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표적 안면성-수많은 가면 중 진실한 가면이 있을까?

‘부캐’ 열풍과 창작그룹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의 〈절멸〉 퍼포먼스, 김소정 작가의 작품을 넘나들며 얼굴성에 대해 고민한 내용을 정리했다. ‘수많은 가면 중 진실한 가면이 있을까?’ 중요한 건 있고 없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번 새해는 제주도에서 맞게 됐다. 12월 31일은 제주 작가들과 1년간 합을 맞춘 전시를 마무리하는 날이었다. 머지않아 또 만나게 될 것 같아 담백한 인사를 나눈 뒤 광주에서 동행한 동료 작가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도 올해의 마지막 날인데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소박하게 상을 차려 놓고 마주 앉았다. 우리는 ‘정신 차려 보니 연말’이라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고, ‘그래도 다시없을 일 년이었다’며 후련해 하기도 했다. 감사할 것과 애도할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화제가 됐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한 해를 돌아보기로 했다. ‘펜트하우스’와 ‘스우파’, ‘올림픽’과 ‘메타버스’, ‘오징어게임’과 ‘백신패스’ 등 다양한 키워드가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부캐’였다.

부캐는 원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부수적으로 키우는 캐릭터’를 뜻하는 게임용어였으나 최근에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두 번째 정체성’이라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2021년은 그야말로 부캐의 해였다. 이제는 ‘본캐’만큼 유명한 유재석의 부캐 유산슬과 이효리의 부캐 린다G부터 김다비와 최준, 이호창, 제이호, 한사랑 산악회의 네 아저씨들까지. 새로운 얼굴이 유튜브(YouTube)는 물론 공중파 방송과 각종 광고를 접수했다. 특히 개그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보여주는 부캐들은 시청자들이 ‘빙의’나 ‘접신’ ‘인류학자’라고 평할 정도로 특정 집단의 얼굴을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부캐는 말투는 물론, 입을 열지 않아도 옷차림과 지니고 있는 물건, 행동과 표정만으로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아는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 갈무리.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 갈무리

사람들은 누군가의 새로운 얼굴이 만든 아는 얼굴을 보며 울고 웃었다. 한사랑 산악회의 중년 아저씨들을 보며 ‘꼰대’ ‘개저씨’라고 비난하던 기성세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기도 하고, 온갖 낭만 클리셰를 때려 부은 부캐 ‘최준’을 보며 ‘오글거린다’라는 표현의 등장 이후 평가절하 당해온 솔직한 감정 표현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기도 했다. 부캐들은 나아가 재벌들의 이미지메이킹 방식을 풍자하거나(개그맨 이창호의 부캐 ‘이호창’), 순식간에 우리를 과거로 데리고 갔다(‘05학번 이즈백’의 쿨제이와 길은지 등). 이렇게 어떤 얼굴은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되거나 하나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얼굴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얼굴만 봐도 아는’ ‘느낌적인 느낌’을 지닌다.

언어는 항상 얼굴성의 특질들을 동반한다. 또 얼굴은 잉여들의 집합을 결정화하며, 기표작용적 기호들을 방출하고 수신하고, 풀어주고 재포획한다. 얼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 몸이다. 얼굴은 모든 탈영토화된 기호들이 달라붙는 의미생성의 중심몸체로서, 그 기호들의 탈영토화의 한계를 표시해준다. 목소리는 바로 얼굴로부터 나온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역, 새물결, 2011. 223쪽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이토록 다양한 부캐 앞에서 울고 웃으며 하나의 놀이로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이들의 얼굴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얼굴, 합법이고 정상인 얼굴,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캐들은 결국 나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얼굴이거나 또는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의 얼굴을 하고 있다. 기존의 얼굴성을 유지하고 있는 얼굴들인 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질서를 흔들거나 변화시키기 어렵다. 가면을 바꾸듯 그때그때 얼굴을 바꾸는 부캐가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도표적 안면성(얼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하나의 정치”인 얼굴, 얼굴성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들뢰즈/가타리는 얼굴을 해체하고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시도로 도표적 안면성을 제안하지만 “소름 끼치는”얼굴을 넘어선다는 게 과연 가능할지 의심이 앞선다. 그러나 낙관을 놓지 않는다면 완전하지는 못해도 이에 가까운 시도를 몇 가지 떠올려볼 수 있을 듯하다.

퍼포먼스 〈절멸〉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살펴볼 수 있는 이동시의 인스타그램 계정 @edongshi
출처: https://www.instagram.com/edongshi/
퍼포먼스 〈절멸〉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살펴볼 수 있는 이동시의 인스타그램 계정
출처 : @edongshi

지난 8월 20일, 아직 더위가 한창일 무렵 세종문화회관 야외 계단에 동물 얼굴이 등장했다. 기후, 환경, 동물 관련 이슈를 다루는 창작집단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에서 주최한 퍼포먼스 〈절멸〉이 시작된 것이다. 천산갑, 오리, 사향고양이, 돼지, 낙타… 가면을 쓴 작가와 예술가, 활동가들이 한 명의 동물이 되어 선언문을 낭독했다. 각각의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나(이름)는 오늘 (동물)로서 말한다.” 인간의 요구와 선언으로 가득했던 자리에 동물의 이야기가 들어섰다. ‘더는 건들지 말라’고, ‘우리는 너에게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고 ‘나의 귀여움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외쳤다. 익숙한 곳에 불쑥 등장한 낯선 얼굴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이대로 계속 흘러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만들었다.

이동시의 퍼포먼스, 얼굴성의 변주가 질서와 범주에서 벗어난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다면 작가 김소정의 회화 작업1은 얼굴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얼굴이 생략된 풍경 앞에서 누군가는 “결국 세상은 우리를 위해 바뀔 것이다” “너는 나다” “더는 단 한 명의 자매도 잃을 수 없다”는 외침이 쏟아졌던 2018년과 2019년의 혜화역을 너무도 쉽게 떠올렸을 것이다. 마스크와 모자, 가면과 선글라스를 쓰고 모인 얼굴 없는 여성들은 영웅적 인물이나 대표자 없이도 크나큰 물결을 만들어 냈다. 대표하는 하나의 얼굴이 없기에 내부와 외부, 주체와 객체를 횡단하며 풍경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수많은 가면 중 진실한 가면은 무엇인지’, 누군가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동시와 혜화역에 모인 여성들, 이들이 만들어낸 타자-되기의 움직임과 연결의 순간을 보고 있자면 중요한 건 있고 없음을 따지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을 변화를 위한 실천으로 옮겨가는 이들은 진실한 가면을 찾는 대신 끊임없이 가면을 바꿔 써가면서, 얼굴을 지워 가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1. neolook.com/archives/20211015h 김소정 작가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작가의 개인전 ’지켜보는 사람 The gazer’(통의동보안여관 2021.10.15.-11.06) 소개 페이지

이하영

독립큐레이터/공동작업자.
독립큐레이터팀 ‘장동콜렉티브’를 결성할 때만 해도 계속 같은 일로 분투할 줄 알았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인지 최근에 마음이 맞는 여성 창작자들과 다양한 형태의 공동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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