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사랑하기 – 한병철 『리추얼의 종말』 독후기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오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시간을 아주아주 많이 거슬러 올라가면, 의례 즉 리추얼이 일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그때도 그것은 돈이 많이 드는 부담스런 의무였다. 이런 부담때문에라도, 리추얼은 점차 소멸되는 중이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리추얼의 종말』은 리추얼을 지금의 세계의 핵심의 대척점에 놓았다.

‘모든 것이 노동과 생산과 성과로 된 사회’에 직면한 한병철

한병철(지음), 전대호(옮김), 『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김영사, 2021)
한병철(지음), 전대호(옮김), 『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김영사, 2021)

역병의 대유행이 있기 전인 2018년,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김영사, 2021] 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Vom Verschwinden der Rituale ; Eine Topologie der Gegenwart』이다. 부족한 독일어 독해 능력을 곤두세워 이를 직역하여 보았더니, 대략 ‘의례가 점차 사라져감에 관하여 ; 지금 내가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리매김해 보다’ 정도가 되었다. 저자는 ‘지금 내가 마주 대하고 있는 것’ 달리 말하자면 현존이라는 말을, 지향해야 할 목표 내지는 바람직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말하는 현존은, 굳이 개념 정의를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대단히 강력하게 의식화되어있지만, 별 생각 없이 계속 그 속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종합적으로 아프게 만드는 어떤 상태인 듯하다. 〈들어가는 말〉에서 한병철은, 책의 목표 세 개를 제시하였다; (1) “리추얼이 소멸해간 역사를 …… 간략히 서술.” (2) “공동체의 침식을 뚜렷이 드러낼 것.” (3) “사회를 집단적 나르시시즘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법한 다른 삶꼴(Lebensform)들을 숙고.” [7쪽] 20세기 초 일부 독일지식인들은 미국과 독일을 ‘모든 것이 관리되는 사회’라고 설명했었다.

21세기 초 한병철은 세계를 ‘모든 것이 노동과 생산과 성과로 된 사회’로 설명했다. 한병철은 그런 세계에서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리추얼의 약화이며, 공동체의 침식이 그것과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나르시시즘이 그 바탕에 깔려있는 동시에 깰 수 없는 표피로 덮여있다고 쓰면서, ‘다른 삶꼴(Lebensform)들’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그저 함께 숙고해 볼 계기를 제기하겠다고 겸손하게 말한 셈이다.

리추얼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 양식화된 것

한병철은 리추얼을 “상징적인 집안에 들이기 기술” [9쪽]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더한다. “리추얼은 세계-안에-있음(In-der-Welt-Sein)을 집안에-있음(Zu-Hause-Sein)으로 변환한다. 리추얼은 세계를 안심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든다. …… 시간에 질서를 부여한다.” [9~10쪽] 이를 달리 설명한다면, 어떤 일을 정기적으로 행함으로써 삶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앞서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리추얼은 상징적 행위다. 리추얼은 공동체가 보유한 가치들과 질서들을 반영하고 전승한다. 리추얼은 소통 없는 공동체를 발생시킨다.” [8쪽] 소통 없는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어떤 행동방식이 이미 의식화되어 있어서 적어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 이상의 소통이 시급하지는 않은 상태의 공동체를 연상시킨다. 그래서인지 한병철은 “리추얼은 삶을 안정화한다”[10쪽]라고도 하고, 공손함이 리추얼 형식이라고 적기도 하였다. 공손함은 사람과 사물을 망라하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고 풀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풀이가 적절한 것이라면, 한병철에게 있어서 리추얼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 양식화된 것으로서 삶을 안정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공동체가 보유한 가치들과 질서들이 리추얼에 반영되어 있음으로써 전승이 쉬워진다는 주장도 가능해질 수 있을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리추얼은 삶에 뭔가 정해진 틀이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한국어 번역본의 부제인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대단히 탁월한 작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부제는 리추얼의 힘을 잃는 사회 속의 삶에 대한 한병철의 걱정을 잘 표현하여 주었다.

나르시시즘과 강제 생산은 완전성에 대한 환상에 기반한다

한편, 책을 읽다보면 정작 리추얼이 중요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책 앞 부분에서는 나르시시즘이 꽤 자주 언급된다. 책 앞 부분에 등장하여 책이 끝날 때까지 은근히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생산 강제다. 지금의 세계를 나르시시즘을 기반으로 설명하는 것은 유럽 사회과학의 관습이 되어버린 듯하고, 한병철 또한 나르시시즘이 ‘모든 것이 노동과 생산과 성과로 된 사회’의 바탕에 깔려있는 동시에 깰 수 없는 표피로 그 사회를 덮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한병철에게, 나르시시즘 달리 말하면 자기애는 세계가 파편화되는 원인이기도 하고 파편화된 세계를 지속 강화시키는 힘이기도 한 것으로 인식된 듯하다.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개체는 당연히 연대하지 못한다. 그 사회 속에서 개체들은 수행하는 노동의 능력과 강도에 의하여 비교 측정된다. 나르시시즘은 그런 개인이 노동과 생산 이외의 다른 것을 못 보게 만드는 자기애이다. 이런 자기애 속에 있으면 생산을 계속하게 하는 노동의 가치를 점차 더 높게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병철은 노동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논리는 강제 생산과 직결시킬 수 있다. 강제 생산은 과잉 생산의 유사어로 볼 수 있고, 과소비와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냥 강제 생산이라고 쓴 것이 적절하였던 것 같다. 한병철은 자기가 문제삼고 있는 세계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도록 만든다고 보았다. 한병철은 이 세계가 사람들이 생산을 잠시 쉬거나 그만두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비난하도록 되어있다고 본 것 같다. 한병철은 이 강제 생산을 꽤 직설적으로 거듭 강조한다. 이렇듯 생산 강제가 고착화된 사회에서는 리추얼 따위는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된다. 이에 비하여 중단없는 생산은 진정성 그 자체로 평가된다. 세계를 이렇게 파악하면서, 한병철은 형식으로써의 리추얼을 옹호한다.

한병철은 형식이 삶을 안정화시켜준다고 본다. 이는 앞에서 리추얼을 삶의 안정성과 결부시켜 논한 것과 부합한다. 한병철의 이러한 논리는 르네상스 미술에 보이는 양식화를 ‘위대한 형식주의’라고 평가했던 예술사가의 논리를 연상시킨다. 르네상스 시기의 제단화나 보이는 뻔함이나 한병철이 중시하는 리추얼의 뻔함은 이른바 창조성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평가절하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의 창조성은 그야말로 영원한 ‘까방권’을 가진 것인가? 한병철의 논리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세계에서 창조성은 상품성일 뿐이다. 지금 남한 사회에서 창조적이라는 칭찬을 받는 것들을 예로 들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뜯어보면,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고 사람들의 칭찬을 끌어내는 면은 결국 상품성이다. 그러니까, 역으로,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뻔한 것을 존중하고 따르는 리추얼은 창조성이라는 이름 아래 상품성을 높이려는 영업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상품을 파는 사람들은, 비난할 것이다.

나르시시즘과 강제 생산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은 사랑하기를 통하여 가능하다. 
사진출처 : Caroline Veronez
나르시시즘과 강제 생산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은 사랑하기를 통하여 가능하다.
사진출처 : Caroline Veronez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진정성 문화는 리추얼화된 상호작용 형식에 대한 불신과 짝을 이룬다.” [35쪽] 그는 자기가 문제삼은 세계에 “새로움에 대한 항구적인 강제” [20쪽]가 만연하고 있으며, 그것은 리추얼이 삶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면을 믿지 못하는 것과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리추얼과 강제 생산 사이의 긴장관계는, 강제 생산에 끝이 없다는 데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것 같다. 리추얼은, 그 자체로써 휴식이거나, 노동이나 생산의 잠정적 중단을 수반하는 것이다. 강제 생산은 노동을 신성시하면서 생산의 중단을 도덕적으로 비난한다. 그 세계에서는 도덕이 그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듯하다.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도덕은 자신의 완성을 위해 노동하는 영혼을, 개인을 전제한다. 자신의 도덕적인 길에서 더 많이 전진할수록, 개인은 더 많은 자존감을 노동의 성과로 획득한다.” [87쪽] 얼핏 보면 이는 도덕의 숭고함에 대한 찬양 같이 보이지만, 한병철은 이것을 강제 생산에 복무하는 도덕의 실체에 대한 설명으로 쓴 것이다. 그는 “공손함의 윤리(Ethik der Höhlichkeit)에는 이런 나르시시즘(Narcissism)적 내면성이 전혀 없다”[87쪽] 라고 이어갔다. 공손함의 윤리란 무엇일까? 앞서 그것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고 설명하였지만, 여기에서 그것을 보충하자면, 완전성에 대한 환상에서 빠져나오기 혹은 모두가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임을 인정하기를, 존중의 바탕에 깔아야 할 듯하다. 완전성과 항구성에 대한 믿음은 허약한 것이다. 이는 강제 생산과 표리관계를 이루는 남한의 과소비 기반 자본주의가 인구절벽 앞에서 패닉에 빠진 것을 통해서 엿볼 수 있을 듯하다.

결국은 사랑하기

여기에서 이야기가 사랑으로 연결된다면 엉뚱한 것일까? 전혀 엉뚱하지 않다. 이 책의 후반부는, 한병철이, 소크라테스의 말로 가득 찬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을 인용하면서, 나르시시즘과 강제 생산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은 사랑하기를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병철은 형식 vs. 진정성, 맞대결 vs. 드론 폭격, 신화 vs. 데이터주의, 유혹 vs. 포르노 등의 대비를 통하여 리추얼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와 강제 생산의 기구가 된 사회의 차이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사랑하기’로 집약할 수 있다.

『향연』은 소크라테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른바 ‘에로스란 무엇인가’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차례로 발표 토론하다가 막판에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의 견해를 소개하여 토론을 마무리한 과정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소개한 디오티마의 견해를 보면, 에로스는 완전성의 추구다. 그런데 완전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이미 완전하다면 나는 더 이상 뭔가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도들은 『향연』 속 소크라테스가 전하는 디오티마의 견해를 보고, 필로스[사랑] + 소피아[지혜] 곧 필로소피아[지혜사랑]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한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한병철은 ‘다른 삶꼴(Lebensform)들’을 숙고해 보겠다고 했다. 책의 후반부, 앞서 열거한 대비들을 읽으면서 한병철이 다른 삶꼴 하나는 제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사랑하기’ 같았다. 완성된 ‘사랑’이 아닌 ‘사랑하기’.

한병철이 제시한 대비들은 볼만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기호 곧 기표가 의미 곧 기의에 완전히 흡수되면, 언어는 모든 마법과 광채를 잃는다. 언어는 정보적이게 된다. 언어는 놀이하는 대신에 노동한다” [82쪽] 라는 말은, 타자들을 모두 인정하면서 그들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언어와, 생산성 높은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정보로써의 언어를 대비시켜 보여준다. 이 대비를 이해하면 다음 말이 이해될 수 있다. “기호의 제국은 또한 도덕적 기의 없이 작동한다. 법칙(Gesezt)이 아니라 규칙들(Regeln)이, 기의 없는 기표들이 그 제국을 지배한다. 리추얼 사회는 규칙 사회다.” [87쪽] 리추얼의 언어는 도덕적 내용으로 채워져있지 않은 규칙으로써의 언어인데 이것은 ‘공허’해 보일 수 있고 애매모호하다거나 비생산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지만, 한병철의 입장에서 그러한 지적은 강제 생산의 이념에 결박된 것일 뿐이다. “사회는 도덕화 경향이 강할수록 더 불손하다. 이런 형식없는 도덕에 맞서 아름다운 형식의 윤리는 방어해야 한다.” [90쪽] 한병철은 강제 생산과 함께하는 윤리는 폭력이라고 본 듯하다. 그는 중세의 결투 같은 맞대결(Zweikampf)과 드론 폭격을 대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근대적 전쟁은 놀이의 성격이 전혀 없다, 생산 강제가 놀이를 파괴한다는 기본 공식은 근대적 전쟁에도 적용된다. 근대전은 생산학살(Produktionsschlacht)이다.” [94쪽] “제국주의적 전쟁의 가장 참혹한 특징들은 한편으로 엄청난 생산수단과 다른 한편으로 그 수단이 생산과정에서 불충분하게 활동되는 것 사이의 간극을 통해(바꿔 말하면, 실업(失業)과 판매시장의 부족을 통해) 규정된다.” [95쪽] “전혀 다른 살상매체의 도입은 …… 전쟁 자체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95~96쪽] “드론전쟁에서 죽음은 기계적으로 생산된다. 드론 조종사들은 교대로 노동한다. 전직 미국 중앙정보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메타데이터에 기초해서 사람을 죽인다.” …… 드론 전쟁은 살인의 데이터주의(Datarismus)다.” [98쪽] 드론의 사용이 매스컴을 통하여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에, 이렇듯 한병철의 글들을 편집하여 열거하는 것만으로 그의 생각을 요약하여 전할 수 있는 것 같다. 또한 드론 사용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수 있다는 것은, 나르시시즘과 강제 생산에 사람들이 의식화가 고착되었다는 것, 모두의 불완전함과 불안함을 인정하면서 타자와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시사한다.

이밖에도, 한병철은 ”인간을 자율적 지식 생산자로 격상한 코페르니쿠스적-인간학적 전환이 데이터주의적 전환으로 대체되고 있다.” [106쪽] “데이터주의의 투명성 명령으로부터 모든 것을 데이터와 정보로, 바꿔 말해 가시적인 것으로 변환하라는 강제가 나온다. 이 강제는 생산(내보이기) 강제다.” [107쪽] “생산 강제는 놀이와 이야기가 들어설 공간을 파괴한다. 알고리즘적 계산 노동은 서사적이지 않고 단지 가산(加算)적이다. 따라서 그 노동은 임의로 가속할 수 있다. 반면에 사유는 가속을 허용하지 않는다.” [108쪽] 라고 하면서, 데이터가 사유를 대체한다고 한 후, “에로스가 없으면, 사유의 걸음은 계산의 걸음으로, 바꿔 말해 노동의 걸음은 계산의 걸음으로 전락한다. 바꿔 말해 노동의 걸음으로 전락한다. 계산은 벌거벗었다. 계산은 포르노적이다.” [108쪽] 라고 한다. 여기에서의 에로스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성을 지향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생산 강제는 완전성이 있다는 환상에 의지하고 있다. 이 에로스에 비하면 포르노가 성기를 다 노출시켜 보여주는 것은 완전성이 있다는 환상의 또다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적기도 하였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yical correctness)’도 불명확성에 반대한다. …… 다의성은 에로티시즘의 언어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의 엄격한 언어 위생(衛生)은 에로틱한 유혹을 끝장낸다.” [113쪽] 그는 책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금지나 박탈의 부정성이 아니라 과잉생산의 긍정성이 성을 없앤다. 현재 사회가 앓는 병의 본질적 원인은 긍정성의 과잉이다. 과소(過小)가 아니라 과다(過多)가 현대 사회를 병들게 한다.” [116쪽] 진정성과 긍정성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음에도, 현존은 불완전하며 불안하니, 해야 하는 것은 ‘사랑하기’라고, 한병철이 말하고 있는 듯하였다.

1959년에 남한에서 태어난 그가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오듯 한다”라는 말을 몰랐을 리가 없을 것이다. 즉 의례가 낭비적일 수 있음을 그는 알았을 것이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걸쳐 고려대학교 금속공학과를 다녔으니, 굿의 성격을 가진 남한 지역사회의 축제나 대학의 대동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남한 사회의 변화에 적용해 볼 생각이라면, 남한 사회의 리추얼들과 책의 내용 사이의 상호관계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향연』 속의 디오티마를 다시 만나보는 것, 온갖 ‘기대효과’와 무관했던 시대의 철학과 다시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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