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② 할아버지의 노래, 어머니의 노래

어머니께 들은 ‘어머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나름 자수성가를 하셨지만 첫 번째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뜬 후 재혼과 상처를 거듭하셨고, 그로 인해 어머니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서럽고 힘들게 살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기억하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려 주셨던 노래를 지금도 기억하고 그 노래를 한 번씩 부르시곤 합니다.

부모와 조부모의 삶에 대해 잘 아는 경우는 드물다. 사진출처 : dandelion_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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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조부모의 삶에 대해 잘 아는 경우는 드물다.
사진 출처 : dandelion_tea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불의에 분노하는 성품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반감으로 젊은 시절에 동학교도였다고 한다. 동학교도로서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고 다만 장흥에서 동학에 참여했다가 동학이 패퇴한 후에 해남으로 도망을 가셔서 살았다고 했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한 시대에는 어림이 없었겠지만 한양 천리길을 걸어다니던 그 시절에는 장흥에서 해남이 도망가서 들키지 않아도 될 만큼 멀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분이 끝까지 잡아야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으셨을 수도 있겠다. 홀로 해남으로 도망간 엄마의 할아버지는 김, 멸치 등의 해산물 장사를 시작하셨고 장사가 곧잘 되어 해남에서 먼저 자리잡고 살아온 장사꾼들의 텃세에 맞서야 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그분의 활약상을 이야기하실 때에는 뭔가 신이 나 보이셨다.

“한번은 여러니서 우리 할아부지를 혼내 준다고 덤볐는갑드라. 근디 우리 할아버지가 인자 머리를 써가꼬, 꾀를 내서 덤볐단다. 이, 벽을 딱 등지고 서서 여러니 못 달라들게 벽에 붙어서서 한나씩 한나씩 덤비게 해서 다 이게븠대. 인자 그래가꼬 그 담부터 그 사람들이 우리 할아버지를 시프게 못 보고 조심하고 그랬제. 글고 낭께 할아버지 장사가 잘 되가꼬 난중에는 말타고 다니셌단다. 그 말타고 목포 산정동 성당에 가서 신부님도 만났제.”

“신부님을 왜 만나셨대요?”

“그때 천주교가 인자 박해가 끝나고 외국 신부님들이 막 들어오고 근께 인자 천주교 신자들한테 함부로 못 하게 되었는갑드라. 근디 천주교 신자들 중에 외국 신부님 믿고 못된 짓 허고 다닌 사람들이 있었단다. 이, 인자 다님서 사람들 양석도 뺏고 함서 ‘우리는 천주교 신자들이다’ 함서 다니고, 인자 그런 소문이 낭께 우리 할아버지가 가만 못 있었제. 목포 산정동에 천주교회가 있다드라 하는 소문을 듣고 신부님헌테 따지러 간 거제.”

“근디 그때 말 타고 가셨어요?”

“이, 그랬제. 인자 우리 할아부지가 신부님한테 딱 가서 도대체 천주교가 먼디 그렇게 사람들을 못 살게 구냐고 따졌제. 근디 그때 신부님이 점잖았는갑드라. 우리 할아부지보고 차분히 이야기하자고 함서 조목조목 천주교 교리가 어떻고 그런 걸 인자 이야기항께 우리 할아부지가 그만 천주교 신자가 되부렀제. 신부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서 영세를 받아부렀제. 그래가꼬 우리도 다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그래서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시절, 나는 유아세례를 받았고 우리 엄마 쪽으로는 4대째 천주교 신자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녔었다. 요즘은 성당에 발걸음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근디 우리 할아부지가 돈은 많이 벌었는데 처복이 그렇게 없었어.”

“처복이요?”

“이, 장개를 네 번이나 들었어. 머냐 득옥이 즈그 아부지를 낳은 양반이 첫 번째 부인인데 득옥이 즈그 아부지를 낳고 돌아가세븠제. 인자 그래가꼬 우리 할무니한테 새 장개를 들었는데 우리 아부지하고 순천 작은 아부지를 낳고 살다가 또 병으로 돌아가세븠어. 우리 아부지가 열 서너살 묵고 순천 작은 아부지는 열 살도 안 되가꼬 엄마가 돌아가셔븠어. 그래서 새어머니가 들어왔는데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은 딸을 둘을 데꼬 왔대.”

“엄마 할아버지는 상처를 자주 하셨어요. 이”

“그랬제. 첫 번째는 득옥이 할아버지를 낳고 죽고. 그래서 두 번째 얻은 부인이 우리 아부지하고 순천에 작은 아부지를 낳고 죽어서 또 새 장개를 들었는디 그 여자가 딸을 둘 데리고 들어왔제. 근디 순천 작은 아부지는 성질이 순해가꼬 괜찮았는디 우리 아부지는 불뚝성이 있어가꼬 구박을 많이 받았제. 새엄마 데꼬 온 딸들이 집안 살림을 맘대로 할라고 항께 느그 할아버지가 그 꼴을 못 봤제.”

“득옥이 오빠 할아버지는?”

“아, 그 양반은 장개를 들어서 진즉 제금을 나쁬제. 근디 한 번은 그 누나들이 떡을 한 시리 해놨드란다. 근디 울아부지가 그걸 보고 좀 장난을 쳐부렀제. 안 그래도 평소에 새어매랑 그 누나들이 구박을 항께 미워라 미워라 하고 있는디 떡을 한 시리 쪄놓고 좀 식으믄 묵을라고 방에 들어가 있응께 머슴들 방에 가서 쩌그 소여물 끼리는 부샄에 떡 한 시리 있응게 갖다 묵으라고 했대. 머심들이사 좋다고 갖다 묵제. 다들 꿀찌한 참에 다 묵어븠제.”

“그래가꼬 할아버지가 시루떡 다 묵어불고 어쨌다요?”

‘목소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목소리 속에 진짜 원본’이 있다고 말한다. 
사진 출처 : Elke Wetz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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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목소리 속에 진짜 원본’이 있다고 말한다.
사진 출처 : Elke Wetzig

“인자 그 누나들이 즈그 친구들이랑 떡 먹을라고 나와봉께 아주 시리짜 없거등? 찾아봉께 머슴들이 다 먹어버린 거 보고 인자 우리 아부지가 그런지 딱 알아븠제. 그래가꼬 다음날 인낭께 떡 그랬다고 야단이 났단다. 근디 우리 아부지가 고분고분 안 하고 같이 싸웠는디 인자 여자라도 둘 다 나이를 더 먹고 둘이서 해댄께 혼자 당하고 있었는갑드라. 근디 득옥이 즈그 할아버지가 인자 지나가다가 동생이 당하는 거 보고 한바탕 난리를 쳤단다. 새어매가 데꼬온 딸들이 이녁 동생을 때리는 거 보고 인자 화가 나 부렀제. 그래가꼬 막 머라 그랬단다. 그러고 속상하고 산께 우리 아버지가 어려서 집을 나와 부렀제. 그래가꼬 애레가꼬 집을 나와서 삼서 고생을 많이 하셌제. 근디 나중에 데꼬온 누나 아들이 한번 우리 집을 찾아왔드랑께. 저그 삼춘 그럼시로. 인자 그때는 잠깐 댕게 가논께 난 누군지 몰랐는디 인자 아부지 말이 누나 저그 아들이다 그러면서 아빠가 이러고 저러고 해서 누나가 친누나는 아니고 그때 어린 마음에 그런갑다 흐고 말았는디 근디 겔국에는 그 어매도 죽어불고 또 각시를 새로 얻었제. 그러다 봉께 살림이 다 거덜나 버려서 말년에는 순천 작은 아버지 집에 혼자 오세서 거그서 돌아 가셨제. 암튼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그런 서러운 이야기를 해 줌서 노래를 하나 나한테 겔카줬어”

“어떤 노래를요?”

“어머님 사랑을 받던 시절에……”

“그러지 말고 노래로 해봐요.”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님 사랑을 받던 시절은 꽃피고 새 우는 봄이었건만 어머님 떠나시고 외로운 이 맘 참새만 울어도 어머님 생각. 찬서리 내리는……”

어머니는 노래를 잠깐 멈추고 ‘2절’이라고 덧붙이고 노래를 계속 하셨다.

“가을 저녁에 어머님 찾아서 뒷동산으로 달님도 울어주는 외로운 산길 치맛자락 안고서 울었답니다. 나 생각에 치맛자락은 무덤을 말허는 거 같애.”

이 노랠 부를 때 어머니의 목소리는 90 노인 같지 않게 낭랑하고 청아했다. 그리고 노래를 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어머니가 지금 고3인 조카보다 더 어린 계집아이였던 시절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게 천진한 눈빛으로 그리움에 젖어있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근디 우리 아부지 말고는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을 나가 본 적이 없어. 글고 인자 딱 우리 아부지 심정하고 꼭 같애, 노래 가사가. 그래서 이 노래는 우리 아부지가 만들었을까 나 혼자 생각이 들어.”

휴대전화를 들어 노랫말을 검색해 보니 어떤 카페 게시글에 같은 노랫말이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엄마 내가 금방 노래 가사를 찾아봉께 어떤 사람이 쓴 글에 같은 노랫말이 있네요. 할아버지가 만든 노래는 아닌 걸로.”

“이 글구나. 어째든 우리 아버지가 이 노래를 부름서 인자 당신 어머니 생각을 많이 하셌제.”

어머니도 당신 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이 노래를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참 엄했어. 나한테 절대로 어른들한테는 존댓말 하라고 갈치고, 여자의 처신을 똑바로 하라고 갈챘제. 한 번은 옆집 아줌마가 치마를 한나 나를 줬는디 참 이뻤어. 하늘하늘하고 색깔도 곱고. 인자 나가 좋아서 그 치마를 입었는디 우리 아버지가 그 치마를 보더니 당장 벗으라고 했제. 그래가꼬는 짝짝 찢어서 돼지 똥구덕에다 처넣븐단 마다. 치마가 앰전하지 못 하다고. 인자 그래도 나는 아부지가 무서워가꼬 암말도 못 했제. 나가 종아리가 좀 나온 치마도 못 입게 하고 바지도 못 입게 했제. 인자 근디 그래도 아버지가 좀 오래 사셌으믄 우리 엄마가 고생도 덜 하고 그랬을 것인디 이날 펭상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나가 열 일곱 살 때 돌아가세븠제. 아부지가 인자 안 아팠을 때는 점빵도 하고 그래가꼬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그랬는디 아부지가 아파서 할무니가 돈 벌라고 장새 댕기고 나가 우리 아부지 구완을 했제. 죽도 끼레 디리고 약도 달애 디리고 그랬는디 일찍 돌아가세븠제. 인자 에레서는 엄니가 일찍 돌아가세블고 고생고생해서 몸에 병도 생기고 나 시집 가기도 전에 돌아가세븠제.”

그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70여 년이 되어도 어머니는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신 듯 한번씩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시며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었던 노래를 부르시곤 한다. 이제 90이 넘은 연세이다 보니 당신도 그 아버지를 따라, 그리고 돌아가신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우리 아버지를 따라가실 때가 곧 다가오겠구나 생각하면 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둬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하게 되려나?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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