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에 관하여②] 소통에 ‘나’는 없다

‘어떠한 것이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한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이 같은 소통 혹은 의사소통의 사전적 정의처럼, 소통이 잘 됐다는 객관적 판단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사고실험을 통해 소통에 대한 판단은 매우 주관적이고, 결과중심적이며, 자기만족적일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번엔 소통과 다름, 공감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소통에 관하여] 시리즈 총3회 중 두 번째 글이다.

소통‘되는’ 사람

누가 누구에게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인가?

모두가 주관적으로 자기만족하며 소통이 잘 됐다고 착각하면서 사는 것도 그 나름대로 행복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소통이 잘 됐다고 느끼는 경우보다는 그 반대가 훨씬 많지 않겠는가? 게다가 소통이 안 된다는 불만은 소통이 잘 된다는 착각보다 조금 더 위험할 수 있다. 소통이 잘 된다는 착각은 내 입장에서는 상대방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하지만(상대방은 속이 터질지 몰라도), 소통이 안 된다는 생각은 소통하는 상대방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상대방이 내 말을 잘 못 알아듣거나 내 의견에 동의를 안 하거나 나와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는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 독선적인 사람, 공감능력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반대로 내가 그의 말을 잘 못 알아듣거나 그가 어떤 상태인지 파악이 잘 안된다면, 그는 말 못 알아듣게 하는 사람, 감정 표현 잘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얼마 전 만났던 어떤 분은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는 소통이 너무 잘 된다면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 힘든 얘기를 들을 줄 안다. 근데 그렇게 안 들어주고 ‘나는 안 그래’라고 하면 어려움이 생긴다.”고 이야기했다. 맞는 이야기 같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얘기하거나, 내 얘기에 동의, 공감하지 않았다고 해서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소통이 허락되는 영역

의사소통에 대해 말할 때면 우리는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생각이 다른 것이지 틀린 게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세월호 천막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는 일베 회원과 세월호 지킴이 활동을 하는 시민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속 시원한 소통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우리가 속 시원한 소통을 할 수 있는 대화의 영역은 서로의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나 내 신념을 훼손하지 않는 부분으로 한정되지 않는가? 소통은 이런 ‘안전한’ 영역에서 가능하며,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다른 생각이나 신념을 가진 이들과 대화를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다. 점점 멀어지게 되기도 한다. 친지끼리는 정치얘기 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가진 집안들이 꽤 많지 않은가?

“그래, 생각의 차이는 인정한다. 하지만 공감이라는 것은 필수적인 것 아닌가?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명 이성의 영역과 감정의 영역은 다르니까. 누군가가 슬픔을 느끼고 아픔을 느낀다는데 거기에 대해 어떻게 맞다, 아니다,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공감능력 떨어지는 사람으로 비난 받는다. 하지만 2016년 촛불집회로 부패한 정권을 교체했던 시민들이 “전(前) 대통령이 여성의 몸으로 감옥에 너무 오래있어서 불쌍하다.”는 호소에 공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사이라도 서로 공감하기는 쉽지 않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감이라는 것도 자신의 감정과 어느 정도 유사한 감정을 느끼는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 같지 않은가? 뇌과학에서는 ‘우리의 신념이 지나온 경험의 축적이듯이, 감정도 역사적인 것이며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어떻게 각자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타인에게 무조건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소통이 잘 되면 신기한 거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소통이 잘 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예 소통이 잘 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소통이 잘 된다거나 잘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앞서 이야기했듯이 지극히 주관적이며 결과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이라는 것을 깊이 느껴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다름을 인정한다거나 공감한다는 것 역시 우리 삶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무시하는 절대적인 요청사항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사람은 모두 달라”라는 말을 인정한다면,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것을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내 말에 이견을 제시하거나 내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을 “소통 안 되는 사람”이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내 생각과 다른 사람, 내게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지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도 분명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자신과 같은 것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사람과는 잘 소통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통을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현재까지 나름 정리된 우리의 결론은, 우리가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길은 타인에게 소통이 잘 되기를 바라지 말고, 오직 내가 타인을 정확히 이해하려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통‘하고 싶은’ 사람

대화법이 아닌 욕망

필자는 이전 직장에서 비폭력대화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다. 초보적 수준에서 비폭력대화의 대화법은 상대방의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아이: 엄마, 나 시험 망쳤어요.
엄마: 아, 시험을 망쳤구나.
아이: 네. 그래서 너무 속상해요.
엄마: 그래, 시험을 잘 보고 싶었는데 망쳐서 참 속상하겠구나.
아이: 네. 다음엔 열심히 해서 잘 봐야겠어요.
엄마: 그러렴.

이런 대화법은 [교사역할훈련]이나 [부모역할훈련] 같은 책에서도 거의 비슷한 형태로 제기된다. 이 책들에서는 이렇게 상대방이 한 이야기를 반복하며 인정해주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며 심지어 내전도 해결된 적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사실 책의 이런 내용들을 읽고 워크샵에 참여했을 때 ‘이게 뭐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아이가 “엄마, 나 시험 망쳤어요.”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러게 공부 열심히 하랬지!”하고 소리를 지르는 부모보다는 공감해주는 부모가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계적인 반복이 과연 상대방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서로의 신념이나 이익을 넘어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졌던 필자는 소통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비폭력대화의 방식에 대해 재평가를 하게 되었다. 비폭력대화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소통에서 ‘나’를 지운다면

우리가 소통에서 자신을 소거한다면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일차적이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되도록 정확히 듣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상대방의 이야기는 내 경험과 맥락 안에서 재해석되기 마련이라 우리의 듣기는 매우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말을 반복하며 다시 확인하는 것은 타인의 감정을 정리해주거나 원하는 합의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도구적 제스처가 아니라, 내 스스로 타인의 이야기를 잘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비폭력대화에서 제시되었던 대화의 기법은 하나의 욕망, 그리고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내가 이해받기보다 타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 그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그것을 위해 경청하고 내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는 진지한 태도. 비폭력대화의 정수는 소통의 중심을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전환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비폭력대화에서는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만큼 자기 자신도 이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위한 대화 기법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우리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행하고 좌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앞의 엄마와 아이의 대화에서, 엄마가 공부를 안 하는 아이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면 그건 ‘나 메시지’를 통해 표현이 되어야 건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만 진실일 수 있다. 아이가 시험을 앞두고 느꼈을 부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뭐에 쓸지도 모르는 공부를 반복해야 하는 고통. 만약 이것을 아이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아이가 공부를 안 하는 것에 대해 갖고 있던 불만이 그대로 남아있겠는가? 우리는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경우,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 감정이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들뢰즈-가타리가 이야기한 ‘되기’의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타인(또는 다른 생명)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서 이전과는 다른 욕망이나 신념을 가진 다른 ‘생명’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진정한 소통은 내가 이해받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소통 뒤에 마주하는 것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소통을 통해 서로 깊은 관계를 맺거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소통을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라고 할 때, 이것은 우리를 반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2016년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민중은 개, 돼지. 신분제를 공고화 시켜야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평소 그럴듯한 말만 하던 사람에게서 우리는 일순 진실을 보았고, 그것은 그가 언급했던 ‘민중’들을 분노로 이끌었다. 아마 취재를 했던 기자들은 술자리에서 나 기획관과의 진솔한 소통을 통해 그의 진심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결코 더 높은 자리에 올려서는 안 될 한 인간을 리스트업 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많다. 광주, 세월호에 대한 망언을 하는 국회의원과 그들이 속한 당을 바라보며, 깊이 이해할수록 더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되지 않는가?(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겠지만) 그러니 진정한 소통은 어쩌면 평화를 향한 길이 아니라 진실로 향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에 관하여③에서 계속…

소통에 대해 조금 더 근거를 갖고 학술적으로 접근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수준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쓰고 보니 소통에 대해 필자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분들의 의견이 궁금하군요. 소통에 대한 다른 생각이나 관점, 경험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면 ecosophialab@gmail.com로 의견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통의 진화를 위해(^^), 이어지는 3편에서는 소통을 통해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대화란 어떤 형태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_필자 주

호찬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하자.

심순

타고난 과격한 성격을 고치고 착하게 살아보고자 심순(心淳)이라는 별명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수시로 버럭과 반성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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