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입(流入)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법흥왕(法興王)’1에는 신라에서 한낱 외래종교였던 불교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종교가 되기까지 그 과정이 기술되어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법흥왕 15년(서기 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고 한다.2 그런데 이 기록은 신라 사람들이 불교와 처음 접촉한 것은 법흥왕 15년보다 훨씬 이전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먼저 묵호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찍이 눌지왕(訥祗王)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자기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모셨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으나,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물어보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알려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태우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한 곳에 정성이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태우며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임금의 딸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임금은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다. 딸의 병이 곧 나았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가 왕성에서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받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며 말하였다.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3
인용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신라로 들어왔고, 모례가 그를 보호하였고, 묵호자가 낯선 문물의 사용법을 신라 권력자들에게 알려주며 삼보(三寶)[佛·法·僧]가 넌지시 전하였고, 신라 권력자들이 원한 병고침을 묵호자가 해 주었고, 묵호자는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다.
묵호자(墨胡子)는 얼굴이 검은(墨) 유라시아 사람(胡子)을 말한다. 모례는 왜 땅굴을 파기까지 하면서 그를 숨겨주었다. 모례가 불교를 도입(導入; induction) 즉 끌어들이기 위해서 묵호자를 불러들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라인이 어떤 이유에서든 불교를 수입(輸入; import) 즉 바깥으로부터 들여온 것이 된다. 외부에서 애써 전파(傳播; disemination) 즉 널리 전하여 퍼뜨리려 한 것이라기보다는 전래(傳來; introduction) 즉 그저 바깥으로부터 전하여 온 것으로 기술함으로써 『삼국사기』를 편찬한 사람은 신라인이 불교를 주체적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자신의 판단을 역사에 남기려 한 듯하다. 일선군은 지금의 경북 선산이라고 한다. 이런 변방이 아닌 신라의 수도의 권력자들은 묵호자를 낮선 문화를 해설하고 병고침을 하는 존재로만 인식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묵호자는 스스로 종적을 감춘 듯하다. 묵호자의 신라 입국으로 신라에 제대로 불교가 들어왔다고 볼 수 없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법흥왕(法興王)’에 따르면, 묵호자가 간 곳을 알 수 없게 되고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신라와 불교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阿道)[혹은 아도(我道)라고도 한다.]가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 시중을 들던 세 사람은 계속 머물러 살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불법을 믿는 이가 종종 있었다.”
비처왕은 소지마립간이다. 눌지마립간의 재위기간은 417년~458년이고, 소지마립간[비처왕]의 재위기간은 479년~500년이다. 소지마립간 집권기에 아도라는 사람이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에게 온 것이 아니라 ‘모례의 집’으로 왔다고 역사는 기록하였다. 석가모니 부처가 세 명의 보살의 옹위 속에 나타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상징조작 같다. 그렇게 온 아도는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고 한다.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 불교를 달가워하지 않거나 공포의 대상으로 보았던 사람들과 세력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 등장 이전에 신라에서 지배적이었던 종교·사상·문화의 당사자들이 특히 그러하였을 것이다. 딱히 신라의 수도의 권력자들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이들이 아도의 활동에 민감하게 대응하였을 것이다. 아도가 죽은 후에도 시중을 들던 세 사람은 계속 머물러 살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불법을 믿는 이가 종종 있었다고 하니, 이때 불교는 적어도 신라의 주변부에서 수용(受容; reception) 즉 받아들여지고 있었을 듯하다. 인도 북부에서 비롯하여 먼 길을 흐르며 굴러온 불교는 이렇게 신라에 유입(流入; affluence)즉 흘러 들어왔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기적(奇蹟)과 순교(殉敎)
불교의 유전은 신라 유입에서 끝나지 않았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법흥왕(法興王)’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 때에 이르러 임금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하였으므로 임금이 난감해하였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異次頓)[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한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저의 목을 베어 뭇사람들의 분분한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본래 불도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저는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여러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모두들 말하였다. “지금 중들을 보니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며, 말하는 논리가 괴상하여 정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저희는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홀로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의 심오함을 들어보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여러 사람의 말이 단단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구나.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 마침내 형리에게 이차돈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의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내가 죽고서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았는데 그 빛깔이 우유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기록에 의거한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16년(서기 529),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5
변방에 불교가 유입되어 수용되고 있던 시점에, 신라의 수도의 권력자들 사이에서는 불교를 둘러싼 갈등이 팽팽하였다. 변방에 사는 사람들 속에만 불교 등장 이전에 신라에서 지배적이었던 종교·사상·문화의 당사자들이 있었던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임금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다고 한다, 일부 신하들이 아니라 뭇 신하들이 그것을 꺼렸다고 한다. 이런 대립 갈등은 신·구 종교 사이의 대립 갈등과 연동되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대립 갈등은 지금 여기에서도 동시다발(同時多發)하고 있는 것이기에, 신라에서 벌어졌던 신·구 종교 사이의 대립 갈등을 들여다보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적응하기 위한 연습이 될 것이다. 마침 종교의 정치 개입에 대한 강력한 대처가 이야기되고 있는 오늘이다.

이때 이차돈이 나섰고, 그에 따라 일어난 일들은 한국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으나, 각자가 알고 있는 이야기의 색깔이 조금씩 다르니,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법흥왕(法興王)’ 속의 이차돈 이야기를 각자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삼국유사』의 ‘염촉멸신’이라는 이야기는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렇게 하는 반대 방향으로는, 이차돈 이야기를 싸잡는 낱말들도 생각해 보면 좋다. 먼저 순교(殉敎)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어에 마티덤(martyrdom)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희랍어[헬라어] ‘마르튀스’에서 유래하였다. ‘마르튀스’는 ‘증거’·‘증인’이라는 뜻으로 쓰였던 말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자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이 말은 생명을 바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종교이기도 하다. 한자에서 이러한 마티덤이라는 말에 대응될만한 글자는 순(殉)이다. 이 글자는 ‘따라 죽다’, ‘목숨을 바치다’ 등의 뜻으로 새겨진다. 이 글자가 들어가는 유명한 낱말 순장(殉葬)에 쓰인 순이라는 글자의 뜻은 ‘따라 죽다’로 새겨야 할 것이다. 중국 고전 『장자(莊子)』 속 「도척(盜跖)」에 보이는 ‘소인은 재물 때문에 목숨을 바치고, 군자는 이름 때문에 목숨을 바친다.(小人殉財 君子殉名)’라는 글귀를 읽을 때는 순이라는 글자의 뜻을 ‘목숨을 바치다’로 새겨야 할 것이다. 이렇게 쓰인 순이라는 글자에 교(敎)라는 글자를 붙여 만든 순교(殉敎)라는 낱말이 영어의 마티덤(martyrdom)이라는 낱말의 번역어로 쓰이는 듯하다. 순교는 한국 역사의 한 장면을 설명하는 말로도 쓰였다. ‘이차돈의 순교’가 그것이다. 20세기에는 이차돈의 순교가 어린이용 위인전기에 나왔었다.
그때, 그러니까 20세기 말에, 이차돈의 순교는 어린이용 위인전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 같았다. 거기에는 기적(奇蹟, miracle) 그러니까 합리적 이성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굳이 합리적 이성을 동원할 필요가 없이, 느낌으로 만나면 너무나도 환상적인 체험을 선사하는 화소(話素)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전체주의의 자장 속에 있거나 전체주의에서 갓 벗어난 시기의 어린이들에게 그 이야기는 활극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대개 기독교를 통하여 전달된 미국의 구호물자에 덧씌워진 문화를 섭취한 어린이들에게는, 활극 이상의 성스러운 어떤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순교였던 것이고, 초등학교 교과서나 어린이용 도서에도 이차돈의 순교라고 적혀있어서, 독서에 열의가 있거나 모범적인 어린이는 더더욱 이차돈의 행위를 고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때 그것은, 팔뚝으로 새는 둑을 막아 나라를 구한 네덜란드 소년의 애국에 맞먹는 성스러운 행위로, 모범적인 유신 소년들에게 의식화되었던 듯싶다. 그러나 기적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있음이 분명하고, 순교는 일회적인 인생을 특수 목적을 위하여 수단화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은폐하고서야 가능한 일이어서, 아마도 21세기에는 이차돈의 이야기가 어린이용 읽을거리 목록에서 점점 후순위로 밀리고, 22세기에는 그 목록에서 사라져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공인(公認)과 독단화(獨斷化); 시작의 끝과 끝의 시작
아마도 이차돈은 구 종교와 결합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집단을 약화시키고 신라의 권력을 재편하기 위하여 불교를 강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을 듯하다. 이를 안 이차돈이 제안한, 획기적이며 희생적이어서 고귀할 수도 있으나 명백히 끔찍한 것이기도 한, 프로젝트가 자신의 목숨을 도구화하면서 유혈낭자한 활극을 펼치는 것이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이런 야만적인 퍼포먼스는 신라 왕권 나아가 신라 사회가 불교를 공인(公認, authorization) 즉 권력이 인정하여 일반 공중이 시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법흥왕 이후 신라는 완연하게 불교국가가 되기 시작하였다. 왕실 사람들이 불교적인 이름을 자진하여 택하고 권력을 가진 귀한 사람들이 출가를 의무로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추세의 결과가 지금 여기 사람들이 한국 문화 유산으로 향유할 뿐만 아니라, 점차 세계인들도 향유하고있는, 신라 나아가 고려가 남긴 다양한 불교문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인의 효과라 할 수 있다.
한편 공인에는 역효과도 수반된다. 대표적인 역효과가 독단화(獨斷化)라고 할 수 있다. 독단(獨斷)은 도그마(dogma)의 번역어이다. ‘독단’이라는 말은 군대에서가 아니면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20세기 말 남한의 병사 계급으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군대에서 독단은 ‘지휘관의 자체적 선택 혹은 결단’을 의미한다. 이것이 없으면 군대는 돌아가지 않는다.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군대가 있는 한 그 속에서 지휘관의 독단은 영원히 작동할 것만 같다. 그러나 군대 이외의 곳에서 ‘독단’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와는 결이 다르게, 번역어 ‘독단’의 원어에 해당하는 도그마(dogma)는, ‘모든 논리적 정서적 도전을 물리치고 홀로 우뚝 선 교리’라는 뜻을 가지기에, 그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숭고한 것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장면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도그마는 대개 ‘나쁜’ 생각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말이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도그마는 언제 어디에서나 ‘나쁜’ 뒷맛을 남기는 말이 되어 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이차돈이, 일회적인 것만으로도 고귀한 그의 삶[생(生)]을 수단화하여, 이성적으로 설명·납득되지 않는 사건 즉 기적(奇蹟)을 연출하여 벌인 희생극(犠牲劇) 혹은 순교(殉敎)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公認)되게 하였고, 그것은 오늘날 세계인이 누리는 불교 문화 유산의 찬란함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사상·문화를급격히 주변화시키고, 하나의 생각 만을 허용하는 독단화로 치닫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심지어 끝의 시작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마도 시작의 끝일 것입니다”6라는 말은 윈스턴 처칠이 1942년 11월 10일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 후에 한 연설의 일부라고 한다. 이 말은 애매모호한 말 같기도 하지만, 뭔가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나는 혹은 끝장나기 시작하는 것도 있다는 발상을 촉구하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신라 불교 공인에 적용하여 보면, 불교가 공인되면서 소도(蘇塗)를 주관하던 천관(天冠)들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거나 급격한 신분 격하 추세를 맞이하는 모습부터 떠올릴 수 있겠는데, 변화의 흐름이 이런 모습으로 수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공인된 생각은 급격히 독단화되었을 것이고, 그에 수반하는 강력한 잣대에 질식되거나 참수된 사람들의 이름은 ‘나쁨’을 애써 가리려는 역사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생각의 공인(公認)은 그 생각의 독단화로 치닫기 십상팔구(十常八九) 즉 십상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하찮은 ‘국룰’도 때로는 위험하고 부질없어 보인다.
법흥왕의 재위기간은 514년부터 540년까지다.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법흥왕(法興王)’ 속 “十五年 肇行佛法”. 김부식,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옮김,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네이버 지식백과] ‘법흥왕(法興王)’”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687&cid=62145&categoryId=62226에서 재인용. (최종 접속: 2025년 12월 9일) ↩
“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句麗至一善郡 郡人毛禮 於家中作窟室安置 於時 梁遣使賜衣着香物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徧問 墨胡子見之 稱其名目曰 此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所謂神聖未有過於三寶 一曰佛陁 二曰達摩 三曰僧伽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 時 王女病革 王使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餽贈尤厚 胡子出見毛禮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辭 俄而不知所歸”, 앞의 글. ↩
“至毗處王時 有阿道[一作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病而死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앞의 글. ↩
“至是 王亦欲興佛敎 群臣不信 喋喋騰騰口舌 王難之 近臣異次頓[或云處道]奏曰 請斬小臣 以定衆議 王曰 本欲興道 而殺不辜 非也 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 無憾 王於是召群臣問之 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詭 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奉詔 異次頓獨曰 今群臣之言 非也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 王曰 衆人之言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遂下吏將誅之 異次頓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 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怪之 不復非毁佛事[此據金大問雞林雜傳所記書之 與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所錄 殊異] 十六年 下令禁殺生”, 앞의 글. 내용 ↩
“Now this is not the end. It is not even the beginning of the end. But it is, perhaps, the end of the beginning.” 내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