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의 노인 요양보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양한 연령층의 요양보호사들이 인터뷰에 참여했고, 그들을 통해 한국의 노인 돌봄 현장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요양원과 무관하지 않은 일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좀 더 가까이 들렸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이 일을 해온 이들의 이야기는 다양했으며, 모두가 ‘요양보호사’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인상적인 인터뷰를 해주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요양보호사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그 일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이에요.”라는 말이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자칫 수동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채워주고,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주는 것이 돌봄이 될 수 있다니, 의외였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할까? 상대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일을 하며 요청이 올 때까지 거리를 두고 기다려야 할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다양한 돌봄을 경험한다. 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생애주기에 따라 돌봄은 인생에서 떼어낼 수 없는 중요한 행위이다. 우리는 돌봄을 받으며 태어나 누군가를 돌보고, 결국 다른 누군가의 돌봄을 받게 된다. ‘기다림’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한 사람은 다른 이의 기다림 속에서 성장하고,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인생을 펼쳐나가고, 또다시 어떤 이의 기다림 속에서 나이를 먹어간다. 하지만 돌봄은 우리 생애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때로는 그 가치가 저평가되고, 관심 밖의 주제나 눈에 띄지 않는 시스템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돌봄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나 전문 지식, 기술, 태도 훈련은 전무하며, ‘어렵지 않은 일’, ‘반복적인 일’, ‘저임금 노동’ 정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영국 사회의 돌봄 노동 현실을 알린 칼럼니스트 매들린 번팅은 돌봄이 지닌 여러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사회는 돌봄 경제에 시간, 돈, 가치를 투자하지 않으며, 돌봄 관계 속에 흐르는 시간, 관심, 공감, 존중, 신뢰, 존엄, 호혜, 연대를 인식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 사회는 양질의 돌봄이 충분한 보상과 좋은 노동 조건, 적절한 자금 지원, 효과적인 관리, 문화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돌봄은 성인이나 천사, 영웅의 일이 아니다.” (매들린 번팅, 『사랑의 노동』, (서울: 반비, 2022), 16)
번팅은 또 돌봄 시스템 내에서 발생하는 불미스러운 사건과 위기가 종종 보도되며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만, 이내 금세 무관심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지적한다. 이에 더해 돌봄 시스템에서 일하는 대다수가 여성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게 전한다.
돌봄은 복잡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는 돌봄이 명백히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돌봄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에 이를 외면하고 소홀히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저출산 문제,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피부로 느껴지는 요양시설과 종사자들의 열악한 환경, 노인 복지에 대한 숙고 부족 등은 우리가 돌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다.
더군다나 돌봄을 받는 이들의 경험은 매우 개인적이어서 객관적인 수치나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할 때도 많다. 다양한 존재로부터 요청되는 돌봄의 가치를 생각해 보면, 돌봄을 정의하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돌봄의 연약한 성질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돌봄이 무엇인지 묻고, 서로의 안녕을 위해 기다려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돌봄이 아닐까. 이는 우리가 언젠가는 또다시 돌봄을 받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단순한 진실에서 비롯되는 바람일 것이다.

“포유류 중 인간처럼 오랜 기간을 의존적으로 살아가는 동물도 없다.” (번팅) 맞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일어서지도, 스스로 먹지도 못한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돌봄 제공자에게 의존해 성장하는 것이 사람이다. 성장한 후에는 ‘나는 혼자 컸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누구도 돌봄과 보호 없이는 지금의 삶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돌봄’이라는 행위는 ‘키우고 양육하고 보살피는’ 과정으로서, 우리는 이를 통해 살아남고 존재한다. 이 사실이 우리가 돌봄을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이고, 불확실함 속에서도 돌봄의 자리를 탐색하는 이유이다.
다시 ‘기다림’으로의 돌봄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오늘날 점점 무관심한 사회 속에서 서로의 거리를 좁히고, 또 때로는 떨어뜨리며 기다려주는 돌봄을 할 수 있을까? 신승철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돌봄을 ‘관계의 거리 조절의 미학’이라고 부르며, 우애와 환대 사이에서 거리 조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랑은 동일시와 의존으로 관계 사이의 여백이 없다면, 우애는 착하면서도 악동 같고, 이타적이면서도 이기적이며, 협동하면서도 견제하는 입체적 인물로서 친구를 등장시켜 끊임없는 여백을 만든다. 이 여백 속에서 거리 조절이 가능해진다. 근접 거리에서의 돌봄 노동인 사랑노동, 거리 조절을 통해 이루어지는 돌봄 노동인 우애노동, 그리고 자신과 가장 먼 거리의 존재를 돌보는 연대노동이 존재할 수 있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권범철 외, 『돌봄의 시간들』, (서울: 모시는사람들, 2023), 105)
성과와 이익이 중시되는 이 시대에서 돌봄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동시에 고민으로만 그치지 않고, 서로의 보폭을 헤아리고 서로를 기다려주며 돌봄을 이어나갈 때, 돌봄은 성장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 책임과 연대, 우애를 나누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돌봄이 우리 삶에 필수적인 행위임을 깨닫는 순간, 돌봄의 가치는 온전히 지켜질 것이고 그 안에 있는 모두를 안전한 돌봄 공동체로 이어줄 것이다. 서로가 진정한 기다림과 기다려줌을 나누는 날까지, 함께 서로를 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