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살아있다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면 – 『생동하는 물질』을 읽고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은 세계를 생동하는 물질의 관계망으로 파악한다. 비인간 생명, 비유기체 물질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자체적인 생기를 가지고 있고 인간은 그들과 함께 정치를 해나갈 수 있다. 그러한 저자의 생태정치학을 미국의 정치적 사례를 분석하는 데 적용하고, 사물과의 정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1. 탈인간중심주의 으뜸텍스트

제인 베넷 저, 『생동하는 물질』 (현실문화, 2020)
제인 베넷 저, 『생동하는 물질』 (현실문화, 2020)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을 우리의 인식 틀로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이 책을 세 번째 선정도서로 고른 생태철학 스터디에서 우리는 힘겨운 독서 후 텍스트의 소화를 시도했다. 펠릭스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의 구분법을 적용해보자면, 아마 환경관리주의에는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만을 권력을 가진 행위자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사회생태주의까지 뻗어갈 수는 있겠다. 물질이 생동한다면, 그러니까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한 영화의 제목처럼 물질이 살아난다면, 그들을 사회의 정치 파트너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생태정치학’은 그러한 전제에서 책의 후반부에 제시되는 내용이다. 저자는 존 듀이와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을 살펴보며 비인간 생물에서 사물에까지 이르는 생태정치의 이론적 가능성을 마련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특정 사안이나 문제에 관련된 모든 신체들이 연합하여, 지각되는 것의 영역으로 배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먼저, 사물이 과연 그럴만한 힘과 지위를 가진 것인지에 대한 진지하고 지난한 숙고가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중심주의라는 협소한 틀을 시원하게 열어젖히는 과제가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마음을 개조하는 근본생태주의 작업이 맞다.

2. ‘물질복잡한 물질구도의 존재론

저자는 서구의 철학적 전통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생기적 유물론’을 주장한다. 그가 의지하는 전통은 들뢰즈가 부가된 스피노자의 존재론이고, 칸트로부터 뻗어나간 생기론이다. ‘인간은 생명이다’라는 상식적인 전제에서부터 논의를 출발하자. 무엇이 인간을 생명으로 만드는가? 이에 대한 대부분의 답은 ‘죽어있는’ 물질과의 대비를 통해 도출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자신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스피노자의 ‘코나투스’) 또는 성향은 물질에게도 있고,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식은 (오늘날에 한층 부각되는) 기계에도 있으며, 잠재된 것이 새로 창조되는 성질(베르그송의 ‘생의 약동’)은 심지어 금속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물질은 생동한다. 그리고 인간은 생동하는 복잡한 물질이다. 생명체를 이루는(스피노자의 ‘양태’ 개념에 해당되는) 가장 작은 것들은 서로와 결합하여 유지되지만, 동시에 서로와 반발하며 변용되는 ‘정동적 신체’이다. 또한 분산된 행위성을 띠는, 연합한 신체들의 ‘배치’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인간 한 개체만 보더라도, 개인은 팔꿈치 한 쪽에 여섯 종류 이상의 박테리아를 가지고 있고, 장내 세균총의 도움을 받아 음식물을 소화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이종(異種)적인 존재가 되어야함을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에서 1985년 선언했지만, 이 책은 유기체와 비생명 물질이 시대와 상관없이 애초부터 결속되어 있음을 설명한다.

인간은 존재들의 최고 꼭대기에 거주하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세계의 밑바닥에서부터 지도를 그려본다면, 다윈의 ‘생명의 나무’는 리좀(뿌리줄기)을 눕혀 놓은 듯한1 평평한 하나의 레이어에 불과하다. 다른 한편 사물은 언제나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 바깥에 있다는 회의가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존재의 관계망의 일부로서 물질적 세계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 생각의 초점을 멈춰 있는 정지 구도가 아닌 하나의 사건이나 행위에 맞춘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촘촘한 관계망이 더 쉽게 인식될 수 있다. 저자는 ‘2003년 북아메리카 대규모 정전’을 사례로 들고, 그 사건을 창발시킨 행위소인 전기, 송전망 등등을 다른 인간 책임자와 함께 소환하여 책임을 묻는다.

3. 생기 전쟁과 사물과의 연정(聯政)

인간은 존재의 관계망의 일부로서 물질적 세계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 사진출처 : Louis Maniquet  https://unsplash.com/photos/71QXQUSC_Do
인간은 존재의 관계망의 일부로서 물질적 세계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 사진출처 : Louis Maniquet

생기적 유물론은 기존의 정치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판단하게 한다. 저자가 예시로 들었던, 미국 부시 정권 시기의 임신중절금지와 배아 줄기세포 연구지원 중단 사례를 살펴보자. 두 사례에서 인간의 생명은 신성한 것으로 취급된다. 문제는 생명력을 잠재성, 만능성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여 생명체들을 위계 짓는 것에 있다. 그것은 태아와 배아만을 절대적 생명체로 승격시키고 다른 행위소를 격하하여 배제시킨다. 이를테면 임신한 여성과 공공적인 돌봄 영역이 취약한 사회구조는 덜 생명인 것(더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도 생명이다’, ‘배아도 생명이다’는 주장은 대체로 반(反)생명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진다. 생명체들은 각기 다른 정도의 생기(生氣)를 보유하고, 더 많은 생기를 가진 존재는 더 존엄하다는 논리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는 부시에 의해 ‘생기 전쟁’으로 칭해진 이라크 전쟁과도 연관된다. 저자에 의해 21세기 ‘생명문화’(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와로마 카톨릭 세력)는 ‘영적 생기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 지적된다. 이는 20세기에 나치가 드리슈의 ‘비판적 생기론’을 민족우월주의에 악용했던 전력과 겹쳐진다. 생명을 우선시하는 입장이 차별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음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생태정치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비인간 생물은 물론이고 사물을 정치적 공론장에 초대하는 것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랑시에르에 따르면, 지각되지 않는 것을 지각될 수 있도록 감성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이다. 어떠한 사건과 행위에 관련된 사물들을 권력을 가진 행위소로 파악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지, ‘사람이 먼저다’ 류의 문구가 강하게 호소되는 정치 환경에서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 같다. 매끼 때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묻는 불교의 식사게송과, 유교의 ‘격물치지(格物致知)’ 그리고 천도교 삼경사상의 경물(敬物)이 생동하는 물질과의 연결되는 법을 직관적으로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짐작할 뿐이다.


배선우

그동안 썼던 별명들은 한때의 나를 잘 설명해줬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또 다른 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격언을 실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의미를 추구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분간은 지구를 횡단하며 ‘생활철학자’라는 직함으로, 살고 싶은 길, 살아가야 할 길을 궁리하려고 합니다. 잘 살기 위해 책을 읽고, 주로 서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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