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의 손으로 일구는 마을관리기업

노느매기는 노숙 유경험자들이 모여서 경제적・정신적인 자립을 꿈꾸며 만든 마을기업이자 협동조합이다. 조합원 다수가 건설일용직 경험자들이기도 한 노느매기의 특성을 살려서, 지난해에는 집수리를 대행하는 마을관리기업 ‘공간1616’을 만들었다. 비록 세상살이에 조금씩 하자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지만, 또 다른 하자있는 존재들을 만나서 외로움과 결핍이 채워지는 마을살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아이고, 시체 치우러 갔다가 살인범으로 몰린 기분이야”

마을의 한 카페에 온수기를 설치하러 갔던 노느매기 조합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 마디를 내뱉는다. 갑자기 뿜어 나오는 물벼락을 피해 도망 나오며 비명처럼 던진 말이다. 온수기 설치라는 것이 급수관을 연결하고 전기를 연결하면 되는 간단한 시공이라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노후된 수도관의 다른 부위를 건드려 터지고 말았다. 시공이 끝난 지 하루가 못되어 의뢰자가 다급하게 전화를 해왔다. 다행히 누수 부위를 금방 발견해서 물바다가 되는 대참사는 면했지만, 주방 문 앞에 서 있는 의뢰자의 얼굴에는 당황과 분노,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조합원들과 함께 출동하여 누수부위 긴급 공사를 진행했다. 아울러 노화된 건물에 당연하고 흔하게 생길 수 있는 사고를 사전에 안내를 해드리지 못했음에 머리를 숙여 사과를 드렸다. 오래된 건물에는 한 군데를 건드리면 다른 곳이 무너지거나 깨져 새로운 하자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늘 하나만 생각하고 움직이면 큰일 난다. 현장에서는 하나와 하나가 만나면 둘이 아니라 셋이 되고 넷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좋게 나타나면 시너지요, 나쁘게 나타나면 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수리와 병렬을 통하여 공간을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또한 물자와 물자가 만난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은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일을 함에 있어 부정적인 변수를 최소화하는 능력이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한다면 사실 노느매기는 아직 프로가 아니다. 아니 사실 마이너스의 손에 가깝다. 손을 대면 터지고, 새고 갈라진다. 어떤 만화를 보니 손을 대기만 하면 고장나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 능력으로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사람이 별명이 마이너스의 손이란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능력이 거의 모든 조합원들에게서 매일 발휘될까. 변화무쌍, 버라이어티를 넘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공구를 싣고 차에 올라타는 아침을 시작한다. 왜냐면 결국 우리 집은 실패라는 벽돌로 짓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자있는 우리가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는 돈을 받고 서비스만 해주는 프로 기사가 아니다. 우리는 마을을 관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공간과 삶을 새롭게 나눠주는 노느매기다. 그런 생각 속에서 일반 업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사진 노느매기 제공.
우리는 돈을 받고 서비스만 해주는 프로 기사가 아니다. 우리는 마을을 관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공간과 삶을 새롭게 나눠주는 노느매기다. 그런 생각 속에서 일반 업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사진 노느매기 제공.

하자의 반의어를 찾아보니 완벽이란다. 우리는 그 완벽함을 아직 가지진 못했다. 하지만 마이너스의 손들이 고쳐나가는 마을에는 마이너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공업체와 의뢰자 사이에 일어나지 않았던 새로운 관계들을 일으켜나간다. 마을은 우리를 서비스 구매자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함께 일구어 나가는 동료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의뢰하는 이들의 삶에서 벌어지는 여러 고장과 하자를 우리는 일감을 넘어 사람의 이야기로 바라본다. 가격을 지불하고 무표정하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라지는 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삶의 전기를 남겨간다.

완벽의 반대인 하자(瑕疵)라는 말은 본래 옥에 묻어있는 얼룩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자 있는 공간과 물건들을 치우고 닦고, 다시 배열하고 구성하여 본래 이 공간, 물건과 사람들의 삶이 고장나고 버려진 것이 아닌 얼룩진 ‘옥’이었음을 발견하게 한다. 장소와 사람을 이어주는 노력 속에 우리는 얼룩을 닦아내고 있는 것이다.

취약계층의 집수리를 담당하는 돌봄SOS를 하다보면 많은 하자있는 삶과 고장난 물건, 방치된 공간을 만난다. 그것들은 당연히 수리되지 못한 채, 정리되지 않고, 혹은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상태로 버려져 있다. 쌓여있는 수많은 물건들을 치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을 만난다. 아직 얼룩이 닦여 있지 않은 물건들은 쓰레기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여정을 시작한다. 이 쓰레기라는 하자있는 물건들이 쓸모와 의미를 부여할 사람을 만나고, 공간을 만나며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낼 때 그것은 본래의 옥이 되어가는 것이다.

하나만 생각하고 덤비면 큰 코 다치는 곳이 현장인 것처럼, 현장의 쓰레기들 하나를 볼 때도 한 가지 눈길만, 한 가지 생각만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하나의 현장을 바라보면 다른 곳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끼이익-” 물건이 잔뜩 쌓여있는 한 집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조현병을 앓고 있는 오빠와 여동생이 단 둘이 살고 있다고 구청에서 말해줬다. 방마다 잔뜩 버려진 하자들, 아니 솔직히 쓰레기들이 쌓여있었다. 심지어 이들 남매는 아침마다 얼굴을 씻는 세면대조차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금이 가고 무너져버린 폐가에 가까운 공간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하나 쓰레기를 치워가는데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20대의 두 남매가 사용한다고 보기엔 의심이 가는 물건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물을 다듬는 소쿠리, 커다란 냄비와 반찬통, 오래된 꽃무늬 몸빼 바지들.

정리하다가 거들고 있는 여동생에게 물었다. “이 짐들은 본인이나 오빠가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인데 왜 방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나요?” 어렵게 여자분은 입을 열었다. “엄마…”, “엄마 물건이에요.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엄마가 쓰던 물건들을 치우면 그나마 마음속 엄마의 자리가 사라질 것 같아 도저히 치우질 못하겠어요.” 물건을 만지기 이전에 마음을 만져야 하는 자리였다. 이야기를 알고 나니 하나하나 쓰레기 속에서 얼룩진 옥의 흔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정리를 해나갔다. 그 와중에 내 눈길은 남매가 씻고 싶어도 씻지 못하는 욕실의 금간 세면대 위에 머물렀다. 사실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비용은 한정되어 있다. 충분하게 원하는 걸 해줄 수 있는 비용이 애초에 아니다. 그러나 상투적인 말 하나에 의지해보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비록 노후된 건물의 수도관처럼 전등 하나, 방충망 하나를 갈러 왔을 뿐인 우리들의 눈에는 어찌도 매일 매번, 이 많은 하자있는 사람들과 물건들과 공간만 만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날로 강해진다. 우리는 돈을 받고 서비스만 해주는 프로 기사가 아니다. 우리는 마을을 관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공간과 삶을 새롭게 나눠주는 노느매기다. 그런 생각 속에서 일반 업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나 보다.

먼지가 쌓여 부서진 곳도 잘 보이지 않는 세면대를 찬찬히 살폈다. 다행히 큰 공사 없이도 세면대만 있으면 벽에 설치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그렇지만 새 세면대를 구입할 여력이 없다. 그 때 불현 듯 지난 주 철거현장에서 주워온 세면대가 생각났다. 옥의 하자를 닦듯이 세면대를 닦아서 붙여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철거된 세면대를 달아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면 허락해달라고. 그리고 세면대가 욕실에 달렸다. 다행히도. 이렇게 하자있는 사람과 물건들이 서로 이어져 옥이 되어가는 일들이 마을 안에서 노느매기를 통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가는 곳마다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기억을 되짚는다. 이것들이 서로 이어져 하자를 닦고 사용될 옥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는 쓰레기인지. 새롭게 눈을 뜨고 나니까 내 눈에 보이는 옥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모처럼 늦게까지 도배와 공사를 마치고 조합원들과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음식점 냉장고 위에 알미늄 판넬조각이 얹혀져 있었다. “사장님 이거 버리는 거예요?”, “공사하고 남은 건데 쓸데없어서 거기 그냥 올려놨네”, “이거 우리 주세요.”, “가져가서 또 누구 고쳐줄라고?, 잘 되었네. 얼른 가져가셔” 그날로 삼겹살집의 기름 묻은 판넬은 깨끗이 닦여져서 남의 집 부서진 현관 문지방을 지탱하는 최고의 주옥같은 받침대로 살아났다.

우리가 마을에서 돌아다니면서 하고 있는 돌봄의 작업들 속에는 물건만, 사람만 한시적으로 배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가스레인지가 자동으로 소화되는 가스타이머를 설치했더니 어떤 노인들은 30분 만에 자꾸 불이 꺼져서 곰탕을 끓이기가 불편해졌다고 말씀하신다. 또 어떤 어르신들은 약을 달이는 도중에 설치했던 가스타이머가 고장나서 그만 약재가 형편없이 졸아버려서 긴급히 고장신고를 하기도 하신다. 그 모든 순간 속에서 우리는 돈을 주고 가스타이머를 설치하는 업체로 끝나지 않는다. 긴급하게 타이머 회사 사장님이 달려오신다. 타이머를 설치한 우리들도 달려간다. 휙휙 말없이 고치고 떠나지 않는다. 사골이 고아지지 않는 안타까움을 웃음으로, 비싸게 산 약재가 졸아들어버린 현장은 안쓰러움과 미안함으로 현장을 지킨다. 돈을 매개로 만나는 업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다시 또 얼굴을 보고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할 마을의 주민으로 우리 모두가 만나는 것이다.

철거 현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수도꼭지를 가지고 온다. 마을에서 박스를 줍던 할머니가 조아리며 제안하신다. “나 이 수도꼭지 받아서 고물상에 팔게 해줘” 그렇게 할머니는 노느매기 공간1616에 조합원만큼 자주 오는 마을 주민이 되어 가신다. 철거 물자를 옮기기 위해 트럭을 불렀다. 노느매기 사무실이 있는 산업선교회 마당을 보더니, 트럭 운전사분이 옛날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노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물건 하나로, 사람 하나로 혹은 하자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물건도 사람도, 하자도 조직되고 수리되고, 재구성되어 가면서 결코 정적이지 않은 마을이라는 공간을, 결코 무감하지 않은 ‘관리’라는 말에 생명을 부여해가고 있다.

박상호

사회적협동조합 노느매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노느매기는 경제적취약계층 남성 독신가구들이 모여 사회적 관계망을 만들고 스스로 돕고 성장하며 마을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창립된 협동조합입니다.
영등포구 주민이 되고 싶은 강서구민이며 새로운 탐험을 좋아하고 매사에 열정적으로 임하며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에너지를 찾아내는 것을 활력으로 여기며 즐겁게 살아가는 중년입니다.

이태훈

은강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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