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피조물 개념에서 배우는 오늘의 기후 행동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프란치스코를 ‘생태학의 주보성인’이라 하셨다. 모든 피조물을 경배했고 그들과 우정을 나누었으며 벌레를 밟을까 염려하고 꿀벌들과 꿀과 포도주를 나누던 분이셨다. 해와 달을 누이라 부르고 모든 동물을 형제를 부르며 매미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기후행동의 어려움 앞에 다시 생각해 본다.

[생태적으로 이해하는 선사의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아니다. 그렇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존재를 인식하고,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물은 물이, 산은 산이 되었다. 그 안의 담긴 수많은 생명을 포함해서.

탈성장의 예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죄책감에서의 해방을 제공하는 것은 “싸구려 은총”, 죄로부터의 해방을 선사하는 것은 “값진 은총”이며 우리가 추구할 것은 “값진 은총”이라고 보았다. 임박한 기후 위기와 재앙 앞에서 ‘싸구려 은총’은 “그린 워시”에 해당한다. 성장의 욕망에 면책을 줌으로써 성장 담론과의 단절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사복사화의 설교”를 행한 예수는 탈성장 옹호자다. 성장 담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을 복 있는 자들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동학의 삼경사상과 생태주의

해월은 동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평민의 철학, 생명의 철학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해월이 공경의 대상으로 설법한 것은 3가지로서 하늘과 인간과 사물이었다.(三敬) 해월의 삼경 사상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먼저 섬기는 공경의 철학, 마음의 생태학의 복원, 그리고 물질의 신성함의 회복을 통해 금융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신문물(新文物)’의 창달을 기대해 본다.

다람쥐회 대안경제모임_『세계사의 구조』 3회(online)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2012, b)에 관한 대안경제모임이 2022년 1월 12일(수) 오후6시 온라인 ZOOM을 통해 진행되었다. 2022년 2월 28일(월)로 예정된 다음 모임에서도 『세계사의 구조』(2012, b)를 이어서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참여 문의: 010.9칠44.칠칠56

[왜 기후위기는 여태 해결이 안 되고 있는가 -CCC의 비밀을 찾아서] ④ 기후위기 해결에 심리학이 중요한 이유는? (下)

인간이 기후위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로, 진화심리학적 요인이나 기타 인간 내부의 심리적 요인들도 있으며, 사회적 침묵, 언어의 문제, 복잡하고 다면적 문제라는 기후변화 자체가 가진 문제들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유나 이야기, 종교가 주는 교훈을 통해 여러 편향과 장애를 극복하며 기후문제를 알릴 수 있다.

기독교 기후 결사 가능한가?

현재의 고탄소 소비사회를 구축한 원동력은 성장에 경도된 욕망이다. 그러므로 탄소중립 사회로 전환하여 임박한 기후재앙을 극복하기 위한 결정적인 과제는 성장에만 고정된 욕망의 전환을 이뤄내는 것이다. 욕망의 전환이란 주제는 철학과 종교의 본령이다. 이런 점에서 기후 위기, 기후재앙을 극복하는 기후 결사의 조직은 현재의 삶만이 아니라 미래에서도 영속 가능한 삶을 목표로 삼는 기독교 신앙의 절실한 과제가 된다.

[불교기후행동] 기후위기시대, 예토(穢土)의 땅에서 정토(淨土)를 일군다

코로나19는 성장주의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오늘날의 삶이 불교의 전도몽상임을 깨닫게 하는 역행보살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통해 인간중심주의와 소비주의의 업식을 끊어내고 소박한 생태적 삶으로의 대전환을 일구어 내야 한다.

커먼즈를 지키기 위한 기독교적 반란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읽고

자기의 소유로 된 토지라 하더라도 빈틈없는 자기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 자신의 토지 안에서 남과 함께 사용해야 하는 공통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상생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구약성경의 전통에서 말하는 인간과 삶의 거룩함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러한 신앙에 기반하여 공유지를 빈틈없이 사유화하려는 종획운동에 맞선 반란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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