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합니다] ④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이라는 지향(1)

야마기시즘은 중심 이념으로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의 원리를 제안한다. 공동분배나 공동소유가 아니라 ‘무소유’를 대안사회의 구성 원리로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실제로 ‘무소유’가 종교적 실천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서 가능할까?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시대에 있어 소유문제

부동산 정책이 말썽이다. 임기 말에 접어든 민주당 정권은 결국 부동산 정책 기조를 ‘규제 완화’로 잡을 모양새다. ‘주택 공공성 강화’와 같은 의제들을 전면에 걸고 부동산 정책에 있어 기존 보수정권과 차별성을 갖고자 했던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결국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부동산 정책은 발표할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섰고, 집값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민주당 정부가 지닌 개혁 의지의 명분이 되어주었던 부동산 문제는 정작 민주당 정치인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어버렸다. 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 후보자의 부동산 문제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시민들의 기억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같은 현상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안정적이고 낙관적인 미래적 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부동산은 이 와중에 가장 확실한 개인의 자기 보호 수단이 되었다. 한국지방세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초과이득(임대소득+실현 자본이득-정상소득(부동산이 아니라 금융자산에 투자하는 경우 얻을 수 있는 소득))은 184.5조원으로 GDP 대비 9.7% 수준이 된다. 이 정도면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이 가장 예측 가능한 긍정적인 전망의 투자인 셈이다.

부동산이 가장 확실한 투자의 대상이자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강화된 불평등 문제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사는(live) 곳이 아니라 사는(buy) 곳이 되어버린’이라는 주택에 대한 수사는 작금의 문제를 드러내는 흔한 비유가 되었고, 부동산을 소유한 이들의 소득이 되어버린 임대료는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에 치명적인 주거비 지출이 되었다. 이렇듯 불평등 문제의 상징이 되어버린 부동산 문제는 한편으로는 우리사회의 불평등 문제가 기후위기와 같은 환경문제와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연결고리가 되기도 한다.

2018년 부동산에서 발생한 초과이득은 180조가 넘는다. ‘소유’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한 이익이다. 한국사회 불평등의 중심에는 부동산이 있다.  by snappygoat 출처: https://images.app.goo.gl/fVmtJqaGunhgbpmE7
2018년 부동산에서 발생한 초과이득은 180조가 넘는다. ‘소유’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한 이익이다. 한국사회 불평등의 중심에는 부동산이 있다.
사진 출처 : snappygoat

부동산 소유에 따라 만들어지는 이해관계는 우리 사회 정치를 구성하는 핵심 기반이 된 것 같다.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겨레신문과 한국정치학회가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서, 집을 소유한 이들과 소유하지 않은 이들 사이에 지방선거 관심도와 투표의지 모두 10% 이상 차이가 났다. 지방선거에 대한 관심과 투표의지가 10% 이상 높은 쪽은 모두 자가거주자, 즉 집을 소유한 이들이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정주성이 보장된 이들이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이 더 높다는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이러한 결과에 의해 자산으로서 기능하는 주택과 부동산의 교환가치 상승이 정치적 이해관계의 중요 변수라는 가설 역시 유력한 지위를 획득한다. 실제로 ‘집값’, ‘땅값’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만큼 중요한 정치적 동기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도시사회학자 하비 몰로치(Harvey Molotch)는 도시정치를, 성장기계를 이끌며 지가상승을 통한 교환가치 상승을 추구하는 성장연합(Growth Coalition)과 사용가치를 추구하는 반성장연합(Anti-Growth Coalition)간 투쟁의 장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현재 이전의 도시개발 정책에 대해서 대안적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 도시재생 사업 역시 이러한 도시정치적 긴장 안에서 해석이 가능하며, 이러한 관점에 힘입어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사용가치를 옹호하며 조직된 반성장연합이 도시정치의 긴장을 만들어내는 사례를 찾기가 힘들어졌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부동산 소유가 가장 안정적인 생존의 수단이 되고, 부동산 소유자의 교환가치 상승이 가장 강력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작동할 때, 우리 사회의 ‘먹고 사는 문제’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왜곡을 경험하게 된다. 기후위기,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 미세먼지 문제와 같이 장기적인 관점에서(이제는 더 이상 장기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 문제가 확인되고 해법 역시 모색할 수 있는 것들은 당장의 교환가치 상승을 중심으로 한 이해관계에 압도된다. 땅값, 집값 올리기 위해 개발은 필요한 것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최적의 해법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설과 토건은 미세먼지 오염원과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대표적인 산업이지만 어떤 정치적인 대안도 이 같은 산업의 축소를 주장하지는 않게 된다. 게다가 기술적인 해법이 미래를 구원할 것이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기대를 자극하는 것이 정치의 기술이 되고, 이러한 기술적인 해법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 경제적 돌파구가 된다. 그리고 당연히 부동산은 그 중심에 있다.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와 기후위기 문제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열쇳말로 이른바 ‘소유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동산을 포함해 사적 소유를 중심으로 한 사회 제도와 정치 문화를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불평등과 기후위기라는 중대하고 치명적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야마기시즘의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

이러한 문제의식에 비추어볼 때, 야마기시즘이라는 사회기획이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이라는 원리를 중심 이념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세계의 생태마을 실험 가운데 ‘무소유’를 이념이나 경제 체제로 삼는 곳은 거의 없다(송명규, 2000). 나는 이 점이 야마기시즘이라는 사회기획과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 수행된 반세기 가까운 실험이 종합적인 사회기획으로서 지닌 매우 독특한 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이 야마기시즘이라는 이념과 그 장소적 실험으로서 실현지의 경험이 주로 생태공동체라는 맥락에서만 해석되는 것을 아쉬워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야마기시즘이 지향한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의 사회 원리는 실현지에서 몇 가지 원칙을 통해 구현된다. 첫째, ‘돈지갑 하나’의 일체경영이다. 야마기시즘 실현지 안에서는 개인의 소유 재산이 없다. 실현지라는 단위에 돈지갑은 말 그래도 하나가 있을 뿐이다. 둘째, 이러한 일체경영의 원칙은 무급료, 무분배의 형태로 귀결된다. 야마기시즘 실현지의 구성원에게는 노동에 대한 임금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쯤 되면 대체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가능할까 궁금해질 수 있다. 자기 재산도 없고, 임금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생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 여겨지는 의식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여기 야마기시즘 실현지에 살고 있는 A가 있다. A는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의 생활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의 인물이다. A는 야마기시즘의 이념에 동조하여 실현지 생활을 하고자 자기의지로 참획을 결정했다.(야마기시즘은 실현지에 들어와서 살고자 하는 행위를 참획(參劃)이라 지칭한다. 계획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A는 자신의 전재산을 야마기시즘 실현지에 내어놓는다. 재산의 크기 등 관련된 일체는 참획자인 A의 지위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A는 1인 가구로서 전용공간인 방을 하나 사용한다. 방에는 TV와 침구류, 책상 등의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물품들이 존재한다. A는 양계부에 배치된다. 양계부는 A의 직장이다. 그는 일과시간을 양계부에서 보낸다. 식사 때가 되면 실현지의 공동식당인 애화관(愛和館)을 찾는다. 애화관에서 밥을 먹으며 돈을 계산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식사준비는 식생활부가 담당하는데 식생활부 역시 실현지의 직장이다. 일과를 끝낸 A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빨래거리를 빨래함에 분리해서 넣는다. 실현지 구성원들의 빨래를 담당하는 직장은 의생활부다. 그리고 의생활실에는 개인별 옷가지가 정돈되어 있어 샤워 전후, 외출 전후, 사람들은 이 장소를 활용해 옷을 갈아입는다. 저녁을 먹은 A는 마을 로비를 찾는다. 로비에는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고, 신문이나 잡지 등이 비치되어 있다. 역시 비용을 따로 지급하는 일 없이 누구든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의 생활을 아주 단순화하여 그 일면을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A의 하루 생활 중 기본적으로 돈이 드는 일은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개인적인 물품이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텐데, 이러한 경우 해당 물품의 구매를 제안한다. 아무튼 실현지 안에서는 어떤 교환행위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삶의 형태이기 때문에 무급료, 무분배의 원칙 역시 실현 가능하다. 하지만 특별히 이 과정이 매우 검소한 삶을 독려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야마기시즘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이다. 다만 그 풍요로움이 개인의 사적 소유가 극대화되는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야마기시즘의 핵심적 지향이며, 실현지의 삶을 통해 이를 증명한다. 야마기시즘 한국 실현지 의생활실에 붙어 있는 “풀어놓는 삶, 살리는 풍성함”이라는 문구가 이러한 야마기시즘의 지향점을 적절히 설명한다.

무소유, 공용, 공활의 원리는 기후위기 시대에 더욱 빛날 것이다. by Pexels 출처: https://pixabay.com/photos/hands-macro-plant-soil-grow-life-1838658/
무소유, 공용, 공활의 원리는 기후위기 시대에 더욱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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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이라는 야마기시즘 사회의 원리를 수행하는 세 번째 원칙은 그 지향은 오로지 연찬방식을 통해 규명되고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야마기시즘에 있어 연찬은 지적 탐구 과정이자 소통 방식이다. 야마기시즘은 무소유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부동산이나 현금, 현물과 같은 물질적인 대상뿐 아니라 지식, 정보와 같은 무형의 것들을 둘러싼 소유 관념을 해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연찬은 지적 탐구 과정으로서 소유를 둘러싼 관념을 해체하는 데 기여한다. 연찬을 통해 무소유 일체사회를 구현한다는 야마기시즘의 접근은 사적 소유를 둘러싼 제도적 변혁을 우선시한다거나 개인의 구도(求道)로서 ‘무소유’를 강조하는 종교적 실천과는 다른 경로이다. 어떤 의미에서 연찬은 이러한 제도와 의식의 혁명이라는 두 가지 경로를 연결하는 도구로써 활용된다. 이렇듯 일체경영, 무급료·무분배, 연찬생활이라는 방식을 통해 구현된 경제 형태는 따라서 공동분배이거나 공동소유가 아니라 ‘무소유’라는 지향을 통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야마기시즘 실현지의 구체적인 생활 방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했다. A의 일상을 통해 설명한 실현지에서의 생활 양상이 현재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도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거 형태도, 일체 경영의 형식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근간에는 그간 야마기시즘 실현지의 경험 중에 형성된 비판과 성찰이 존재한다. 이러한 변화과정 역시 야마기시즘의 실현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최대 3,000명 규모가 모여 살았던 실현지가(일본의 도요사토 실현지. 도요사토 실현지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동체 경험으로 알려져있다.)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의 원리를 앞서 언급한 원칙들을 통해 실제로 구현했던 경험은 우리 사회에 매우 소중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후위기와 불평등이라는 중대하고 치명적인 위협을 소유 문제를 중심으로 고민하고 풀어가는 것의 의미와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이라는 야마기시즘의 이념적 지향과 실현지의 경험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중요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나는 야마기시즘의 무소유 이념을 보편적 사회과학의 지형 안에서 점검하는 시도를 할 것이다. 사적 소유 제도의 등장과 확대에 관해 규명하려는 사회과학의 노력은 매우 방대하다. 제한 없는 재산권을 옹호했던 로크, 소유권의 한계를 설정했던 루소, 공리주의적 재산권을 주창한 벤담 등 서구의 근대 철학자들은 소유 문제를 둘러싼 탐구에 몰두했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 사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소유문제는 항상 중요한 주제였다. 특히 마르크스는 “지구와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근거한 개인적 소유”라고 대안적 소유개념을 정의하기도 했다. 또한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역시 소유 문제에 주목한 대표적인 학자 중 한명이다. 그는 인류 불평등의 역사를 삼원사회(사제, 전사, 상인으로 구성된)에서 소유자사회로, 그리고 신소유자사회로의 이행과정과 그 과정에서 작동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역사로 설명한다. 이 외에도 소유 문제에 대한 지적 탐구의 도전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탐구의 연장에서 실행된 실천적 경험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인류 지성사의 맥락 안에서, 그리고 지적 자산과 실천적 자산의 토대 위에서 야마기시즘이 지향하는 바, 특히 ‘무소유’라는 이념적 지향을 분석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다음 글의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 송명규 외. 2000. 「생명지역주의(bioregionalism)의 이론과 실천: ‘산안마을’을 사례로」. 한국학술진흥재단 ‘98 인문사회중점영역연구 최종보고서.
  • 야마기시즘 실현지 문화과. 1999.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야마기시즘 농법: 돈이 필요없는 사이좋은 즐거운 마을 이야기』. 야마기시즘 실현지 출판부 역. 야마기시즘 실현지 출판부.

이태영

야마기시즘 실현지(산안마을), YMCA, 체화당과 풀뿌리학교, 녹색당에서 성장하고 배우고 일했습니다. 지금은 제주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소유자나 소비자가 아닌 정체성으로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이에 대해 질문하고 탐구하는 이가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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