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 인간’은 허상일 뿐, 우리는 상호의존적인 존재 – 『돌봄선언』을 읽고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의존성을 나약함과 병적인 것으로 치부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의존을 병적인 면과 연결하는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멈추어야 한다. 우리의 존재가 상호의존을 통해 그리고 상호의존에 의해 다양한 제각각의 모습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돌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역량이다. 이 능력은 이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 사람과 생물체들이 번성하고, 지구도 함께 번성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사회적 물질적 정서적 조건을 마련한다. 나는 유치원에서 집에서 또 다른 어느 곳에서 정동을 함께하는 사람, 공간, 시간, 물질 등으로부터 보살핌을 받는다. 특히 정동덩어리들인 아이들에게 받는 돌봄으로 행복한 선생님, 부모, 가족, 이웃,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왔다. 아이들이 나를 사랑해주는 에너지로 정동으로 고단한 교사의 삶, 엄마의 삶, 인간으로서 삶을 회복하는 탄력성을 키울 수 있었다. 돌봄에 얽혀있는 존재로서, 삶을 사랑하는 선순환을 체험하기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일도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몸짓이라 생각한다.

더 케어 컬렉티브 저, 『돌봄 선언』 (니케북스 , 2021)
더 케어 컬렉티브 저, 『돌봄 선언』 (니케북스 , 2021)

요즘, 직위가 바뀌면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형식적인 구분과 사회적 질서를 따르기 위해 이제 직접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서 조금 더 공동체를 돌보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였던 삶에서 외롭게 혼자 고군분투해야 하는 관리자로서 삶으로 위치의 변화는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유아를 교육하는 선생님의 이야기, 유아를 보살피는 학부모의 이야기, 유치원을 관리하는 원장선생님의 이야기, 유치원의 행정을 지원하는 교직원들의 이야기, 대행자(agency)로 원감의 역할을 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졌다. 때론 나의 기다림과 배려가 전문적이지 않아 보인다. 귀 기울이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이고 의존적으로 보여지는 것에 적잖이 불편하기도 하다. 기다림의 의존성은 기술공학적인 처방으로 유능하게 보이는 전문성과 여러 가지로 어울리지 않는다. 독립적이지 않아 무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공동체를 돌보는 것에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요즘 더케어 컬렉티브1의 『돌봄 선언』은 나에게 ‘우리는 모두 돌봄이 필요함’을 자각하게 한다.

독립적 인간이라는 허상, 인간은 모두 상호의존적으로 얽혀있는 존재

나에게 자문한다. ‘의존하는 사람’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나약함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하지는 않았는가? 아이를 사랑하지만 교육을 하는 교사로서 ‘독립적인 인간’은 마땅히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상이 아닌가? ‘독립적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적이지 않은 상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역량이라고 생각했다. 한번 더 묻고 놀라며 답을 발견한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스스로 자신을 살피고 극복하는 독립적인 인간상’이 교육이 추구하는 인간상과도 맥을 함께하는데, 왜 나는 ‘독립적인 인간’에 긍정적인 이미지만을 부여했을까? 다시 말해, 나는 왜 의존을 나약한 것으로 여겼을까? 답은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로 귀결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상적인 시민이란 자율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실패를 모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의 승승장구는 복지국가의 해체, 그리고 민주적 제도와 시민 참여의 와해를 정당화한다. 돌봄이 개인에게 달린 문제라는 생각은 우리의 상호취약성과 상호연결성을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30쪽

장애인 인권운동가들은 ‘독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독립된 삶은 우리가 모든 일을 혼자 하기를 원한다거나, 다른 사람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거나, 고립되어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립된 삶은 비장애인 형제자매, 이웃, 친구들이 당연시하는 선택과 통제권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동등하게 갖기를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61쪽

즉 ‘독립’이란 모두에게 돌봄이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것을 전제한다. 그 돌봄으로 딛고 자율성을 표출할 수 있는 상태를 이야기한다. 이는 장애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누구든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플 때, 외로울 때 타인에게 받은 돌봄은 건강과 안식처로 나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다시 타인과 어우러져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즉 아픈 것도, 외로운 것도 혼자 해결해 내는 것만이 독립적인 것은 아니다.

돌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인지하고 포용하는 것

돌봄은 모든 곳에서 언제나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상황에서 상호의존적이다.
사진 출처 : Helena Lopes  https://unsplash.com/photos/PGnqT0rXWLs
돌봄은 모든 곳에서 언제나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상황에서 상호의존적이다.
사진 출처 : Helena Lopes

상호의존의 정치학을 이야기하는 『돌봄선언』을 읽으며 서로에게 의존하며 생존한다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동시에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의존성을 나약함과 병적인 것으로 치부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의존을 병적인 면과 연결하는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멈추어야 한다. 우리의 존재가 상호의존을 통해 그리고 상호의존에 의해 다양한 제각각의 모습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진정성있게 돌보는 정치를 구상하려면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타인에게 달려 있음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돌봄은 모든 곳에서 언제나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상황에서 상호의존적이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돌봄의 양면성도 있다. 돌보는 정치는 이런 상호의존과 그것이 발생시키는 딜레마와 불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돌봄의 상호의존적인 결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린 서로의 필연적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공유하는 의존성이 내포하는 어려움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실천으로 열린다. 사회적 활동으로 연결된다.

“’돌봄’은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다. 무엇보다도 돌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인지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17쪽

책에서 선언한다. ‘돌봄’은 누군가를 직접 보살피는 것, 타인에게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도움을 직접 제공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돌봄은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임을. 돌봄은 직접적인 돌봄 제공에서부터 교사가 제공하는 돌봄, 필수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 성격의 돌봄, 구입하기에는 부담되는 물건들을 대여해주는 공공 도서관인 사물도서관, 협동조합 형태의 대안경제나 연대경제, 주거 비용을 낮추는 정책들, 화석 연료의 감축과 녹지 공간 확대를 위해 일하는 환경 활동가들이 제공하는 돌봄까지를 모두 포함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실천적 돌봄으로 연결됨을 보여준다.

‘돌봄선언’에서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돌봄’을 평가절하하고 착취했는지 드러내 준다. 돌봄은 개인적인 것, 가족적인 것, 여성의 일, 희생적인 것이었음을. 그 결과 사회적 무관심이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게 되었음을. 이 같은 시스템은 저신뢰 사회, 배타적 공동체로 배치를 바꾸고 있다. 이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시민의 안녕이 우선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슬픈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돌봄이란 개인의 이타심이나 도덕심에만 맡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시혜적 제도로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모두 누군가에게 돌봄을 제공하고, 또 제공 받아야 한다. 주기별로 상황별로 돌봄이 필요한 경우는 제각각이다. 내가 타인에게 돌봄을 제공해야 할경우 역시 제각각이다. 때문에 돌봄 문제를 공동체가 함께 짊어지지 않는다면 개인에겐 큰 부담과 압박이, 자본에겐 좋은 상품이 된다.

돌봄 개념의 확장, ‘난잡한 돌봄

우리는 너무 많은 돌봄 요구를 오랫동안 ‘시장(여성)’과 ‘가족(어머니)’에 의존하여 해결해왔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그 의미의 범주가 훨씬 넓은 돌봄 개념을 만들 필요가 있다. ‘난잡한 돌봄’은 ‘보편적 돌봄’과 연결된 개념으로, 친족과 시장에 의한 돌봄이 아닌 ‘난잡하게 섞인 관계’, 확장된 관계에서의 돌봄이다.

“… 여러 사정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지 못할 수도 있고, 적절한 돌봄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난잡한 돌봄은 어머니와 아이 모두를 돌볼 수 있는 종류의 돌봄 관계를 늘려나갈 것이다. 난잡한 돌봄은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을 돌보는 것, 지역 공동체를 돌보는 것, 환경을 돌보는 것이 동등하게 가치 있는 일로서 적절한 자원과 보상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한다. … 이러한 돌봄은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없이 모든 것에 적용된다.”

82~86쪽

재난과 위기는 매번 우리 사회의 돌봄 공백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도 마찬가지다. 책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그러한 사회 공백을 채워주지 못함을 이야기하며, 위기 때마다 그 공백을 메꾼 건 사람들의 자발적 연대와 조직이었음을 설명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취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돌본 봉사단체와 지원자들이 난잡한 돌봄의 가장 친숙한 예가 될 수 있다. 봉사자들은 원조받는 이의 가족도, 가까운 지인도 아니지만 감염될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립된 이들의 집으로 찾아갔다. 물론 책에서는 돌봄이 제도적으로 자리 잡은 국가라면 시스템이 돌봄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난잡한 돌봄’도 보편적 돌봄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자원과 보상이 제공되어야 하고, 제도적 시스템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단체와 봉사자들의 돌봄을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만 바라보고 박수 보내는 것으로 끝낼 게 아니라, 정당하고 충분한 자원과 보상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난잡한 돌봄’들이 자연스레 생겨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와 먼 타인이라도 안전하게 돌봄을 제공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래야 ‘난잡한 돌봄’이 지속 가능할 수 있다.

돌봄의 부재와 저신뢰 사회

“​필요한 공유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 공동체가 그들의 지역성과 서비스를 설계하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 협력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심화하기 위해 국가와 지역 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돌봄 역량이 있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열쇠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심화된다는 것이다.”

109쪽

얼마 전 한국이 ‘초저신뢰 사회’라는 기사가 떴다.2 민주주의 사회는 신뢰를 바탕으로 돌아가는데, 현재 한국 사회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집단만 믿는, 파편화된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주류가 되는 것이 ‘초저신뢰 사회’의 모습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 체제는 유지될지언정, 민주주의적 태도는 우리 주변에서 무너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은 ‘돌봄선언’에서 돌봄의 시장화, 개인화에 따른 모순과 폐해라고 지적한 부분과 맥을 함께 한다. 친족과 시장에 맡겨진 돌봄 체제에선 내 관계만 돌보고 타자에는 무심해 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돌봄의 시장화 개인화로 공동체와 사회는 돌봄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진다. 나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게 당연해지는 사회에서 신뢰는 저하될 수밖에 없다. 나약함을 보살펴주지 않는 사회와 공동체에서 사회적 책임 의식과 연대 의식은 약해지는 것이 자명하다. ​개인화되고 무관심한 공동체, 민주주의 역량이 저하된 사회의 돌파구가 ‘보편적 돌봄’, ‘난잡한 돌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공유하는 의존성이 내포하는 어려움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사람의 돌봄 역량을 증진하는 기술과 자원의 가치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다. 저마다의 요구가 어떻게 다르든, 돌보는 사람이든 돌봄을 받는 사람이든, 이 두 위치의 호혜성을 인지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모두 돌봄을 제공하고 받아야 한다는 필요를 인지하는 것은 우리가 공통된 인류애를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우리 모두의 두려움을 ‘의존하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사람들에게 투영하는 대신 그 두려움에 맞서게 한다.”

62쪽

​나에게 가장 크게 남은 건, 난데없지만, 보편적 무상교육을 고민하고 글을 써야하는 상황에서 『돌봄선언』이 나에게 ‘말해야 한다’는 용기를 주었다. 심적으로 위로가 됐다. 그리고 나의 좁은 안목과 겁쟁이 같은 나약함을 인정하고 마주하며 돌보게 됐다. 의존과 나약함은 병적이고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본성이며 마땅히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어쩌면 당연하고 익숙한 말인데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돌봄이 필요하다.


  1. The Care Collective는 2017년 런던에서 학술 모임으로 시작한 단체, 오늘날 세계적으로 ‘돌봄(care)’dl 마주한 다면적이고 심각한 위기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각기 다른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은 개인적, 학술적, 정치적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또는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2. [나는 분노한다] “지금 한국은 초저신뢰 사회다” – 시사IN

서풍

나의 이름은 서화니이다. 나의 이름을 누군가 받아 적을 때, 환희, 하늬, 하니 등으로 받아 적어 적잖이 난감하다. 재미있는 별명을 생각하면서 난감했던 상황이 떠올라 하늬바람의 뜻인 서풍으로 정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하늬바람이 남풍도 동풍도 아닌 서풍이니, 우연이지만 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늬’는 뱃사람의 말로 서쪽이다. 따라서 하늬바람은 맑은 날 서쪽에서 부는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을 말한다. 습하고 무더운 ‘된마(동남풍)’에 상대되는 바람이다. 무더운 여름철에 부는 하늬바람은 말의 느낌만큼이나 실제로도 상쾌한 느낌을 주는 바람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상쾌한 느낌을 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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