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추앙이 뭐길래 –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사랑만으로는 안돼, 날 추앙해.” 추앙과 해방이라는 단어로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이 드라마를 보며 서사가 잘 녹아든 언어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추앙’이나 ‘해방’ 같은 딱딱한 단어들이 거부감없이 시청자들에게 잘 어필했던 것처럼, 지금의 기후운동이 좀더 대중성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두 달 전에 종영된 《나의 해방일지》란 드라마를 인상 깊게 봤다. 잔인하지도 선정적이지도 않은 드라마를 볼 수 있다니. 오랜만에 본방사수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드라마는 경기도 시골의 풍경이 남아있는, 한 외곽지역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삼남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미정이는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 자주 오지 않는 마을버스이기에 그 시간을 맞추려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고 뛴다. 그렇게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전철을 타며 힘겹게 서울로 출퇴근한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 대출을 받아 돈을 빌려주었고 그가 돈을 갚지 않아, 많지도 않은 계약직의 한정된 월급은 그마저도 은행 대출이자로 족족 빠져나가고 만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취미로 무언가를 배워보려고 해도 더디고 뒤처지기만 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표정한 미정이. 세상의 온갖 소음이 시끄러운 미정이.

그런 미정이의 눈에 어느 날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가 홀로 운영하는 작은 싱크대 공장에 일하는, 이름도 모르는 ‘구씨’라고 불리는 옆집 남자는 그녀처럼 말이 없다. 땀 흘리며 소처럼 일만 한다. 그리고 매일 소주를 마신다. 지나칠 정도로 많이. 미정이는 자신보다 더 무기력해 보이는 그 남자에게 뜬금없이 ‘자신을 추앙하라고’ 한다. ‘사랑만으로는 안돼, 날 추앙해’ 드라마는 이때부터 시청률이 급증하며 빵 터졌다.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포스터. 연출 김석윤, 극본 박해영. 방송기간 : 2022년 4월 9일 ~ 2022년 5월 29일.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포스터. 연출 김석윤, 극본 박해영. 방송기간 : 2022년 4월 9일 ~ 2022년 5월 29일.

아니 대체 추앙이 뭐야. 네티즌들은 ‘추앙’이란 단어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미정이가 말하는 그 ‘추앙’이 대체 뭐길래 ‘추앙’을 추앙하는 수많은 밈이 나오게 된 걸까. 이젠 ‘해방’과 ‘추앙’이란 단어가 상업 광고에까지 등장하다니. 각본, 연출, 연기, 음악과 미술까지 모두 좋았지만, 사실 내 관심은 다른 곳에 더 있었다. 사람들이 대체 어느 지점에서 열렬히 호응하는지 궁금했다.

SNS는 난리가 났다. 드라마를 해석하는 온갖 채널이 등장했고, 조회수는 백만이 넘어가는 게 많았고, 댓글의 수도 폭발적이었다. 아니, 이런 댓글들은 인터넷에 나올법한 내용이 아닌데? 아,음, 이상하네… 이건 예전에 내가 교회에서 하기도 하고, 듣기도 했던 간증시간에 나올 법한 말들이 아닌던가. 빙산의 일각인 댓글의 일부를 소환해 본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 환대하기… 누구라도… 그럼 해방을 맞이하리” – 들X쌤

“심리상담도 받고 병원다니며 2년 가까이 지긋지긋한 우울감에 갇혀 살았는데 ‘환대해’ 한 마디가 저를 더 크게 위로해 주네요… 저도 저를 찾아오는 그 사람들 반갑게 후하게 맞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 Vxxx Gxx

“이젠 제가 제 인생에 해방을 해볼게요” – 윤xx

“인간을 갱생시킨다는 오만함이 없는 드라마. 서로를 추앙하고 그 추앙으로 나 스스로가 충만해져 조금씩 해방으로 가는 길” -nnnxxx

“어쩌면 우린 나 자신을 사랑해주지 못해서 해방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각박한 회색도시에 사랑을 품은 사람이 되길… 그런 희망을 품게 되네요 ㅎㅎ” -큌xx

“인간을 갱생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추앙하는 자세~” – Kxx

무수한 댓글 중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이 드라마의 일등공신이자, 사랑이란 진부한 표현을 대신한 ‘추앙’이 아니다. 나의 눈길을 고정시킨 단어는 ‘갱생’이었다. 갱생시키려 하지 않는 드라마가 사람들을 갱생시키고 있었다. 아주 폭발적으로. 손수건 한 장 준비하고 유튜브 댓글을 읽어야 할 정도이다. 아니 네티즌들이 이렇게 따스한 사람들이었다고? 여기에서 막 이렇게 회개하고, 간증하고 이래도 되는 거야?

댓글을 유심히 보게 된 계기가 있다. 최근에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내 딴에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인터뷰한다고 생각했다. 생태인문서점을 운영했었던 경험이 담긴 그 인터뷰의 첫 번째로 달린 댓글은 이랬다. ‘생태서점이라고 하니까, 생태탕이 생각나네!’ 였다. 참으로 신선하게? 비아냥거린 그 댓글의 반응은 관리자에 의해 바로 블라인드 처리가 되었다. 에피소드로 두고두고 잘 써먹어야 하는데 순발력 있게 캡처하지 못한 게 좀 아쉽다.

다시 드라마도 돌아가 보자. 드라마에서 미정이는 사랑 아니 추앙하게 된 알콜중독자이자 나이트클럽의 주먹꾼인 구씨를 갱생시키려 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갱생의 다른 버전을 택한 것일 수도 있겠다. 미정이는 구씨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고, 지지해준다. 술을 끊으라는 말을 하는 대신, 소주를 사다 주고 같이 마셔준다. 드라마의 끝부분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갱생되어가는 구씨는 자신을 배신한 지인에게 용서한다는 말 대신 ‘환대’하겠다고 말한다. 조금은 억지스러운 대사라고 느껴졌지만 이미 시청자들은 갱생시키려 하지 않는 이 드라마에 흠뻑 빠져 억지스러운 ‘환대’에 태클을 걸지 않는다.

지금 기후운동은 대중과 잘 소통하고 있는 걸까. 과거 운동권식 운동이나 혹은 대중을 꾸짖는 내용으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사진출처 : Icons8 Team
지금 기후운동은 대중과 잘 소통하고 있는 걸까. 과거 운동권식 운동이나 혹은 대중을 꾸짖는 내용으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사진출처 : Icons8 Team

지금 기후운동은 대중과 잘 소통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비슷한 정서와 가치관을 갖은 이들끼리만 결속을 다지는 과거의 운동권식 운동을 하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운동이 그렇지만 특히나 환경과 관련된 운동들은 대체로 꾸짖는 내용이 많다. 물론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고,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인간이 비인간 동물과 비교해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서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잘하는 일부 종교에 재산과 노동,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 인간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서사와 서사의 주재료인 단어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집단지성이 주목된다. 이제 전문가가 자신의 지식만으로 차별화를 두기 어려울 정도로 열린 지식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지식’이나 ‘계몽’에 이제 잘 반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발 심리를 일으키는 확률이 더 높다.

한때 아름다웠던 단어는 여러 경로를 거쳐 오염되었다. 나를 갱생시키려는 그 ‘단어들의 조합’만 보면 꼴도 보기 싫다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런 서사와 단어가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닐까? 아직 잘 모르겠다. 더 깊게 생각해 봐야겠다. 정답이 없을 수도 있겠다. 하나의 운동방식이란 건 없으니까. 각자 자신이 배운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일 테니까.

최근에 나는 왠지 나의 방식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업에서 쓰는 용어와 서사들이 어떤지 살펴봐야겠다. 두려움과 진부함만 가득 찬 단어는 거리를 두고 싶다. “사람들이 쾌(快)가 있어야 드라마를 보지 않을까요? 어떤 장르든 쾌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주야장천 심각한 상황만 펼쳐진다면 보는 사람도 쓰는 저도 답답합니다”라고 했던 박해영 작가의 인터뷰 글을 보며 내 안의 쾌, 사람들의 쾌는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아니, 이건 생각해서 나올 수는 없는 법이지. 일단 바다에 가서 파도에 풍덩! 쾌를 느껴야 쾌가 나온다.

벌똥

하고 싶은 것을 미루며 살고 싶지 않아 5평짜리 생태인문 서점 에코슬로우를 열었다. 책방에서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은 낙관적인 시선을 갖게 되었다. 산책하고, 텃밭을 가꾸고,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고, 읽고 쓰는 삶을 계속하고 싶다. 최근에 불교를 만나고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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