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⑫ 아아가 시상 착하고 순하고 성실흔디 누가 마달 것이요?

성당에서 일하는 상덕 씨는 받는 급여가 충분하지 않아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사는 것이 버거웠다. 입는 것, 먹는 것도 아이들에게 충분히 갖춰주지 못하는 보성댁 부부는 마음이 아팠다. 그 와중에 큰아들은 공부를 포기하고 돈벌이를 시작해야 했다.

상덕 씨가 성당에서 ‘전교회장’이라는 직함으로 일을 했는데 그 봉급이 박했다. 그나마 가족이 살 수 있는 집이 제공되어서 그럭저럭 견디고 살았지만 결코 넉넉하지 않았고 많은 걸 아끼며 살았다. 아들 셋, 딸 셋을 연달아 낳아 육남매를 기르고 살자니 사는 것이 늘 팍팍했다. 아이들이 신던 양말이 구멍이 나도, 입던 바지의 무릎이 닳아 구멍이 나도 새 옷을 사 입히기가 어려웠다. 성당에 다니는 신자들 중에 좀 더 여유 있는 누군가가 아이들이 입다 작아진 옷을 가져다주면 고마워하며 받아 아이들에게 입혔다. 그중에 다행인 건 아이들이 모두 다 남 입던 옷을 입는다 하여 불만스러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날 성당 마당에서 뛰놀던 응식이가 뛰어 들어오며 보성댁을 불러 댔다.

“엄마! 엄마!”
“어, 왜?”
“이거 신부님이 이 사진 줬어요.”
“신부님이 주셨어요 해야제.”

보성댁이 응식이가 내미는 사진을 받으며 말했다. 그 사진 속에는 남편인 상덕 씨와 만신부님이 응식이와 큰딸 선자를 데리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고 만신부님은 허리를 구부려 두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응식을 정면을 보며 환하게 웃고 선자는 그런 오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사진 속에서 보성댁의 시선을 유독 끄는 것은 응식이가 입고 있는 바지의 무릎에 난 구멍이었다. 그렇게 무릎이 찢어진 바지만 있는 건 아닐진대 하필이면 저 바지를 입고 사진을 찍었나 싶었다. 새 카메라를 산 신부님이 뭐라도 찍고 싶어 성당 마당에 나왔다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다 찍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 사진 찍자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성댁은 그렇게 찢어진 바지를 입고도 환하게 웃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당장 나가 새 바지를 사는 건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여수머리에서 살 때는 직접 농사를 지으니 밥 먹을 양식은 늘 있었다. 그땐 아이들도 많지 않았고 어리기도 했지만, 그때와 달리 농사를 짓지 않고 곡식을 팔아다 먹는 처지가 되고 보니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

한참 자라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다 보니 아이들은 늘 배고파했고 먹을 것을 찾아댔다. 집에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니 아이들은 놀면서 먹을 것을 찾아 먹었다. 성당 마당에는 여러 가지의 나무가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 나무의 열매를 뭐든지 먹으려 들었다. 봄이면 찔레순을 끊어 껍질을 벗겨 먹는 건 보성댁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슴슴하면서도 부드럽고 달큰한 맛이 나서 아이들도 잘 먹었다. 배추나 갓, 무의 꽃이 올라오면 그 줄기를 잘라 껍질 벗겨 먹는 것도 금방 배웠다. 아주 어린 것들은 맛없다며 뱉어내기도 했지만, 좀 자라면 언니, 오빠들이 하는 것을 보고 곧잘 따라했다. 멀구슬나무는 꽃도 예쁘고 그 향도 좋았는데 아이들은 그 열매가 노르스름하게 익으면 그것도 따 먹었다. 신맛과 단맛의 그 어디쯤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맛이었지만 쓰지 않고 떫지 않으면 통과였다. 썩 맛있지는 않은지 많이 먹지는 않았다.

보성댁네 아이들의 간식으로 아이들이 모두 좋아하는 것은 제병 부스러기였다. 그때 당시에는 미사 중 영성체할 때 쓰는 제병-영성체할 때 먹기 위해 만든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얇은 전병 형태의 빵-을 성당에 상주하는 수녀님들이 직접 만들었다. 밀가루를 얇게 펴서 누런색이 나지 않게 익히고 동그란 틀로 찍어내서 동그란 모양이 온전하게 만들어진 것들은 미사에서 사용하고 동그란 모양이 깨지거나 찍어내고 나온 부스러기들을 수녀님은 보성댁네 아이들 간식으로 먹이라고 한 바구니씩 가져다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빙 둘러앉아 자기 입에도 넣고 서로 입에도 넣어주며 먹고 놀았다. 서로 입에 넣어주기도 하면서 미사 시간에 신부님이 하는 양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아멘”

하며 받아먹고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놀곤 했다.

그러고도 시커먼 꽁보리밥도 하루 세끼를 다 먹이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땐 한 번씩 오실 때면 쌀이나 고구마나 양식거리를 가져오시곤 했지만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시숙이나 동서는 그만큼 주지는 않았다. 끼니꺼리가 넉넉하지 않다 보니 아침저녁으로는 밥을 줬지만 고구마나 감자가 나오는 철엔 점심에 밥 대신 고구마나 감자를 쪄줬다. 그것도 풍족하게 주지는 못했다. 겨울이 다 가는 어느 날 점심으로 고구마를 준비했다. 남은 고구마를 세어 보며 이것도 얼마 안 남았네 생각했다. 고구마를 씻어 솥에 넣고 불을 때서 삶는 동안 아이들은 코를 벌룽거리며 다 삶아지기를 기다렸다. 고구마가 많을 때는 양푼째 놓고 먹지만 이젠 많이 남지 않아 각자 그릇에 세 개씩 담아 주었다. 세 개라곤 해도 그다지 크지 않은 것들이어서 아이들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

고구마가 세 개라곤 해도 그다지 크지 않은 것들이어서 아이들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 사진 출처 : Silentpilot
고구마가 세 개라곤 해도 그다지 크지 않은 것들이어서 아이들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
사진 출처 : Silentpilot

양푼에 가득 떠 놓은 싱건지도 같이 바닥이 났다. 저리 잘 먹는 걸 충분히 주지 못하다니…… 보성댁은 마음이 아팠다. 돌아가며 싱건지 국물을 마시고 일어서는데, 셋째 딸이 얼른 일어서지 않고 뭉그적거리며 양푼에 남은 고구마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점심을 먹으러 오지 않고 있는 상덕 씨와 보성댁 몫의 고구마였다. 더 먹고 싶은가 보다 하는 생각에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하나 더 먹을래 물어보았다. 아이는 반색을 하며 하나를 더 받았고 그 역시 눈 깜짝할 새에 아이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셋째 딸은 기분 좋은 얼굴로 일어나 제 언니, 오빠들이 놀고 있는 곳으로 갔다. 상덕 씨가 점심을 먹으러 오자 따로 담아 놓은 싱건지와 함께 고구마를 놓고 함께 먹고 일어섰다.

구멍난 아이들 양말을 꿰매고 있는데 데레사 씨가 식빵을 조금 들고 왔다.

“안나 씨, 양말 빵꾸 떼우고 있소? 이거 빵 좀 드시고 하셔.”
“아, 신부님들이 좀 남기셨나 봐요.”
“그렁께 덕분에 우리도 좀 먹지 뭐.”
“그러잖아도 속이 좀 꿀찌하니 뭐 좀 먹었으면 했는데, 잘 먹을라요.”
“아니 멋흔디 벌써 꿀찌하다요. 점심 안 잡솼소?”
“아니, 미자 저것이 지 준 고구마 다 묵고 더 묵고 잡아서 못내못내 흐길래 나가 덜 묵고 줬더니 그러요.”
“아이고, 저것이 즈그 어매 속이 어쩐지는 알도 못흐고 맛나게 묵어 부렀구만.”
“아그들이 다 그렇지요, 뭘.”
“양말 꼬매고 있소? 아이고 많기도 해라.”
“흐, 식구가 많은께요.”
“아이고, 이놈에 양말은 어찌 이리도 빵꾸가 잘도 날까?”
“아그들이 험하게 논께 그러지요. 요런 것도 제때제때 못꾸매줘서 발뒤꿈치가 벌개가꼬 다닐 때가 많소.”
“금메 말이시. 저번 날에 성당에서 미사흘 때, 정식이가 영성체흐러 나간디 양쪽 발에 고구마가 한나씩 나와 있드랑께. 나가 혼자 속으로 막 웃었네.”
“그렁께요. 아그들이 많응께 그런 것도 미처 못할 때가 많아요.”
“그나저나 안나 씨가 애쓰요. 아그들 여섯을 수발함서 어찌 사요. 난 아아들이 셋잉께 살제 여섯 같으믄 못살았으꺼요.”
“아이구 뭘요. 그래도 아아들이 큰 말썽 안 부리고 커준께 다행이지요.”

아이들은 방학을 하면 제 큰집에 한 번씩 놀러가곤 했다. 딸들은 아직 어려서 엄마인 보성댁이 갈 때만 따라 다녔지만 국민학교 고학년인 큰아들 정식이 동생들을 데리고 기차를 타고 한 번씩 다녀오곤 했다. 가난한 동생에게 인색하게 굴기는 했지만, 시숙이 도목수로 일하고 동서가 갯일과 농사일에 억척이어서 살림이 넉넉하다 보니 놀러 간 조카들에게 밥은 넉넉히 먹이는 눈치였다. 큰동서는 처음에 시집와서 딸만 셋을 줄줄이 낳았다고 구박을 받다가 정식과 일주일 간격으로 첫 아들을 낳고는 두 동서가 나란히 아들 셋을 이어 낳아서 아들들이 놀러 가면 같이 놀 친구가 되었다. 같은 사내애들이고 나이가 비슷하다 보니 사촌 여섯이서 노는 모습은 어른들에게는 흐뭇한 모습이었다. 또 큰동서가 돈을 아끼는 사람이었지만 시조카 아들 형제들이 놀러 오면 많은 돈은 아니어도 아이들에게 용돈을 종종 주곤 했다.

“그때 큰엄니는 앞에 전대를 떡하니 차고 있다가 우리가 가면 십원 짜리 종이돈을 하나씩 꺼내서 주곤 하셨지.”

큰아들 정식 씨는 어른이 된 후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보성댁은 아이들 용돈보다는 큰집에 가면 쌀밥을 배불리 먹었다는 아이들의 자랑에 기분이 좋아졌다. 가난한 동생 내외에게 인색하지만, 아이들이 사내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이들에게 인심을 후하게 쓰는 듯하여 동서 형님이 고마웠다.

그렇게 가난한 형편이 쉽게 피지 않다 보니 정식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는 중학교에 갈 때가 되자 근심이 생겼다. 상덕 씨는 성당일을 보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종종 있어 더욱 아이를 공부를 더 시키고 싶어 했다. 그런데 큰아이를 상급 학교에 보내기는 해야겠는데 감당을 할 수 있을지가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보성댁네의 형편을 아는 유선생이 순천농림고등전문학교에 대해 알려줬다. 보통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다니지만 이 학교는 4년을 다니면 고등학교를 나온 것과 같은 자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4년간 다니면 6년을 다닌 사람과 같은 고졸의 학력이 된다는 것에 보성댁 부부는 귀가 번쩍 뜨였다. 형편이 좋지 않은 보성댁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모의 말에 순종적이던 정식이는 군말없이 부모의 뜻에 따랐다. 어쩌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는데 진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식을 열심히 공부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입학금을 낼 돈이 모자랐지만 상덕 씨가 형에게 찾아가 부족한 돈을 빌려 왔다. 상덕 씨의 형은 꼭 상급학교를 가야 하냐며 까다롭게 굴었지만, 그래 장남이니 그 정도는 보내야지 하며 돈을 빌려주었다.

어느 날 학교에 있을 애가 동천 천변에서 방황하는 걸 본 누군가가 말해주어 아이가 공납금을 내지 않으면 학교에 다니면서 무슨 일을 겪는지 알게 되었다. 
사진 출처 : andsproject
어느 날 학교에 있을 애가 동천 천변에서 방황하는 걸 본 누군가가 말해주어 아이가 공납금을 내지 않으면 학교에 다니면서 무슨 일을 겪는지 알게 되었다.
사진 출처 : andsproject

집에서 학교에까지 40여 분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식은 열심히 다녔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해 줘서 어려운 중에도 부모의 자랑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학교에 납부해야 하는 공납금을 정해진 기한에 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식은 납부금 독촉에 시달리며 학교를 다녔다. 공납금을 제때에 내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압박이 심하던 시대였다. 매를 맞고 오는 경우도 있었고 공납금 낼 때까지 공부할 수 없다고 일찍이 집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런 일들을 생각 깊은 정식은 티를 내지 않고 다녔다. 어느 날 학교에 있을 애가 동천 천변에서 방황하는 걸 본 누군가가 말해주어 아이가 공납금을 내지 않으면 학교에 다니면서 무슨 일을 겪는지 알게 되었다. 보성댁 부부는 고민 끝에 정식의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공납금으로 인해 아들이 매번 상처받게 되는 것도 못 할 일이다 싶었다. 거기다 그때 둘째 딸아이가 많이 아파 광주까지 병원을 찾아다니는 등 이래저래 힘든 시기여서 보성댁 부부도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런 일을 겪지 않게 제 때에 공납금을 내는 게 어려웠다.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닌데 학교에 계속 다니게 해주지 못하는 보성댁의 마음은 매우 쓰라렸다. 상덕 씨도 마음 아파했다. 능력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상덕 씨가 젊었을 때 서울에 가서 메리야스 공장을 하자는 친구와 함께 갔더라면 중학교 정도는 보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막내아들 멀리 못 보내노라고 울며 붙잡고 말리던 시어머니가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정식은 뭘 해야 할까 새로운 걱정이 생겨났다. 평소에 언니처럼 다정하게 지내던 데레사 씨도 안타까워하며 같이 걱정을 해주었다. 열여섯의 나이라 다 컸다고들 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동생들과 장난치는 거 좋아하고 친구들과 노는 걸 즐기는 나이였다. 학교를 그만둔 후 동생들이랑 같이 쓰는 방에서 좀체 나오려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대부분 학교에 가고 없는 시간엔 혼자 마루에 걸터앉아 의기소침해 있기도 해서 뭐라도 해야 저리 넋놓고 있지 않을 텐데 싶었다.

“저라고 멍하니 있는 거 봉께 참 마음이 그러네요. 나도 이런디 안나 씨 마음도 참 그러겄네.”
“그렁께요. 학교를 못 가면 뭐라도 해얄 껀디 어째야 쓸랑가 모르겄소.”
“어디 지 용돈 벌이라도 하게 해야지. 아니면 앞으로 밥 벌어 먹을 일을 생각해서 기술이라도 배우러 댕게야지 않겄소?”
“긍께 말이요. 뭘 배워야 쓸랑가…….”

데레사 씨와 둘이 마주 앉아 이렇게 두런거리며 걱정을 나누고 있을 때 도로테아 씨 소리가 들려왔다.

“안나 씨, 안나 씨 어디여?”
“잉? 도로테아 씨 소린디요.”
“도로테아 씨 나 여깄소. 정제에”

대답을 하며 둘이 같이 부엌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며 도로테아 씨를 불렀다.

“이, 거그 있었네.”
“어서 오시씨요. 근디 먼 일로 왔다요?”
“이, 저그 나가 분도 일할 디를 한나 알아 왔는디, 분도가 갈랑가 모르겄네.”
“아, 그래요? 어디다요? 뭐하는 데까요?”
“이, 스테파노 씨 말이여 세탁소 하는.”
“아, 쩌그 남정지에서 세탁소 하는?”
“이, 그 스테파노 씨가 심바람해 줄 아가 하나 있으믄 흔단디. 분도 거그다 취직 한번 시케볼라요?”
“아, 놀고 있느니 거그라도 나가믄 지 용돈 벌이는 흐겄지라. 근디 스테파노 씨가 분도한테 일을 시킬까요? 너무 어리다고 안 흘랑가.”
“이, 나가 안 그래도 아까 거기 앞에 지나가다가 잠깐 들렀다가 이야기해 봤는디 안나 씨가 좋다고만 흐믄 자기 집에서 일했으믄 흐던디. 분도야 뭐 아아가 시상 착하고 순하고 성실흔디 누가 마달 것이요?”
“아, 글믄 지한테도 물어봐야제. 당사자가 싫으믄 안 되는 겅께. 지금 어디 좀 나갔응께 이따 들어오믄 나가 물어 볼라요. 야들 아부지랑도 의논해봐야 흐고.”
“이, 글문 물어보씨요. 내일 주일 미사 때 보고 이야기해주믄 되겄네. 스테파노 씨도 내일 주일 미사 올 겅게 같이 이약하믄 쓰겄소.”
“예, 이러고 맘 써 줘서 고맙소.”“아이고 뭘, 우리가 한두 해 본 사인가. 아 학비는 못 대 줘도 이런 건 알아봐 주고 그래야 쓰는 거여, 우리 사이에. 글믄 나 가요. 내일 봅시다.”
“예 잘 가시씨요. 낼 주일 미사 때 봅시다.”

저녁을 먹고 상을 치운 보성댁은 큰아들을 불렀다.

“아이, 분도야. 여 잠 앉아 봐라.”
“예”

분도가 와서 앉자 언니들이랑 놀던 막내가 뽀르르 쫓아와 지 오빠한테 기대고 앉았다.

“넌 가서 언니들이랑 놀아.”
“히잉”

막내딸은 오빠한테 기대 몸을 흔들며 어리광을 부리더니, 있어봐야 심심하겠다 싶었는지 제 언니들 곁으로 갔다.

“아까 낮에 도로테아 씨가 와서 니, 스테파노 씨 세탁소에서 심바람도 하고 함서 일을 배워보믄 어쩌겄냐고 흔디 니 생각은 어쪄냐?”
“세탁소요? 어디에 있는디요?”
“이, 쩌어그 남정지에. 니도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다 한두 번은 봤을 것 같은디, 남정 세탁소라고.”
“아, 거기요. 예 찬문이 집에 놀러 갔을 때 지나다님서 본 것 같아요.”
“그래 어떡할래? 다녀볼래?”
“아부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큰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이 어떤 건지 알고 싶은 듯했다. 상덕 씨는 자신 없어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가 니 학교도 못 마쳐줘서 미안흔디 뭐라고 흐겄냐마는 뭐라도 해야 쓰지 않겄냐.”
“예, 제 생각도 그래요. 그 세탁소 다닐게요.”

보성댁은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야지 생각했지만 일하러 가겠다는 아들의 말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큰아들은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세탁소에서 일을 했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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