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하의 사유정원]⓶국가 그리고 자율적 공동체

인류는 정착이 시작되고도 4천여 년 이상을 국가 없이 부분적 정착농업, 수렵채취, 화전, 유목 등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자율적 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자율성은 국가를 비롯한 어떠한 권력도 사람과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명 그 자체의 내재율이다. 이는 생명이 우주적 신령스러움에 기반하여 탄생하고 소멸하며 지속한다는 우주적 본성에 기초한 것이다. 이에 비해 국가를 비롯한 권력이 지배하는 현대문명은 외재율(外在律)의 문명이며, 이 문명을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들과 공동체적 삶은 국가권력을 비롯한 권력에 저항하거나 탈주를 모색하는 탈근대문명이다. 이는 내재율에 기초한 자율성의 문명이며 자각과 배움을 통한 공진화(共進化)의 길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 자유의 미래는 국가라는 괴물(Leviathan)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길들이는 힘겨운 작업에 달려있다. 우리는 점점 더 표준화되고 있는 온갖 제도적 모델에 둘러싸인 세상에 살고 있다. 북대서양의 사유재산 모델과 국민국가모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사유재산에 의해 생겨난 부와 엄청난 불평등에 맞서서 그리고 국민국가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도 깊숙이 파고든 규율에 맞서서 싸우고 있다. 존 던이 밝히고 있듯이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망적으로 자신의 안위와 번영을 지배자들의 솜씨와 선의에” 맡기게 됐다. 그리고 국가라는 괴물을 길들이기 위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허약한 단 하나의 도구는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또 다른 북대서양 모델 대의제 민주주의다.

제임스 C. 스콧1
영화 『포커스(Focus)』(2015).
영화 『포커스(Focus)』(2015).

글렌 피카라와 존 레쿼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한 『포커스(Focus)』(2015)는 도박과 사기를 주제로 한 영화이다. 주인공인 사기꾼 니키(월 스미스)와 제스(마고 로비)는 조직적인 사기와 도박활동으로 억만금을 털어서 나눈 배당금을 가지고 미식축구장을 찾는다. 그들은 홍콩의 도박꾼 리유안(비디 웡)을 꾀어서,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걸고 마지막 도박을 한다. 모든 재산이 걸린 마지막 게임은, 경기 중인 미식축구선수 중 하나를 리유안이 선택하면 제스가 리유안이 선택한 선수의 등번호를 맞추는 것이다. 리유안의 마음 혹은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번호를 맞춘다는 것은 아무리 능숙한 도박꾼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제스는 리유안이 점찍은 ‘55번’을 맞춘다. 니키와 제스는 리유안에게 경기장의 도박에서 잃었던 돈을 포함하여 거액의 돈을 편취한다. 상황이 정리되고 제스에게 니키는 그것이 자신이 설계한 작전에 의해 리유안의 무의식에 ‘55번’을 새겨 넣은 무의식 ‘길들이기’(Domesticated)의 결과임을 밝힌다. 리유안은 마지막 게임에서 제스가 ‘55번’을 맞추는 소리를 듣고 경악하지만, 그 스스로가 길들여져서 ‘55번’을 선택했음을 끝내 눈치 채지 못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국가 안에서 살며 국가에 대해 교육받아 왔다. 무의식중에 ‘국가의 당위성’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 사회의 주류담론들은 국가의 민주적 운영과 근대 국가가 국가답게 정책을 운영하기를 다루는 담론들이다. 대부분의 학문은 암묵적으로 근대국가와 근대문명 사회를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는 인간의 발명품에 불과하며 끊임없는 지배와 개발, 착취와 파괴, 무엇보다도 ‘생명 죽임의 문명’을 일구어 온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간과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근대문명에 대해 성찰할 때 반드시 전근대국가의 역사를 포함한 근대국가를 성찰적으로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국가 안에서 혹은 국가를 잘 통제함으로써 근대문명을 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하나 있을 수 있겠지만, 또 한편에는 국가의 해체와 탈주를 통해 근대문명을 넘어가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이때 근대국가의 해체 혹은 탈주는 국가가 추구해 온 밀집된 시간과 공간을 전제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국가가 점령하지 못할 정신적 시공간과 민초들 간의 유대의 시공간을 의미한다.

‘어떤 국가 혹은 정부를 세우고 운영할 것인가(어떤 국가와 정부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의 문제설정이 아니라 ‘국가 혹은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길은 무엇인가?’ 나아가 ‘인간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자치 능력을 끌어올리는 길은 무엇인가?’의 문제 설정은 확연히 다르다. 근대적인 사회운동이 국가를 세우거나 국가 내부에서 국가의 통치내용에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라면 -이것은 당연히 국가중심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중심에 둔다- 탈근대적인 사회운동은 국가를 넘어(현대사회에서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국가 밖은 드물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자치운동과 같은 국가를 벗어나려는 탈국가적 지향과 정신의 세계는 존재한다) 삶의 공동체를 구축하고 연대하며 국가의 힘에 저항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

고대 중국에서 한족과의 경쟁(투쟁)과정에서 밀려난 조미아들은 중국 남방으로부터 베트남·라오스·태국·미얀마 북부와 인도 동북부까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동하며 자율적 공동체의 삶을 살아왔다. 사진은 베트남 북부의 산악지역. by 류하
고대 중국에서 한족과의 경쟁(투쟁)과정에서 밀려난 조미아들은 중국 남방으로부터 베트남·라오스·태국·미얀마 북부와 인도 동북부까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동하며 자율적 공동체의 삶을 살아왔다. 사진은 베트남 북부의 산악지역.
by 류하

제임스 C. 스콧은 『조미아, 지배 받지 않는 사람들』 이라는 저작을 통해서 동남아시아로 지칭되는 지역의 국가와 비국가 산악부족간의 관계를 고찰한다. 이를 통해 스콧은 국가가 비국가 사람들을 ‘문명으로’ 길들이는(Domesticate) 행위와 자율적 공동체로서의 비국가적 산악부족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심도 깊게 추적한다. 조미아(Zomia)라는 말은 ‘동떨어진(Zo) 사람들(Mi)’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에서 한족과의 경쟁(투쟁)과정에서 밀려난 조미아(窵徾峩;필자주)들은 중국 남방으로부터 베트남·라오스·태국·미얀마 북부와 인도 동북부까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동하며 자율적 공동체의 삶을 살아왔다. 그들은 수렵채집, 이동경작, 유목 등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면서 이 지역의 국가만들기 프로젝트와 끊임없는 접촉하고 저항 및 탈주하며 자신들의 삶을 이어왔다.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2에서 “권력이라는 정치적 관계는 착취라는 경제적 관계에 선행하며 그것을 만들어낸다. 소외는 경제적 소외이기 이전에 정치적 소외이다. 권력은 노동에 선행하며, 경제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의 파생물이고, 국가의 생성이 계급의 출현을 규정한다.”고 주창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제임스 C. 스콧이 『조미아, 지배 받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류가 살았던 대부분의 시기에 ‘국가는 인류에게 그리 다가오지 않았던 세계임’을 확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스콧은 국가 밖 비국가 인류의 입장에서 국가와 비국가 변방의 관계역사를 단순화하여 다음의 네 시기로 나눈다. ⓵국가가 없던 시기(가장 오래된 시기), ⓶작은 규모의 국가들이 있었던 시기(국가 바깥의 변방이 광활하게 뻗어 있고 거기에 쉽게 다다를 수 있었던 시기), ⓷국가권력이 팽창하여 변방이 줄어들고 사면초가에 몰려 있던 시기, ⓸사실상 전지구가 ‘행정적 공간’이 되고 변방이 민속적 유물로 전락한 시기이다. 눈치 챘겠지만 국가가 인류의 대부분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극히 작은 시간에 불과하다.

스콧에 의하면, 국가가 생기기 전 인류는 정착이 시작되고도 4천여 년 이상을 국가 없이 부분적 정착농업, 수렵채취, 화전, 유목 등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자율적 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국가가 생긴 이래 국가의 유지를 위한 잉여생산물과 징세를 목적으로, 다른 국가의 침입에 대응하고, 노예노동력을 수급하기 위한 징병의 대상으로, 인류에게는 강제적으로 국가영향력 범위 내의 정착이 강요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한 노동력 밀집은 도시의 형성을 촉진했다. 이것은 수렵채집 생활에서 징세에 유리한 곡물농업으로의 강제적 전환을 의미한다. 또한 곡물농업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노예사냥을 필수로 하였는데, 국가의 필요를 대변하는 노예 사냥꾼들이 국가 밖의 사람들을 노예로 포획함으로써 정착지 노예시장에서 교환되었다. 대체로 아테네처럼 노예의 숫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숲이나 늪지 주변으로부터 끌려온 사람들의 삶은 늘 국가영역과 비국가 영역을 넘나드는 유동적 삶이었다. 정착지의 밀집생활과 곡물농업은 빈번한 전염병의 창궐, 곡물농업의 실패(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병해 등으로 인한), 전쟁과 같은 외부의 침입과 늑탈, 과도한 징세와 부역 등을 당할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떠나 국가의 영향력이 미치기 힘든 산이나 늪지, 사막 등으로 다시 탈주하게 하였다. 탈주한 사람들은 탈주지에서 생활하는 자율적인 공동체에서 수렵채집, 화전과 같은 이동경작, 유목, 때로는 정주국가에 대한 약탈 등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며 그들만의 문화를 이루면서 살았다. 그들은 위계를 거부하였고 삶은 평등하였으며 서로 의지해 살아가는 자치공동체였다.

스콧이 보기에, 산악민들을 비롯한 국가를 회피하는 사람과 공동체의 삶과 문화는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특징이다. 베트남의 산악민족인 흐몽족. by 류하
스콧이 보기에, 산악민들을 비롯한 국가를 회피하는 사람과 공동체의 삶과 문화는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특징이다. 베트남의 산악민족인 흐몽족.
by 류하

비국가 영역의 공동체는 국가로부터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평화시기에는 국가에 산지의 귀중품을 제공하고 문명의 물품을 교환하는 시장을 통해 교류하기도 하였다. 불교나 이슬람, 기독교 같은 국가종교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정령신앙에 결합시키기도 하였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국가 영역의 밖에 있으면서 국가와 관계 맺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삶의 가장 기초는 국가의 폭력과, 징세, 징병, 규율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가가 추구하는 문명을 거절하고 자율적인 삶을 이어왔다. 근대문명으로 전환되는 시기에도, 그리고 지금도 국가는 문명을 자기 동일시하며 비국가 영역의 공동체들을 부족화하며 규정하고 지배하고자 하였다.

“지난날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 행정가들은 신민들에게 부과한 새로운 세금부담을 정당화 하면서 ‘문명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대가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이 어처구니 없는 허위주장을 통해 세 가지의 계략을 보기 좋게 포장했다. 우선 그들의 신민을 효과적으로 ‘문명 이전 사람들’이라고 묘사했고, 나아가 제국주의적 열망을 식민지에 실현시키려 했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문명’을 사실상 국가 만들기와 동일시했다.”3

국가의 이러한 ‘문명 자기 동일시’와 비국가 영역에 대한 문명적 지배(?!) 의욕은 산악민(Zomia;masif)을 진화의 초기 단계의 사람들이자 문명 ‘이전’의 사람들로 규정하는 것이다. 벼농사 이전, 도시 이전, 문자해득 이전, 평지신민 이전의 사람들로 규정한다. 그러나 스콧이 보기에 산악민들을 비롯한 국가를 회피하는 사람과 공동체의 삶과 문화는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특징이다. 오히려 그들은 관개 벼농사 이후, 정주(도시) 이후, 신민 이후, 문자해득 이후의 사람들이며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국가의 세계에 적응해 온 사람들의 반작용적 의식적 비국가성을 상징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면 비국가 영역의 중요가치인 ‘자율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율성은 국가를 비롯한 어떠한 권력도 사람과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명 그 자체의 내재율(內在律)이다. 그것은 생명이 우주적 신령스러움에 기반하여 탄생하고 소멸하며 지속한다는 우주적 본성에 기초한 것이다. 자연(우주)에 기반하지 않은 국가와 모든 권력의 행위는 인간과 생명에게 외재율(外在律)로 작동한다. 현대문명은 국가를 비롯한 권력이 지배하는 외재율의 문명이며, 이 문명을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들과 공동체적 삶은 국가권력을 비롯한 권력에 저항하거나 탈주를 모색하는 자율적문명이다. 이는 내재율에 기초한 문명이며 자각(自覺)과 배움(學)을 통한 공진화(共進化)의 길을 지향한다. 률(律)은 동아시아에서 우주적 운율(韻律)이자 사람들의 관계적 자치(自治;Self-Governance)에서 교감과 소통을 의미하는 자율(自律)이다. 그런 의미에서 탈근대 문명전환에 있어 주어적 키워드가 ‘생명(우주)’이라면 그것의 본성을 의미하는 사람의 키워드는 자율(自律;자유가 아니라!)이다. 지금은 ‘생명’과 ‘자율’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국가와 근대문명이라는 습지(濕地)를 벗어나는 것을 모색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국가 너머의 탈근대적 생명공동체라는 육지(陸地)를 넘나들며, 삶의 터전과 문화를 일구고 자율성을 신장시키는 양서류(兩棲類)적 운동이 모색될 시점이다.

  1. 『조미아, 지배 받지 않는 사람들』, 제임스 C.스콧, 이상국 옮김, 삼천리, 2015

  2.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홍성흡옮김, 이학사, 2005,

  3. 『조미아, 지배 받지 않는 사람들』, 제임스 C.스콧, 이상국 옮김, 삼천리, 2015

류하

원주에서 근대문명을 넘어갈 요량으로, 이런 저런 고민을 이웃과 함께 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제 이름은 개문류하(開門流下; 문을 열고 아래로 흘러라)에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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