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턱대고 비건] ⑨ 닭 죽이기

고통을 느끼는 존재를 직접 죽이는 것, 그에 따른 책임을 느껴보고 싶다는 이유로 닭을 죽이는 것은 과연 합리화가 가능한 일일까요? 그에 관한 고민을 썼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이느냐였다.
사진출처: PaaZ PG

동생과 밀실에 갇혔다.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마침 말티즈 한 명과, 그와 비슷한 크기의 곰 한 명이 방 안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나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이 동물 중 하나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어떻게 죽이느냐였다. 둘을 싸움 붙이고 그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일격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마침 주머니에 초콜릿 바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미끼로 쓰기로 했다. 초콜릿 바를 상 위에 올려놓고, 상판을 탕탕 쳤다. 예상대로 말티즈가 폴짝 뛰어올라 초콜릿 바를 물었고, 곧이어 곰도 따라 올라왔다. 둘은 바의 양 끝을 물고 으르렁거리며 팽팽한 대치를 이어갔다. 긴장이 극에 달한 순간, 초콜릿 바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고, 대립은 끝났다. 두 동물은 초콜릿 조각을 입에 문 채로 평화롭게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걸레 봉을 들어 곰의 정수리를 세게 내리쳤다. 곰은 줄이 끊긴 꼭두각시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혹시라도 곰이 완전히 죽지 않아 고통이 길어질까 봐, 나는 여러 차례 곰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면서도 피가 옷에 튀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윽고 곰의 팔에서 피부가 통째로 벗겨졌고, 그 속에서 원통형의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잠에서 깼다.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 채 한동안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꿈의 내용을 곱씹었다. 초콜릿 바를 나눠 먹는 대신, 그것을 이용해 동물을 죽이기로 한 내 선택은, 견과류보다 동물의 사체가 더 영양가 있다는 통념을 그대로 반영한 것 같았다. 또한, 귀여운 말티즈가 아닌 친숙하지 않은 곰을 죽인 선택 역시 너무도 자연스럽게 종차별주의적 태도를 드러냈다. 생명을 죽이는데 피 한 방울 튀는 것조차 감수하고 싶지 않은 모습에선 죄책감의 외주화를 통해 안락함만 누리고 싶어 하는 비겁함이 엿보였다. 이 비겁함은 꿈속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 비건으로 살면서도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모든 죽음에는 그 과정이 있다. 나 역시 과거에는 무수히 많은 동물을 먹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는지에 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은 공부를 통해 도살의 실상을 알고 있지만, 간접 경험이다. 살생에 따르는 책임을 직접 느낀 적은 없다. 그래서 줄곧 동물권에 관해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 자신이 위선적이라고 느낀다. 이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도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이러한 위선을 그대로 마주하기 위해 비건 초기에는 ‘직접 죽인다면 먹을 수 있다’는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죽이고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려 했다. 몇 년 전 어머니와 나눈 통화 내용은, 그 당시 내가 가졌던 생각과 태도를 보여준다.

어머니: 장어 먹냐? 너 장어 잘 먹잖아.

: 안 먹어요.

어머니: 간장게장은 먹냐? 집에 해놨어.

: 안 먹어요.

어머니: 그럼 잡채는? 고기 안 넣으면 먹냐?

: 네, 고기 안 들어가면 먹죠.

어머니: 그냥 간장게장 먹으면 안 돼? 다 해놨어.

: 안 돼요.

어머니: 전은 먹냐?

: 고기, 해산물, 우유, 달걀 들어간 건 다 안 먹어요.

어머니: 그럼 전도 못 먹겠네. 너 음식점 가면 계란 다 들어가 있어.

: 그래서 음식점을 안 가요.

어머니: 젊었을 때 영양을 비축해 둬야지, 늙으면 다 빠져나가.

: 저도 공부하면서 하고 있어요. 괜찮아요.

어머니: 뭐가 괜찮아? 니가 나만큼 살아 봤냐?

: … 키우는 닭 있어요?

어머니: 왜?

: 닭 잡으면 먹을 수 있어요.

어머니: 그럼 이모부한테 닭 잡아달라고 부탁해야겠네.

: 그렇게 말고, 제가 직접 잡으면 먹을 수 있어요.

어머니: 아이고, 무슨 니가 닭을 직접 잡아 집에 토끼 있어, 그거 잡아먹어.

: 예?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거예요?

어머니: 잡아먹은 적은 없는데, 잡아먹기도 하고 팔기도 해. 이번에 새끼 다섯 마리 낳았어.

: …(잠시 토끼를 죽이는 상상을 해본다) 어우, 토끼는 안 되겠는데요.

(이상하게 웃음이 피시식 새어나온다.)

어머니: 그럼 닭은 괜찮냐?

: (뜸을 들이며) 닭도 못 하겠는데요…

(서로 웃음이 터짐)

닭 한 명의 생명을 내심 가볍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
사진출처: Ladislav Stercell

고통을 느끼는 존재를 죽이는 것, 그에 따른 책임을 느껴보고 싶다는 내 사소한 이익 때문에 닭의 핵심 이익인 삶 그 자체를 끝내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인가? 만약 닭을 죽인다면 어떻게 인도적으로 죽일 수 있을까? 인도적인 살생은 가능한가? 어떻게 최대한 고통 없이 죽일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 아닐까? 만약 생명의 무게를 아는 샤먼에게 도축을 맡긴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나의 위치는 기존에 편히 공급받는 자로서의 위치와 다른 점이 있는가? 그냥 안 하면 되는데 왜 자꾸 해야만 할 것 같은가? 그 경험을 해야 나의 주장에 힘이 실릴 것 같기 때문일까? 단지 주장에 근거를 강화하기 위해 생명을 죽이는 것은 온당한가? 닭 한 명의 생명을 내심 가볍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

죽음을 잘 모르는데, 죽음을 말하는 부끄러움은 날 따라다닌다. 아마도 가장 안전한 곳에서 가장 안전한 말만 하는 자의 위치에 내가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다시 닭을 죽이는 시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과거와 다른 점은 그 행위에 관해 다면적으로 고민하고 규칙을 만드는 것이었다.

규칙은 이렇다. 첫째 어쩔 수 없이 닭이 죽음에 이르는 상황에 내가 개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골집에서 닭 잡는 일정을 알아낸다. 둘째 최대한 고통 없이 죽이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셋째 살생은 잔혹하고 인도적인 죽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넷째 죽음을 추모하는 일이다. 죽음을 생산 공정 중의 한 단계 정도로만 보는 공장식 축산의 틀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독립된 개체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의식을 행하는 것. 다섯째 감사하는 마음으로 낭비 없이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닭을 먹은 뒤 배설한 똥을 수세식 변기에 흘려보내지 않고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 마지막으로 모든 과정에서의 연결과 하나 됨을 온전히 느끼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 이런 규칙을 정하고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 혹시 앞으로 닭 잡을 일 있어요?

어머니: 어, 왜? 잡아놓을까?

: 저 때문에 잡는 거면 안 하셔도 되고요, 잡을 일 생기면 연락주세요.

어머니: 왜? 뭐 하려고, 어차피 잡아야 해. 시끄럽게 울어 싸서.

: 다 죽일 건 아니잖아요.

어머니: 수탉만 잡아. 수탉이 시끄럽게 울어 싸서. 너 보내줘? 저번에 큰아버지 드리려고 잡아놓은 것 중에 남은 것 하나 있어.

: 아, 괜찮아요. 닭은 어디서 잡아요?

어머니: 옆 동네에 닭 장수 가져다주면 잡아 줘. 귀찮아서 못 하고 있어. 너 닭 주랴? 냉동실에 있어.

: 괜찮아요.

어머니: 왜? 무슨 말이야, 무슨 소린지 못 알아 듣겄다.

: 아, 제가 또 연락 드릴게요.

어머니: 뭔 소린지 못 알아 듣겄다. 알았어.

이후 어머니는 아버지 생신 때 닭을 잡는다고 내게 알려주셨고, 나는 한동안 닭을 고통 없이 죽이는 법을 공부했다. 생신 전날, 오후 늦게 시골집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잠시 쉰 뒤, 고무장갑과 장화, 고글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닭장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에 오늘 내가 죽일 닭이 있었다. 그는 무리 속 유일한 수탉이었고, 암탉들보다 20cm가량 더 컸다. 온몸은 까만 깃털로 덮여 있었고, 선홍빛 벼슬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는 무리 사이를 늠름하게 거닐며, 가족을 지키려는 듯 낯선 나를 경계했다. 좁은 닭장에서 태연한 척 위용을 뽐내려는 그의 모습은, 그에게 곧 닥칠 운명을 알고 있는 내겐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모습에서 나 자신이 겹쳐 보였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 닭장 안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닫았다.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지만, 좁은 공간에 닭들이 뒤엉켜 있어 조금만 움직여도 날갯짓과 울음소리, 깃털이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고글에 김이 서려 시야는 점점 흐릿해졌다. 잠시의 소동 끝에 어렵게 그를 붙잡았다. 한 손으로 양 날개를 제압한 채 닭장 밖으로 나왔다. 고글과 마스크를 벗고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뒤, 배운 방법대로 몽둥이를 들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수차례 등을 때렸는데도 그는 기절하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비명만을 질렀고, 그 소리에 나는 당황하고 겁이 났다. 손에 힘이 빠졌고, 그 틈을 타 그는 내 손아귀를 벗어나 날개를 거칠게 퍼덕이며 몸을 비틀거리다 결국 닭장 쪽으로 도망쳤다. 나는 결국 포기했다. 닭을 죽일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닭을 죽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위에 묘사한 일련의 과정은 모두 거짓이다. 아무리 많은 규칙을 세우고 그것을 성실히 지킨다 한들, 동물을 먹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이 아닌 이상, 고통을 느끼는 존재를 죽이는 행위는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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