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하의 사유정원] ⓵사람됨과 이웃됨, 그리고 문명됨

풍족하고 온화한 ‘홀로세’(Holocene)의 기후환경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인류문명이 자신의 의지대로 지구를 역규정하고 힘을 가하기 시작한 시기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이성과 근대는 국가주의로 점철되어 있으며, 우리는 가까이를 아끼고 보살피는 ‘이웃됨’과 영적 충만함으로서의 ‘사람됨’의 원리로부터 멀어져 왔다. 이 글은 영적 풍요로움과 자치와 자율의 공동체를 통해 사람됨과 이웃됨에 이르는 사상적인 경로를 탐색한다.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인류의 삶을 전변시킨 문명의 창조자이자 수혜자이다. 그러나 이문명은 현란한 과학과 물질문명으로 우리의 욕망은 충족시킬지 몰라도 인류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인류를 절멸상태로 몰고 갈 문명인지도 모른다. 현생인류의 조상격인 고인류(Homo Sapiens)가 등장한 홍적세(약 250만~1만 년 전)말까지만 하더라도 지구는 자연(우주)력에 의해 움직였다. 그러나 4~5만 년 전 현생인류(Homo sapiens sapiens)가 등장하고,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따듯한 기후 아래 홀로세가 시작되자 현생인류는 지구 전체로 활동공간을 넓히면서 지구는 자신에 영향을 미치는–자연력을 위협하는-강력한 경쟁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지만 종(種)의 확산과 활동량의 증대는 점점 자연의 질서를 넘보기 시작했다.

이 문명은 현란한 과학과 물질문명으로 우리의 욕망은 충족시킬지 몰라도 인류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by Andre Be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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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명은 현란한 과학과 물질문명으로 우리의 욕망은 충족시킬지 몰라도 인류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by Andre Benz

지질연대표에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 이행과 시대명명은 자연 그 자체의 점진적 발달이거나, 혹은 지구외부의 우주로부터이거나, 아니면 지구 내부로 부터의 거대한 힘의 작용에 의해 벌어진 것이자 그 자연스러운 변화를 기준으로 한 명명이다. 그러나 적어도 ‘산업혁명이후에 인류가 지구시스템에 미치는 영향력은 자연의 힘과 겨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시스템에 남기는 흔적은 광범위한 풍화, 화산활동, 운석충돌, 태양의 활동과 같은 물리적 힘들과는 다르게 자연의 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새로운 ‘자연의 힘’에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의지의 작용이다.’1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명은 의지의 산물이다. 인간 사유를 실현하려는 의지! 그것은 이성에 근거해 있으며 의도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의지의 결과물이다. 이 의지와 의지의 결과물이 작동하며 지구지질에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친 시대를 ‘인류세’라고 명명하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하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익과 효용도, 우리가 불평하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 시스템도, 우리의 의지의 산물이다. 인류학자 제임스 C.스콧은 『농경의 배신』에서 인류가 국가를 개발하고 국가권력의 유지를 위한 – 재정을 위한 징세(徵稅)와 징세에 유리한 곡물농업으로의 전환 그리고 잉여생산물을 위한 노예조달 전쟁을 강제 하였다고 분석하면서–정착중심의 국가 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풍요로운 수렵채집생활의 붕괴와 저항의 역사를 입증한다. 스콧의 논지는 현대문명이 형성되기까지 끊임없는 의지를 발휘한 주체가 『인류세』의 저자가 말하는 ‘의지의 작용’의 주인공과 동일체임을 시사한다. 스콧은 끊임없이 국가통치영역에 강제로 길들여진 정착민과 도시문명의 허약성을 지적하며 변방의 비국가영역에서 자율적 자치공동체를 구성하고 살아온 조미아(Zomia)들에 주목한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의 산지(masif)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미아들은 단순히 소수민족(부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착중심의 국가문명에 대항하여 국가의 경계 밖에서 국가의 팽창에 저항하여 수렵과 채집, 화전, 유목 등을 하면서 소규모의 공동체와 자율적인 자치와 연대에 의해 살아가는, 그리고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공동체들의 네트워크이자 역사적 현존체이다. 권력의 문자를 가진 국가가 기록의 역사를 가진 반면에,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이동과 이합집산에 의해 문자기록을 잃어버림으로서 역사로 기록되지 못하였을 뿐이다.

국가를 중심으로 한 자연파괴적이고 사회적 차별의 근대문명을 넘어서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다양한 길이 제시되고 있으나 실제현실은 기후변화협약조차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현실에서 가장 실천력 있고 빠른 해결방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힘에 의지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기후변화협약은 협약의 주인공도 국가이고 기후변화협약의 구체적 정책을 입안하는 것도 국가이다. 당연히 국가가 기후협약에 응해 제대로 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도록 하는 사회운동이 주요한 일이 된다. 이는 다시 국가권력을 움직이기 위한 물리력(여론형성을 위한 활동과 집회 동원력)이 중요하거나 정치적 교섭능력이 중요하기에 정치적이게 된다. 그러나 문제를 다시 사유해 보면 고대국가와 달리 근대국가는 배타적 폭력을 독점한 상태에서 자본과 결탁하여, 혹은 사회주의 국가처럼 독자적으로 현대문명을 이끌어온 주범이다. 이들 국가권력을 강제할 힘이 형식적(민주주의)으로 민초들에게 있다고 하지만 인류역사를 돌아보건대 국가를 통해 현대문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회의적 일이라고 생각된다.

현대문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의 창조는 국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지만 민초(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칼 야스퍼스는 기원전 8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인류의 정신적 진화의 결실이자 인류진화의 축으로서 차축시대(Achsenzeit; Axial age)가 지구상에 성립되었음을 주창하였다. 그것은 ‘사람됨의 길’이 이 시기에 제시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됨의 길(진화의 방향)이 제시되었을 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사람됨에 이르렀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퇴화했는지도 모르겠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이 사람이 되어 환인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처럼 전 세계에는 ‘사람됨’의 신화가 많이 있다. 근대문명은 인간 이성으로 사람됨과 문명됨이 달성 될 수 있다는 신화에 갇힌 문명이다. 그러나 인간이성과 주체, 국가권력과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로 만든 근대문명은 이제 우리 앞에 우리가 넘어야 될 과제로 다가와 있다. 우리는 사람됨의 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전통적인 개념의 민(民)이란 것도 국가권력에 의지해 만들어진 개념이지 국가권력을 벗어나고자 하는 개념으로는 부적절하다. 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이 민이어야 하고 민의 사유와 실천의 방향이 국가를 향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신령스런 자신(사람됨)과 이웃(이웃됨)을 향해야 한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하나이다.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이다. 이웃은 사람만이 아니라 천지만물이다. by Elaine Casap 출처 : https://unsplash.com/s/photos/community

사람이나 자연이나 하나이다.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이다. 이웃은 사람만이 아니라 천지만물이다.
by Elaine Casap

인간이성 중심의 인간우위의 철학을 가지고는 우주만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문명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탈근대적 ‘사람됨’이란 우주만물을 전역사적이고 전일적으로 바라보고 교감하는 생명됨의 철학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장자의 제물론에 보면 “천지여아병생(天地與我竝生)하고 이만물여아위일(而萬物與我爲一)이니 기이위일의(旣已爲一矣)에 차득유언호(且得有言乎)아?(하늘과 땅이 나로 더불어 함께 났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하나를 이루니 이미 하나를 이루었는데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는 말이 나온다. 인간 우위의 주체철학이 아니라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신령스러운 철학이 근대문명을 넘어서 새로운 문명으로의 진화와 ‘사람됨의 길’로 안내할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장일순이 깨쳤던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을 깨우칠 수 있고 ‘이웃됨’에 이를 수 있다. 선불교의 승조스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천지만물여아동근(天地萬物與我同根;하늘과 땅의 만물이 나와 한 뿌리)이요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만물이 나와 한몸)’라 했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하나이다.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이다. 이웃은 사람만이 아니라 천지만물이다. 근대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웃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리게 한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와 율법학자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에 대해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이웃됨’을 설법한다.

(도입부 생략)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예수께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소.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마구 때려 반쯤 죽여 놓고 가버렸소. 마침 한사제가 그리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해서 지나갔고 레위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해서 지나갔는데 길 가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서 기름과 술을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고 자기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봐주었소.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여관주인에게 주며 ‘저 사람을 돌봐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으리다’ 부탁하고 떠났소. 자,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오?” 율법학자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지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당신도 그렇게 하시오”

이현주 역 《신약성서》 누가복음 10;25-37

인류에게 ‘이웃됨’은 아주 오래된 영적 진화의 과제이다. 우리는 새로운 문명을 일구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더불어 ‘사람됨의 길’을 걷고 ‘이웃됨의 길’을 걸으며 곳곳에서 정치보다는 자율적 자치를 구현할 것인가의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문명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명됨’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일임을 확인하는 일이다.

  1. 클라이브 헤밀턴(Clive Hamillton), 『인류세』(장서진 옮김, 이상북스, 2018)에서 요약 인용함

류하

원주에서 근대문명을 넘어갈 요량으로, 이런 저런 고민을 이웃과 함께 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제 이름은 개문류하(開門流下; 문을 열고 아래로 흘러라)에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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