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을 따라 배우기’를 지금, 여기라는 맥락에 놓기 : 기후 위기 속에서 『대학』

‘모범을 따라 배우기’는 낡은 공부 방법으로 평가되곤 하는데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엄정한 논리도, 객관적 기준도 없어 보인다. 이 공부 방법은 값비싼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모범이 되는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었다가, 그에게 영육 양면으로 종속되거나, 엄청난 환멸 속에 모범과 결별하고는, 영웅에게 불필요한 모욕을 가하게 되는 등의 이유에서다. 그런데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어서, 이 방법이 세상의 변화의 어느 국면에서는 빛을 발할 수도 있으니, 한 번쯤은 일부러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변화의 정체 상태를 깰 수 있는 정서적 신체적 모범

성백효 저, 『현토완역 대학·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성백효 저, 『현토완역 대학·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대학」은 유교의 주요 경전 가운데 하나인 『예기』의 한 편이었다. 그랬다가, 송나라 유학자들에 의하여 『예기』로부터 분리되어, 성리학의 원천 역할을 하는 4서의 하나가 되었다. 주희는 『대학』의 내용을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면서 ‘경’은 공자의 사상을 제자인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했다고 설명한다. 증자의 문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학자로 꼽히는 사람이 공자의 손자 자사이니, 주희의 설명이 맞다면 『대학』은 공자의 사상을 가득 담아 후세에 전한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희는, 『예기』 「대학」의 문장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몇몇 글자를 바꾸고 없던 문장을 추가한 후, 주석을 더하여, 『대학장구』 혹은 『대학장구집주』라고 불리는 책을 편찬하였고, 이후에 『대학』이라 하면 그것은 『예기』 「대학」이 아니라 주희가 편찬한 『대학장구』를 의미하다시피 하게 되었고, 이 책을 경전의 하나로 하는 사상이 15세기 이후 조선에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주희가 편집한 『대학장구』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至善)에 그침에 있다.” 이 문장은 ‘대인(大人)의 학[大學/大人之學]’이 이 글의 논점임을 처음부터 밝혀준다. 어떤 사람이 대인인까? 지배자? 지도자? 큰 사람? 좋은 사람? 여기에서 주목해볼 만한 점 하나는, 『예기』 「대학」에서는 ‘백성과 가까이 하기 [친민(親民)]’ 였던 것을, 주희의 스승 정자(程子)가 ‘백성을 새롭게 하기 [신민(新民)]’ 로 바꾼 것이라는 점이다. 백성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사람. 양자를 여러 방식으로 대비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대중친화적인 정치가를 연상시키고, 후자는 스승을 연상시킨다는 식으로 대비하여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대비에 따른다면 정자는 대인을 스승으로 자리매김하려 하였다고 추측하여 볼 수 있을 듯하다. 정자나 그 후학인 주희는 대인을 백성을 새롭게 하는 사람 즉 스승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스승의 역할은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각과 행위의 모범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스승이었을 공자는 만세사표(萬世師表) 즉 영원히 모범이 되는 존재로 칭송되었다. 정자와 주희는 전인적으로 모범이 되어 줄 존재가 세상에 필요함을 강조하였고 대인을 그런 존재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이러한 모범이 논리의 형식이나 지식의 객관성에 있어서만 본받을만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삶의 태도와 정서 면에서 본받을만한 존재라는 성격이 조금이라도 더 강했을 것이다.

“지금이 변화의 정체 상태를 깰 수 있는
정서적 신체적 모범이 필요한 시점이긴 하다. ‘백성을 새롭게 하기’로 수정하여 만든 『대학장구』는 이러한 시점에 참고할 만한 면을 가지고 있다.” 
사진 출처 : HeungSoon
“지금이 변화의 정체 상태를 깰 수 있는
정서적 신체적 모범이 필요한 시점이긴 하다. ‘백성을 새롭게 하기’로 수정하여 만든 『대학장구』는 이러한 시점에 참고할 만한 면을 가지고 있다.”
사진 출처 : HeungSoon

이러한 모범은 기후환경 위기에 처한 지금의 세계에 필요한 인간상이기도 하다. 지금과 같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이 10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경고가 울리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리라. 삶의 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즉, 논리나 지식의 차원에서는 지금의 세계가 기후환경 위기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대부분이 수많은 해양 동식물들을 ‘부수적’으로 죽이면서 잡아 올리거나 가두어 기른 생선의 가운데 토막을 즐기거나, 수많은 생명의 먹이가 될 수 있는 물과 식물들을 먹고 대기 상태를 급격히 악화시키는 가스를 배설하는 소의 고기를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고 있다. 쉽게 말해,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변화의 정체 상태에 빠진 것이다. 지금 여기에 『대학장구』에 나오는 ‘백성’ 같은 존재는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이 정치체의 주인이어야 하는 것이지 정치체의 안정과 안전을 위하여 사람들이 수단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상이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을 새롭게 해야 할 객체로 자리매김하는 데 강조점을 둘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이 변화의 정체 상태를 깰 수 있는 정서적 신체적 모범이 필요한 시점이긴 하다. 정자와 주희가 『예기』 「대학」의 ‘백성과 가까이하기’를 ‘백성을 새롭게 하기’로 수정하여 만든 『대학장구』는 이러한 시점에 참고할만한 면을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는, 누군가가 동기를 제공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연습이 충분히 되어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매스컴에서 수많은 셀럽(유명인, 有名人)을 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것에서 ‘힐링’을 구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말과 생활 방식을 실제로 모방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변화하기를 갈망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객관적 지식을 근거로 하는 논리적 기준을 존중하지만, 사람들에게 더욱 빠르고 폭넓은 변화의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은 정서적・신체적 모범이다. 그런 모범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따르기를 즐겨할 것이며 그에 따라 변화도 더 빠르고 커질 것이다. 주희가 『대학장구』를 편집하면서 정립한 스승의 모습이 지금의 세계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정서적 신체적 모범의 상을 제시하고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이끌 모범이 필요한 기후위기 시대에 참고할만한 면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티피오’

다시 이 글의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 보면, 3강령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대인의 학을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 명명덕(明明德) : 이미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밝은 덕을 드러내기
  2. 신민(新民) : 백성을 새롭게 하기
  3. 지어지선(止於至善) : 더도 덜도 아니고 상황에 딱 맞게 행위하기

(3)의 경우, 직역하면 ‘지극한 선에서 그치기’ 정도가 될 것이다. 『대학장구』 ‘경’은 이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한다. “그칠 데를 안 뒤에 정(定)함이 있으니, 정(定)한 뒤에 능히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 능히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능히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얻는다. 물건에는 본(本)과 말(末)이 있고, 일에는 종(終)과 시(始)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마케팅에 ‘티피오(T.P.O.)’ 라는 약어가 있다. 때(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을 줄여 쓴 것이라고 한다. 마케팅 전략을 세울 때 티피오를 고려하면 물건을 잘 팔 수 있을 듯하다. 티피오는 물건 팔기뿐만 아니라 사람의 처신에서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꼽히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티피오를 고려한다는 것 그리고 위 인용문 앞부분의 그칠 데를 안다는 것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강령 가운데 하나인 ‘지어지선’의 뜻이 잘 와닿지 않으면 티피오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지어지선이나 티피오에 공통의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도 덜도 말고 딱 알맞게 하는 것이나 티피오를 고려하는 것이 앞으로도 인간관계에만 국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기가 울자 어머니가 계속 울면 호랑이가 물어 갈 테니 울음을 그치라고 하였고, 그래도 계속 우는 아이에게 “옛다. 곶감” 하며 곶감을 주니 아이가 울음을 그쳤고, 담장 밖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호랑이가 곶감을 무서워하기 시작하였고, 세월이 흘러, 어머니들은 우는 아기를 달랠 때 순사가 와서 너 잡아간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는 식으로 이야기는 바뀐다.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듯, 사람들이 가장 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관계도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 앞에서 무기력하다고 느꼈을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들 가운데 한 사람의 목숨을 바쳐서 천재지변을 피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사람들에게 어느덧 공동체 생활에서의 갈등이 천재지변보다 더 버거워지면서, 신에게 인신공양을 하는 것보다 다양한 윤리 도덕과 법제를 모색하는 일이 중요해졌던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지어지선(止於至善), 달리 말해 ‘더도 덜도 말고 딱 알맞게 하는 것’은, 중국에서 『예기』 「대학」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이 심각해지지 않게 하려고 인간관계에서 바람직한 행동방침으로 제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그대로 지금의 세계에서 고수하라고 할 필요는 없다. 이미 『예기』 「대학」은 먼저 ‘딱 알맞은 대상’을 선택하라는 권고를 담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세계가 변화하면 그에 따라 우선으로 관계 양상을 고민해야 할 대상을 바꿀 수밖에 없고, 『예기』 「대학」도 그러한 태세를 권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예기』 「대학」이나 『대학장구』를 읽으면서, 마치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세계가 변함없이 유지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어지선을 3강령의 하나로 제시했던 사람들의 고민을 무시하는 짓이 될 것이다. 그들이 지금의 기후환경 위기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먼저 중시해야 할 관계로 예전에 생각하였던 인간관계나 다른 문화를 가진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 못지않게, 위기에 처한 생태계 속에서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꼽을 것이다.

이벤트

『대학장구』 ‘경’은 3강령에 이어 8조목을 제시한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8조목이다. ‘경’에 이어지는 ‘전’ 10개 장은 ‘경’ 1개 장의 3강령 8조목을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 되도록 편집되어있다. 원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있다. 원래는 쭉 이어지는 글이지만,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가), (나), (다)로 나누었다.

(가)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루고, 그 마음을 바루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식을 지극히 하였으니,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 사물의 이치가 이른 뒤에 지식이 지극해지고, 지식이 지극해진 뒤에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진 뒤에 마음이 바루어지고, 마음이 바루어진 뒤에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한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평(平)해진다.”

(나) “천자(天)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두 수신(修)을 근본으로 삼는다.”

(다) “그 근본이 어지럽고서 끝이 다스려지는 자는 없으며, 후히 할 것을 박하게 하고서 박하게 할 것에 후히 하는 자는 있지 않다.”

앞서 요약하여 제시한 것을 보면 8조목은 격물로부터 평천하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개념 중심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종착점을 보면 이는 명백히 정치의 과정이다. 성의-정심-수신도, 많은 사람이 흔쾌히 정치 과정의 한 부분에 넣을 것이다. (가)의 앞부분은,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치국하였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힌다는 것은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그 명덕을 밝힘이 있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정치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타고난 선한 마음을 발휘하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천하가 평(平)해진다고 한 (가)의 마지막 구절은, 모든 사람의 선한 마음이 똑같이[平] 드러난 상태를 설명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전후 맥락을 알고 나면, 왜 (나)에서 정치와 수양을 등치 했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다)의 문장에 대하여, 주희는 ‘본(本)’, ‘후(厚)’ 두 글자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본은 몸을 이르고 후히 할 것은 집안을 이른다.” 본을 콕 찍어 몸이라 못 박았으니, 주희는, 정신을 신체의 우위에 놓지 않은 듯하고, 정신과 신체, 의식과 신체, 몸과 마음을 둘로 확연히 나누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은 듯하다. 한편 후히 할 것이 집안이라면, “후히 할 것을 박하게 하고서 박하게 할 것에 후히 하는 자는 있지 않다”라는 글은 ‘가족에게 잘 대하는 사람이 가족 아닌 사람에게도 잘 대한다.’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전’ 제9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집안을 가르치지 못하고 능히 남을 가르치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집을 나가지 않고 나라에 가르침을 이루는 것이다. 효(孝)는 군주를 섬기는 것이요, 제(弟)는 장관을 섬기는 것이요, 자(慈)는 여러 백성을 부리는 것이다.” 효 제 자는 집안에서 자식이 부모를 대할 때[효], 아우가 언니를 대할 때[제],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자] 가져야 할 바람직한 정서다. ‘전’ 제9장은 집안에서 이 정서를 훈련하면 집 밖에 나가서도 이 정서로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타이들을 원만히 대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오늘의 세계라는 맥락 속에 놓고 보면 극단적 두 가지 평가가 가능하다. 우선 이 주장이 제안하는 행동방침은 결국 가족유사성이라는 가족의 한계에 인간을 가두게 될 것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이런 행동방침이 통용되었던 세계의 역사는 혈연 중시와 가족중심주의로 얼룩져있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을 감내하게까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부정하기 어려운 평가이다. 반면에,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데에서 가질 수 있는 정서를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확대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나의 세계를 넓혀가는 전략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앞서 역사를 들먹였던 데에서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여태까지는 긍정적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계뿐만 아니라 인식에서도 정감이 중시되고 있는 최근의 추세를 감안하면, 이제는 이 제안의 긍정적인 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하다 할 수 있겠다.

한편 8조목으로 정리된 정치의 과정에서 출발점에 해당하는 격물을 주희는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함[卽物而窮其理]”이라 해설하였다. 이를 줄이면 즉물궁리가 될 것이다. 사물에 나아간다는 것은 내 마음이 어떤 사물을 향한다는 것이다. 사물에 관심을 가질 때, 가져야만 할 때, 마음이 사물을 향할 것이다. 마음이 사물을 향하면 사물은 나에게 의미 있는 것 즉, 사건[이벤트(event)]이 될 것이다. 내가 사물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가져야만 할 일이 없으면, 사물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격물이라고 할 때의 ‘물’은, 문자 그대로 사물[matter]로 직역하기보다는, 사건[event]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주희의 주석과 편집에 따라 8조목을 읽어보면, 사람이 마음과 몸, 의식과 신체로 구분될 수 없는 총체적 능력을 가지고 세계에 다가가, 세계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나에게 의미 있는 세계를 확장하는 과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전’ 제10장에서는 이러한 확장의 과정에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바를 제시한다. “윗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서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서 뒷사람에게 가하지 말며, 뒷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서 앞사람에게 따르지 말며, 오른 쪽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서 왼쪽에게 사귀지 말며, 왼쪽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서 오른 쪽에게 사귀지 말 것이니, 이를 일러 구(矩)로 재는 도(道)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矩)로 재는 도(道)’ 즉 혈구지도(絜矩之道)는 ‘자로 재는 원칙’ 정도로 직역할 수 있다. 나아가 ‘내가 겪은 것을 기준 삼아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행동방침’ 정도로 의역할 수 있다. 이렇듯 ‘전’ 제10장에서 혈구지도를 제시하고 있는 까닭은, 격물에서 시작하여 평천하에까지 이르는 수양과 정치의 과정이, 명덕과 같은 공통의 덕성과 유사한 정감을 매개로 하는 것임에도, 사적 욕망에 사로잡혀 편협될 수 있는 위기가 그 과정상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희가 『대학장구』 ‘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수양과 정치의 과정은 이상에 불과한 면이 있는 것이다.

‘모범을 따라 배우기’를 지금, 여기라는 맥락에 놓아 보았더니

행위자가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는 것으로서, 욕망 긍정 문화와 무관할 수 없는 기후환경 위기 속에서도 의미 있고 유용한 행동방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Myriams-Fotos
행위자가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는 것으로서, 욕망 긍정 문화와 무관할 수 없는 기후환경 위기 속에서도 의미 있고 유용한 행동방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Myriams-Fotos

지금까지, 주희의 『대학장구』를 ‘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것을 보완하는 ‘전’까지 관심을 확장하여 보았다. 여기에는 모범을 따라 배우는 공부 방법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방법은 인류 공통의 정감을 매개로 하는 것이어서, 최근 수 세기 동안 인류가 고도화시켜 온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에 부합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학을 발전시켜 온 인류가 기후환경 위기에 처하여 시의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보니, 오늘의 우리는 여러 가지 모색을 하여볼 수밖에 없다. 이런 정체의 와중에 펼쳐 본 『대학장구』는, 논리적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 신체적이라고 해야 할 모범을 따라 배우는 공부 방식을 담고 있었다. 한편 지금 여기에서 기후환경의 위험한 급변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급변의 종착점에 있을 위기를 막는 데 앞장서 주는 전인적 모범 즉 달리 말하자면 영웅적 행동가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불안해하고 있다. 『대학장구』에 보이는 모범을 따라 배우는 공부 방식이 기후환경 위기의 돌파로 직결될는지는 의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장구』가 보여주는 사상은 지극히 인간중심주의적인 것이어서, 인간관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 아닌 생물 나아가 물적 존재들과의 관계 전반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요구하는 기후 환경 위기에 답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어지선의 논리는 인간관계 너머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혈구지도라는 행동방침은 행위자가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는 것으로서, 욕망 긍정 문화와 무관할 수 없는 기후환경 위기 속에서도 의미 있고 유용한 행동방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TEXT :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大學・中庸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3,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1.]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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