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를 만난 시간 -제2회 〈생태적낭독회〉 후기

이번 생태적낭독회에서 「플라스틱 만다라, 사죄와 축복의 생태예술」이라는 글을 함께 읽으면서, 저에게 플라스틱 만다라를 만드는 과정은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와 같은 행위로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인생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삶의 나락으로 완전히 떨어져서 부서지거나 바닥을 짚는 경험으로 절망을 맛보게 하지만, 그런 순간 뒤에 오는 또 다른 시작이 어쩌면 십자가의 고통을 직면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여정처럼 우리 삶에서도 축복의 시작점이 아닐까요?

《티벳에서 7년》이라는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만다라를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중국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 티벳승려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든 만다라를 중국 군인이 발로 뭉개버리는 장면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저는 그렇게 만다라의 한 장면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하는 기도와 같은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생태적낭독회에서 「플라스틱 만다라, 사죄와 축복의 생태예술」이라는 글을 함께 읽으면서, 저에게 플라스틱 만다라를 만드는 과정은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와 같은 행위로 느껴졌습니다. 좁쌀만한 플라스틱 알갱이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모래밭에서 계속 엎드려 모래를 어루만지면서 작은 조각들을 힘써 골라내고 있는 모습. 지금까지 이런 행위들은 돈을 위해서나 어떤 결과물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었으나, 이 글에서 말하는 작업들은 없어져 버릴 하나의 행위를 위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상식과 삶의 방식을 완전히 뒤엎는 행위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이 글의 작가처럼 그렇게 멋진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며 완전히 허리를 숙이고 잘 보이지도 잘 찾아지지도 않는 그 좁쌀만한 플라스틱 알갱이를 찾기 위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스스로 자문해 보았습니다. 사실 그것은 나에게는 완전히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가뜩이나 나이가 들어가니 허리나 무릎이 어깨가 이전 같이 생생하지도 않은데, 누군가가 나에게 돈을 줄 터이니 하라고 한다면 할까? 하루일당 백만 원 정도라면 할까? 도저히 이런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고 생산적이지 않은 일을 왜하는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늘 생산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이거나 결과가 있는 그런 일에만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할애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줍는 데 몇 달, 만드는데 10일 그리고 부수는 데 1분 걸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업에 나의 황금 같은 시간을 들일 수 있을까?

‘이 작가분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계속되는 글의 내용과 정은혜 작가의 담백한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어 있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절망감과 허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 우주 속에서 얼마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지를 느끼는 경험은 소중하다. by Oleksandr Kurchev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j3_2T66Mv4Y
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절망감과 허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 우주 속에서 얼마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지를 느끼는 경험은 소중하다.
사진 출처 : Oleksandr Kurchev

작가님의 말씀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절망을 느끼기 위해 한다’던 말을 통해서, 과연 나는 내 삶에서 절망을 느끼기 위해 했던 행동이 있었던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나에게 절망이나 실패를 느끼게 하는 행동들이 있다면 애써 외면하고 보지 않으려고 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불현듯 생각이 납니다.

학창시절 난 시험을 치고 내가 왜 그 문제를 틀렸는지 복습을 한다던지 다시 시험지를 쳐다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의 실수나 실패를 직면하고 싶지 않아 신나게 놀았던 기억만이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이고 난 늘 미래지향적인 멋진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그런 시간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 작가님은, 그런 막대한 노력의 결과물을 순식간에 부수면서 나 자신이 느끼는 절망감과 허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 우주 속에서 얼마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지를 느끼기 위해 이런 작업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사람과 과학이 얼마나 자연 앞에서 무기력한지 조금이나마 느끼고는 있었지만,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들이나 백신을 통해 애써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던 나에게 완전히 다른 시각을 제시해주는 새로운 경험의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맨 처음 사람들이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며 그림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던 그 시대의 많은 기존 회화 작가들처럼, 나에게도 이번에 있었던 경험은 정말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절망을 직면하고 바라보는 것에 대해 생각하자니, 문득 진실로 절망을 직면했던 한분이 생각이 납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장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했던 한 인물 바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는 그 시간 과연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3년 동안의 수많은 성공이 실패로 끝나는 경험, 나를 따르던 모든 성공의 수식어들이 조롱의 말들로 바뀌어 버린 바로 십자가의 시간이 어쩌면 작가분이 무릎을 끊으며 하고 있던 그런 실패를 위한 행위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한국 욕에 “이런 덜떨어진 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 말을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 말이 욕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전 아들이 외출해 있는 나에게 긴급히 전화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탁실에 물이 막혀 지금 집이 완전히 물바다라는 것입니다. 세탁기에 있던 물이 세탁실 턱을 넘어 올라와서 완전히 거실 마룻바닥을 다 뒤덮어버린 상황을 생각해 보시길. 난 무척 침착하게 아들에게 집안에 있는 모든 수건을 동원해 물이라도 없애 준다면 맛있는 걸 사주겠노라고 이야기 하며 긴급히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집에 도착한 나는 장마에 집이 침수하면 볼 수 있는 장면을 눈앞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절망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일단 긴급히 넘쳐흐른 물과 수많은 수건들을 정리한 후,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가장 강력한 ‘하수구를 뚫는 기계’를 시켜서 그 다음날 물세례를 맞으며 하수구와 사투를 벌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뜬금없이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지요? … 그때 나는 하수구가 막혀서 일어난 물난리로 인해 깊은 절망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나 나에게는 그 순간 가장 당황스럽고 황당한 문제였지만, 또한 한편으로 하수구가 완전히 막혔기 때문에 물이 범람했고 그 덕분에 근본적인 문제를 볼 수 있었고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만약 하수구가 90%만 막히고 10%로가 안 막혀서 홍수나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더럽고 보기 싫은 하수구를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인생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삶의 나락으로 완전히 떨어져서 부서지거나 바닥을 짚는 경험으로 절망을 맛보게 하지만, 그런 순간 뒤에 오는 또 다른 시작이 어쩌면 십자가의 고통을 직면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여정처럼 우리 삶에서도 축복의 시작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현진

동명대 두잉학부 객원교수, 한국퍼실리테이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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