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에서는 ‘ART’와 ‘art’를 구분해서 쓴다고 해. ‘대문자 ART’가 18세기부터의 본격화된 순수예술을 상징한다면 ‘소문자 art’는 포스트ART를 상징하면서 ART 이전의 삶에 기반한 포괄적 예술을 지향한다는 거야. 2022년에 출판된 『지역의 발명』 (이무열 저, 착한책가게)에서는 지역을 로컬과 구분했었어. 다양, 관계, 순환이란 생명의 가치를 특징으로 하는 지역과 다르게 로컬은 행정과 자본의 필요로 만들어진 로컬 열풍의 영향을 받은 지역 신흥자본의 상징으로 해석했지. 사실 이 구분은 21C 한국으로 소환된 일그러진 로컬을 대상으로 한 다분히 시사적인 의미였지 분류는 아니었어.
이제 제대로 로컬을 분류해볼까 해. LOCAL과 local은 ART와 art의 분류에서처럼 분명한 자기 성격과 상징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local과 LOCAL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것만 잘 분류해도 제대로 된 로컬리즘(localism)을 만들 수 있고 행정이나 기업, 관계자들이 지역회복의 방향을 잘 잡을 수 있겠지. 그래서 분류해보기로 한 거야.
첫 번째, 소문자 local은 “주민 스스로가 각자의 취향과 욕망에 따라서 지역을 발명하는 일”이지. 생태철학자 티머시 모턴은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크다.”라고 했어. 지역으로 흡수되는 주민들이 아니라 각각의 주민들로 인해서 지역이 구성되는 거야. 그러면서 구성된 지역은 다시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상호유기적인 특징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개인보다 공동체만을 우선시했던 예전의 공동체문화는 지금은 어울리지 않아. 대문자 LOCAL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행정이나, 기업, 특정 전문가가 앞장서 지역을 활성화하는 일이지. 그 목적은 성장을 위한 개발과 산업이고. 여기에 따르다 보니 주민들의 욕망은 보이지 않고,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고는 하지.

두 번째로, 소문자 local은 관계와 순환을 특징으로 하지. 그래서 지역사업의 의미와 성과는 ‘관계를 만들 수 있는가?’의 여부로 판단해야 해. 이제 관계는 주민들 사이의 관계이면서 지역을 구성하는 비인간 사물들로 확장되고 있어. 우리 발밑에 땅과, 마시는 물, 바람 그리고 곤충, 작은 풀들 등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지역을 구성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 인간이 소우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대문자 LOCAL은 빠른 성과와 양적인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정작 관계는 소홀할 수밖에 없어. 관계에 진심이더라도 사업 기간 6개월 1년 안에 신뢰와 호혜의 관계는 만들어지기 어렵지. 관계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업들이 지원이 끊기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지역사업들은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
세 번째로 소문자 local은 자기만의 시간 리듬이 있지. 생명이 살아가는 실존의 시간이고 순환하면서 하루하루 새로움이 생성되는 시간 리듬이야. 이 시간 리듬에 따라서 지역들은 고유성으로 구성된 자기 공간을 가지게 되는 거야. 대문자 LOCAL은 24시간 60분 60초라는 획일화되고 절대적인, 기계화 된 시간이지. 고유성을 구성하는 개별성은 인정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의 기준에 맞춰야 해. 느껴봐 영해의 시간 리듬과 서울 강남의 시간 리듬은 같을 수 있을까? 흐린 날과 맑은 날의 시간 리듬이 같을까? 기계화되지 않은 우리 몸의 시간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
네 번째는 소문자 local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된 상태에서 유기적으로 확장되면서 수렴되는 역설적인 과정이지. 그러다 보니 돌봄이 어느 순간 예술이 되고, 농사가 되고, 교육이 되고, 놀이가 되다가 다시 돌아와 돌봄이 되는 거지. 대문자 LOCAL은 모든 게 분리된 채로 고립되어 있다 보니 돌봄, 예술, 농사가 반복될 뿐이야. 재미도 없고 새로운 게 나올 수 없지 않겠어. 게다가 행정에서는 같은 일을 놓고 부서마다 중복해서 하니까 돈도 더 들고, 내 일이니 네 일이니 미루기도 하고 그러니 일은 혼란스럽고 나아질 수가 없지. 삶은 모두 연결되어 있잖아. 지역에서 놀고, 공부하고, 밥 먹고, 일하고 이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어. 밖으로 열려있어서 무엇이든지 수용하고, 안으로 갇혀 있어서 나로 축적되고 이렇게 복잡하게 확장되고 얽혀있는 게 소문자 local이야.
다섯 번째는 네 번째와 연결되는데 고유성과 일반성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봐야 해. 당연히 소문자 local은 고유성이 일반성을 받아들여 변화가 끊이질 않지만, 대문자는 LOCAL은 일반성이 고유성을 흡수해 독특한 고유의 가치는 사라지고 말아. 어딜 가더라도 대기업 프랜차이즈 상점들이고 집과 거리의 풍경이 비슷해지고 있잖아. 달라야 관심 가고 재미있는데 말이지. 그러니 고유성을 살리지 않고 어떻게 로컬을 이야기할 수 있겠어?

사진 출처: jashmingg
그럼 소문자 local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생태학자 슈마허는 지역에 내려가는 직접 지원의 대안으로 무형의 지식(교육, 조직, 문화 등)을 학습할 수 있는 know how를 제공하고 지역에 적합한 적정기술(내발적 발전)을 활용한 정책을 제공하는 모델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보듯 대량 실업 상태와 대도시로 대량 이주를 막을 수 없다고 했어. 한마디로 지역에 내재된 가치를 다시 발견해 주민들이 삶의 문화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거지. 이렇게 소문자 local은 세포가 분열하듯 자기조직운동을 하는 동사(動詞)와 같아. 사실 우리가 하는 일은 최종 결과는 없고 신기루 같은 결과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지.
진짜 local을 정리해볼까? local은 지역과 주민에 초점을 맞추어 관계와 순환, 차이 있는 고유성, 확장과 수렴, 지역 중심주의로 살림(누구라도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을 하는 곳! 이것으로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면서 협력을 만들어내고 공동체감, 연민의 감정으로 자유롭게 더불어 사는 곳! 이게 local이야. 이래야 대문자 LOCAL을 앞세워 쓰러지면서까지 성장할 수 있다는 최면에서 탈출할 수 있지.
유행을 탄 LOCAL의 형식이 local의 가치를 더 이상 왜곡하지 못하게 하자. 이제부터는 local의 가치로 로컬의 형식까지 바꿔보자. 이래야 지역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