도의 건물들이 함께 섞여 있어야 한다. 이는 재난지원금을 지역화폐로 받아 동네의 소상공인들의 가게에 가서 써보려고 하였을 때 그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던 제안이라 할 수 있겠다. 온라인 쇼핑이나 대형 양판점[마트] 대신 동네 각종 가게에 가보면서, 동네에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게나 관계가 거의 소멸 직전이었음을 새삼 느낀 사람도 적지 않을 듯하다. 저자는 보스턴의 노스엔드(North End)를 예로 들어, 지역 내 관계가 형성되면, 대규모 예산이나 투자가 투입되지 않아도, 지역 내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지역의 생활 편의나 위생상태가 개선될 수 있음을 예증하였다. 저자는 또한, 모퉁이가 많이 생기고 건물이 거리와 접하는 면이 많아지도록 작은 블록을 많이 만들면 관계가 촉진되고 다양성이 증진된다고 주장하였다. 저자는 각기 다른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 혼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이렇듯 지역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지역읠문제를 개선해나갈 수 있다면, 시민은 국가나 자본으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으며 국가나 자본도 자신의 힘을 힘의 적용이 필요한 다른 분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 같다.

저자는 인구를 충분히 집중시킬 것을 권한다. 이는 전원도시와 상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높은 인구밀도로 불편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권고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대도시의 얽히고설키고 다면적인 문화생활”이 가지는 가치를 일관되게 강조하였음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넓은 뒷마당을 가진 살림집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주택단지보다 각양각색의 욕망들을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를 증진시키고, 다양한 존재들을 관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리라는 저자의 기대를,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전원도시’, ‘빛나는 도시’, 기념비적인 도시’를 선망하며 질주해 온 사람들에게, 이 책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하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내 책장을 덮고 질주 모드로 돌아설 것이고, 어떤 사람은, 소외의 느낌을 받으면서도, 다시는 질주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조차도,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는 세계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저자의 현장이었던 미국과 각자가 속한 사회·역사·지리적 배경의 현격한 차이에 비추어 볼 때,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따르기 어렵다는 생각을 독서과정의 여러 시점에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곳곳에서,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도시계획가들과 건축가들이 품었던 이상이, 각자가 그러한 이상을 품게 된 경로에 대하여 철저히 성찰하지 않은 결과 가지게 된 환상임을, 그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듯한 장면을 만나게 되는 것은, 이 책의 대단한 미덕인 듯하다. 그런 장면들은 ‘자신의 환상에 대해서 제대로 성찰하지도 못하면서 남의 비싼 부동산에 관하여 저토록 쉽게 말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게 하다가, ‘그럼 나는?’ 하는 생각도 들게 하였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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