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라캉의 응시 이론부터 들뢰즈의 촉지적 시각까지

예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무한 부딪힘이다. 라캉은 ‘응시이론’을 통해서, 메를로 퐁티는 ‘상호 신체성’을 통해서, 들뢰즈는 ‘촉지적 감각’을 통해서 이를 증명해내고 했다. 상상력의 층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교류를 통해 무한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예술을 철학자들은 어떻게 밝혀내고자 했을까.

라캉(Jacques Lacan, 프랑스의 철학자·정신분석학자)의 이미지 이론인 ‘왜상’은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어떤 형태가 재변형되어 보이는 방식이다. 분명하게 보이지 않던 이미지가 어떤 매개 과정을 거침으로써 분명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홀바인의 〈대사들〉에서 시선의 다른 방향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정면에서 본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대사들(The Ambassadors), 오크 패널에 유채, 207x209.5cm, 1533,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ans_Holbein_the_Younger_-_The_Ambassadors_-_Google_Art_Project.jpg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대사들(The Ambassadors), 오크 패널에 유채, 207×209.5cm, 1533,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대사들〉의 부분

사선방향에서 본 홀바인의 그림. 뭉개지며 보였던 형상이 해골 모양의 그림으로 선명하게 다시 보인다.

라캉은 ‘보임’의 감각이 나뉘어 있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시각과는 달리, ‘응시’는 보이지 않는 시선이다. 내가 볼 수 없는 또 다른 시선, 그것이 응시이다. 〈대사들〉에서도 예측하기 어려웠던, 그래서 그것을 발견했을 때 왠지 모를 두려움이 동반했던 응시가 존재한다. 〈대사들〉의 정면 앞,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동안 사선의 방향에서 해골은 형태를 갖춘 채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나는 보는 주체인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언제 어느 순간에나 ‘보는 주체’ 일 수 있을까?

사실 라캉이 겨냥했던 것은 르네상스 시각 모델의 기초인 ‘원근법’의 내적 균열이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그림 내부 소실점을 가정하고 외부관찰자의 시선을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원근법은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고 한다. 그것은 단일한 시각으로만 보려는 자의 고집적인 시각이기에 불완전하고 자가당착에 맞닥뜨리게 된다.

주체의 완전한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에 따르면, 오히려 주체의 시각 이전에 타자의 응시가 선행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빛을 통해서 대상을 본다. 하지만 빛은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도처에 빛이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보는 사물이 먼저 빛을 되쏘며 우리를 응시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응시는 우리가 알 수 없고, 길들일 수 없다.

내가 바라볼 수 없는 선행된 응시의 존재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을 느낀다. 마치 누군가 나를 열쇠 구멍 안에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가능케 하는 또 다른 시선, 그것은 나의 상상 속에서 작동되는 타자의 현전이다.

라캉은 타자 아래에서 대상이 되는 존재를 대상 a(object a)라고 명명했다. 대상 a는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존재한다. 대상 a가 존재하는 환상은 타자성의 장소이다. 환상 안에서는 주체가 자신의 주관성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과 부딪치면서 만들어진 타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타자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대상으로 보는 응시가 가능해진다. 이순간이 주체와 대상이 동일시되는 순간이다. 라캉은 그런 환상을 예술이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환상의 스크린인 예술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는 주체, 대상 a가 출현한다. 그래서 라캉은 불가능한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을 진리로까지 격상시켰다.

환상-예술에서 공존 불가능한 ‘욕망하는 타자’와 ‘대상으로서의 주체’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동일성이 성취되는 순간은 현실과 공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 짧은 순간 속에 진리는 잠시 동안만 빛을 발하다 사라진다. 이것을 라캉은 환상의 횡단이 발생하는 순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순간은 필연적으로 쾌락의 순간인데, 그 이유는 주체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장소를 찾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주체가 자신의 장소를 순간적으로 획득하는 감성적 충격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성을 경험하게 되고 대상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재발견해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예술은 때론 각성과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렇듯, 계속해서 유동하는 환상의 횡단 아래에 일종의 행위가 되는 회화를 라캉은 ‘응시에 호소하는 미술’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

세잔의 회화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뒤엉켜있다. 한 가지 시선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응시의 교차들을 화가가 캔버스 뒷면을 비틀어 불연속적이 화면 안에 응집해 낸 것이다. 세잔이 위대한 이유는 사물이 스스로 드러나게 했다는 것이다. 내가 사물을 보는 것을 넘어 빛을 쏘아낸 사물이 그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주체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빛의 유희를 나타내는 응시의 자리이다.1

폴 세잔(Paul Cezanne), 생 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유채, 1904,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ul_C%C3%A9zanne,_Mont_Sainte-Victoire.jpg
폴 세잔(Paul Cezanne), 생 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유채, 1904,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세잔을 언급한 학자가 여기 또 있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프랑스의 철학자)는 세계내의 체험을 근원으로 하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지각 능력의 선차적 문제로 ‘몸’에 집중했다. 세계를 지각한다는 것은, 의식 이전에 신체가 먼저 타인과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세계와 나, 그리고 타인이 신체적 상호교류를 통해 세계의 다양성을 체험하는 것으로 불확정적인 상태에서 부딪히는 끝없는 탐색을 통해 의미를 창출해내는 활동이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화가는 자신의 신체를 동반하여 작품을 만든다. 말하자면 예술가가 그리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 삶 전반을 통해서 세계를 경험해 온 것이다.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수한 것들을 화폭 위에 (들뢰즈에 표현에 의하면) 채우는 것이라기보다, 비워내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는 자신이 세계에 참여하면서 발생되는 사유에 대한 가시화, 그리고 또 다른 사유를 촉발시키고 부딪히게 하는 열려진 장으로서의 작품을 창조해내야 한다. 이것이 예술가만이 가진 자유이다. 한마디로 예술가는 세계와 더불어 존재론적 감각 공동체2를 가지고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 감수성을 표현하는 자이다. 그렇기에 예술가가 창조하는 예술은 보이는 것을 표현하면서도 존재론적으로 보이지 않는 심층의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한편 들뢰즈(Gilles Deleuze, 프랑스의 철학자)는 이것을 감각세상에 있음이라고 불렀다. 개인은 감각 속에서 형성이 되고, 감각을 주면서 다시 감각을 받는 존재라고 한다. 들뢰즈의 이론 안에서도 개인의 신체는 주체이자 대상이 된다. 그림 안에서 관객은 화가가 느끼는 감각을 받는다.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자의 교류가 가능해지는 것이며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상호신체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감각은 촉각, 시각, 청각과 같이 신체 전체에 걸쳐 있다. 그리고 이 감각들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소통한다. 위대한 화가는 시각적 감각을 통로로 모든 감각 영역에 걸쳐 대상의 생생한 힘(들뢰즈에 따르면 ‘리듬’)을 포착한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세잔이 언급된다.

세잔은 빅투아르 산을 바라보았을 때도 색채들을 변조해내면서 시각적 닮음보다 더 깊은 닮음을 묘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대상을 작가 자신이 신체적으로 소통하고 체험한 더 깊은 닮음이다. 그의 그림은 우연과 선택의 중첩이다. 화가의 손에 의해 잠재된 형상이 도출되고 화가의 선택의 연쇄가 시각적 전체를 다시 방향 짓는다. 그리고 이 같은 방식으로 인해 마침내 회화적이라고 불릴 수 있게 된다.

화가의 손적인 표시는 구성적 질서를 깨뜨린다. 그것은 자유로운 색채 표현으로 더욱 잘 나타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빛이나 명암법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시각적 전체 속에서 새로운 닮음을 생산하는 데 적합3하다.

쉴 새 없는 움직임으로 형을 해체하고 광학적 공간을 단절하는, 손적인 시도를 들뢰즈는 ‘눈으로 만진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촉지적 시각’을 통해 눈의 종속을 벗어나게 된 손이 회화에 움직임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상적 형태를 해체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얼룩과 터치가 수반된다. 이처럼 감각의 상호교차 속에서 회화에 움직임을 부여함으로써 보이는 대상에 보이지 않은 힘을 포착해내는 것, 이것이 순수한 형상의 힘으로의 상승을 가능하게 한다.

회화는 결정적이지 않은 영역까지 재현한다. 회화 안에는 존재하는 것이 있고, 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회화는 상상의 영역 안에 자리하며 무궁한 가능성이 된다. 손적인 의지로 말미암아 화가의 우연과 선택은 예측될 수 없다. 하지만 이 우연과 선택이 결국 더 깊은 닮음을 재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보고 아는 것과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 사이에 필연적인 간극이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세잔의 그림이 우리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우리가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몸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나의 기억으로 대상을 만졌을 때 세잔처럼 관찰될 수 있다는 것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라캉의 이야기를 빌려, 우리는 결코 언제 어디서나 보는 주체일 수 없다. 우리는 때로 대상이 되기도 하며 그 차이로 인해 삶을 욕망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화가의 그림 안에 보이지 않은 힘을 발견해냈다면, 우리는 시각을 넘어 다른 감각으로 회화를 바라보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참고문헌

  • 조선령, 『라캉과 미술』, 경성대학교출판부, 2011
  • 자크 라캉, 『욕망 이론』, 권택영 엮, 문예출판사, 2004
  •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엮, 민음사, 2008.
  • 신인섭, 「메를로-퐁티와 세잔: 지각으로서의 회화」, 『철학』 제 96집, 한국철학회, 2008, pp. 29-53

  1. 자크 라캉, 『욕망 이론』, 권택영 엮, 문예출판사, 2004, p. 237

  2. 신인섭, 「메를로-퐁티와 세잔: 지각으로서의 회화」, 『철학』 제 96집, 한국철학회, 2008, p. 44.

  3. 질 들뢰즈, 하태환 옮김,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18. p. 139

최소현

미술을 공부하고, 관련기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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