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취약하고 불안정하다는 조건으로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 『정동적 평등 : 누가 돌봄을 수행하는가』 리뷰를 겸해

인간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돌봄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돌봄을 수행하는 일은 폄하되어 왔다. 그렇기에 돌봄이 노동의 지위를 얻은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편 돌봄은 노동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돌봄은 일방적인 주고받음이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생산하는 정동적 활동이다. 오늘날 돌봄은 존재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르게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인간은 자립적이고 능동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늘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미약한 존재라는 인식으로부터 다시 관계의 문제를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의 견인과 사회적 의제가 된 돌봄

노동할 수 있는 몸이란 곧 근대적 시민권의 징표처럼 간주되었다. 산업·공장노동 중심성에 근거한 노동 표상의 규범성, 임금체계에 속하지 않는 일·활동이 폄하되거나 무시되어온 것 등을 떠올릴 때 이것은 쉽게 이해된다. 한편, 오늘날 ‘돌봄’은 ‘노동’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지만, 오랫동안 이런 노동의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대표적인 활동이기도 했다. 자본은 남성가장의 노동과 임금에 여성 및 가족구성원이 의존케 하는 동시에, 가족 안에서의 여성의 일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가부장체제-자본의 이 고리를 끊는 첫걸음으로서 돌봄은 ‘노동’이 될 필요가 있었다.

20세기 후반 ‘돌봄’이 노동의 지위를 획득하고 사회적 주요 의제가 되어온 데에는 페미니즘의 역할이 크다. 예컨대 1970년대 초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전개한 ‘가사노동 임금투쟁’은 -그것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결국 자본주의 임금체계에 편입되고자 하는 것 아니냐 등의 오해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돌봄’의 가치가 폄하되어온 역사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폭로했다. 돌봄이 어떻게 여성=사적인 영역으로 할당되면서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어 왔는지, 자본주의 하에서 ‘사랑’이라는 말에 의해 어떻게 여성의 재생산 활동이 부불노동으로 추출해 왔는지 등은, 그녀들의 투쟁으로 인해 비로소 가시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돌봄의 특별한 위치 : 노동이면서 정동적 관계인

실비아 페데리치(황성원 옮김), 『혁명의 영점』, 갈무리, 2013.
실비아 페데리치(황성원 옮김), 『혁명의 영점』, 갈무리, 2013.

그런데 한편 돌봄은 과연 임금체계와 노동으로만 환원될 수 있는 활동일까. 돌봄을 노동의 자리에만 놓는다면, 돌봄을 받는 측은 보이지 않게 되고 돌봄을 수행하는 측의 행위성만 부각된다. 돌봄의 주고받음에 수반될, 규정할 수 없는 무수한 정동도 삭제되어 버린다. 또한 돌봄을 임금체계로 편입시키는 순간, 가부장체제와 자본주의의 고리는 느슨해질지언정 모든 인간 활동을 교환가치로 셈하는 자본주의와 근대의 노동중심성은 더욱 공고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 가사노동 임금투쟁 운동을 전개한 페미니스트들도 자신들의 투쟁이 “자본주의 관계에 진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자본의 계획을 분쇄하는 것”,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에 그 목표를 두었다. (실비아 페데리치(황성원 옮김), 『혁명의 영점』, 갈무리, 2013, 44-64쪽)

즉 돌봄은 임금체계 하의 노동으로 명명될 때, 비로소 가부장체제-자본주의가 보이지 않게 한 의미가 또렷이 가시화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돌봄은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수한 행위성과 정동을 수반하는 활동임도 분명하다. 인간관계에만 한하더라도 돌봄은 존재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험하는 의식·무의식적 주고받음의 활동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돌봄의 특별한 위치와 가치를 짐작케 한다. 물론 이 딜레마는 배타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조밀함 속에서 이미 돌봄은 외주화되고 상품화되며 다시 젠더-계급화되어 취약계층, 이주자, 제3세계 빈곤층 등에 할당되고 있다. 돌봄(감정, 가사)노동에 대한 법적, 제도적 정당한 자리매김 없이 이러한 현실의 문제는 난망해지고 만다. 그러나 강조컨대 돌봄은, 임금체계 너머에서 이 세계를 보이지 않게 운용해온 정동적 활동이기도 하다. 돌봄을 둘러싼 이 딜레마는 봉합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동시에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정의와 평등 관점에서의 돌봄

캐슬린 린치 외(강순원 옮김), 『정동적 평등 : 누가 돌봄을 수행하는가』, 한울, 2016.
캐슬린 린치 외(강순원 옮김), 『정동적 평등 : 누가 돌봄을 수행하는가』, 한울, 2016.

『정동적 평등 : 누가 돌봄을 수행하는가』의 필자들은 사회정의와 평등의 관점에서 ‘돌봄’을 이야기한다. 아일랜드의 다양한 돌봄 사례와 현장 인터뷰를 통해 돌봄의 공적 의미를 환기시키고 그에 대한 인식의 제고를 꾀한다. 이 책은 앞서 이야기한 돌봄의 복잡성과 모순을 두루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즉, 돌봄을 ‘상호의존’적 측면에서도 다루고 있고, ‘노동’ 관점에서도 다루고 있으며, 장애 운동에서 제기된 당사자 ‘인권과 자율’ 관점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 돌봄을 의존, 노동, 인권(자율) 관점에서 동시에 생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복하지만 돌봄은 근본적으로 어떤 단일한 준거로 환원되기 어려운 ‘정동적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들은 특히 돌봄의 불평등 문제에 있어서, 젠더뿐 아니라 사회계급, 가족 상황, 결혼 여부, 직업 유연성 여부, 경제적 지위 등 여러 요인이 서로 교차하는 장면들을 강조한다. 돌봄 영역이 고도로 성별화 되어있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어떤 사안이든 늘 여러 차이들이 교차하고 그 조건을 복잡화한다. 그렇기에 “돌봄이나 사랑을 헛되거나 의미없게 만드는 고유의 요인은 없다.”(4장)라는 필자들의 말은 중요하다. 이것은, 무언가가 폄하되거나 무시될 본질이나, 그것을 평가할 자격이란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무언가를 절하시키거나 절상시키는 힘의 구조를 잘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돌봄, 그러나 기여하지 못하는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의 자리는?

또한 이 책은 돌봄 수행자/수혜자 혹은 돌봄 베풂/의존 도식을 질문하며 이것을 상호관계, 호혜적관계로서 분석한다. 많은 이들에게는 돌봄 수행/수혜가 일방적인 관계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돌봄수행자는 능동적으로 행동하며 존경받을 만하다 vs. 수혜자는 약하고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존재다’ 식의 이미지는 항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에 이미 힘의 차이(권력)가 내재해 있다는 오해도 많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오해)에는, 존재의 위계도 함께 전제되기 쉽다. 필자들의 분석대로 모든 관계는 결코 일방적일 리 없다. 또한 필자들의 분석을 넘어서, 관계는 반드시 양측만의 문제도 아니다. 관계는 무수한 행위소들의 배치의 문제고 규정할 수 없는 정동의 문제다.

한편, 사랑노동이 “투자로서 정서적, 사회적 수익을 낸다.” “사랑노동 특유의 시혜성과 타인중심성은 돌봄 수혜자에게서 사랑노동 역량은 재생산한다.”(6장) 식으로 사회, 공동체 안의 이로움, 기여, 생산성 등의 관점에서 진술된 대목들에서는 -그리고 그 사례로서 아버지 돌보는 장애 아들이 장애급여를 받고, 피부양자 청소년이 자기동생의 돌봄을 수행하는 것이 제시된다- 다소 궁금함이 생기기도 한다. 사회정의와 평등의 관점에 서 있는 필자들의 포지션이 정책적, 제도적인 설득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럼에도 선택된 언어들의 맥락에서 볼 때 수익, 기여, 생산의 관점에서 이야기될 수 없는 존재들(장애, 질병, 노령, 아이 등등)의 좀더 다양한 자리는 없을지 궁금해진다. 이 책 전반에서 ‘균형, 평형, 대칭, 합리성’ 등의 언어가 구사되는 것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효과와 한계는 무엇일까. 사실 필자들의 필드와 포지션을 생각한다면, 돌봄을 시민성(시민권, 제도, 체제) 문제로부터 궁극적으로는 이탈시키고 싶은 상상력은 독자의 몫일 것도 같지만 말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다른 상상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인체도’가 상징하는 근대적 인간의 이미지란, 심신 건강하고(비장애) 균형잡힌 안정된 존재이며 성인 남성 개체의 형상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Vitruvian_Man#/media/File:Da_Vinci_Vitruve_Luc_Viatour.jpg)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인체도’가 상징하는 근대적 인간의 이미지란, 심신 건강하고(비장애) 균형잡힌 안정된 존재이며 성인 남성 개체의 형상이다.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럼에도 이 책 『정동적 평등 : 누가 돌봄을 수행하는가』는 여러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예컨대, 필자들이 서구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돌봄 없는 시민성” 모델을 지적할 때 더 주제화하고 싶은 바지만, 근대가 모든 존재의 기초 단위 및 이념으로 상정해온 것은 주지하듯 ‘개인(individual)’이다. 이 말은 어원 그대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차이를 통해 존재를 상상케 해왔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개체의 이념이 근대적 인간에 스며있었던 것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가령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인체도’가 상징하는 근대적 인간의 이미지란, 심신 건강하고(비장애) 균형 잡힌 안정된 존재이며 성인 남성 개체의 형상이다. 근대가 상정한 인간은 취약하거나 어딘가 아프거나 비남성이거나 나이 들거나 불안정한 존재들까지 포함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즉,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와 질병 여부, 인종, 계급, 연령 등등은 근대의 정상인간=보편인간의 준거로 작동해 왔다. 오랫동안 돌봄이 폄하된 것은 –필자들이 H. 아렌트를 언급하며 이야기하듯- 그 일(노동)의 고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거기에서 더 나아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돌봄을 받는 존재의 취약성, 근대적 인간에 미달한다고 여겨진 요인이, 돌봄의 폄하와도 관련되지 않았을까 라는 점이다.

근대적 시민권은, 정상성=보편성에 준거하여 누구를 배제하고 포함할지 암묵적으로 늘 골몰해 왔다. 이것은 ‘돌봄’이 왜 폄하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돌봄’은 취약하고 의존적이라고 여겨지는 존재와의 관계맺음이다. 방금 ‘취약하고 의존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가치판단이 아니다. 실제로 홀로 스스로를 돌보기 어렵고 누군가·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에 대한 술어다. (여기에는 인간중심 세계에서 스스로를 돌보고 살 권리를 박탈당한 무수한 비인간동물, 생태 속 존재도 포함될 것이고, 만일 존재의 범위를 확장한다면 주제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돌봄 수행자/수혜자 사이의 권력관계의 이미지도 ‘심신 건강하고 능동적인 존재’와 ‘약하고 수동적이라고 여겨지는 존재’에 대한 이러한 무의식적 가치판단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아예, 취약하고 불안정하다는 조건으로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엄밀히 말해 취약함과 불안정함은 인간 모두의 본래적(이때는 본래적이라는 말을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조건이다. 모든 존재는 의식·무의식적으로 늘 무언가와 영향을 주고받고 있고 그것은 반드시 상호적, 호혜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돌봄의 문제는 제도적, 법적 실행력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좀더 근본적으로 존재에 대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문제로서도 사유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실제 오늘날 근대적 인간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더라도, 예컨대 ‘젊음, 진보, 희망, 발전, 성장, 생산’ 등의 근대적 가치가 기능부전에 빠진 상황들은 많다. 취약함(vulnerability)과 불안정함(precarity)을 재전유하며 세계를 다시 사고하고자 하는 이들의 작업(J. 버틀러)도 떠오른다. 만일 모든 존재가 본래 약하고 수동적(중동적)이고 의존적이고 불안정하다고 가정할 때, 인간의 돌봄 수행/수혜를 둘러싼 문제뿐 아니라, 이 세계의 문제들을 다르게 사유할 여지는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근본적인 질문을 할수록 ‘돌봄’은 응답할 것이 많은 행위이자 가치라는 사실이다.

김미정

문학을 경유해서 글을 쓸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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