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 담론, 이제 시작이다! – 전환사회를 향한 정면대응을 기대하며

최근 생태운동진영을 비롯한 몇몇 협동조합 등에서 탈성장 담론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저성장 시대를 그저 막연한 우려의 시선만으로 수동적으로 맞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탈성장 담론은 저성장의 근본원인인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에 대해서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일 수 있다.

“이렇게 가난한데, 더 가난해지라니!” 처음 반응은 다들 이랬다.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탈성장 담론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치솟는 집값과 생활 물가, 가계 부채와 얄팍해진 지갑, 소득원의 상실, 그림자노동 등 현실은 참 녹녹치 않다. 특히 청년세대나 탄소빈곤층이 감내해야 할 퍽퍽한 삶은 어깨를 무겁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탈성장 담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는 이러한 현실과 관련된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하고, 지나친 이상주의나 도덕적 의무와 당위를 주장하는 사람의 담론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와 부담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 저성장 시대, 탈성장 담론은 환영받지 못하고 있어
  • 성장주의는 여전히 우리 삶을 장악하고 있어

저성장 시대에 대한 대처법과 대응방법을 찾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 마음 속 세상은 여전히 성장주의 시대를 지속하고 있다. 유례없는 저성장에도 불구하고 ‘이 불황만 지나면’ 혹은 ‘내가 하는 일만은 예외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중 누구도 성장주의를 넘어서 탈성장으로 향하는 생활양식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력이 발달해 있지 않다. 70~80대 노년층을 제외하고는 성장주의 이외의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본 경험이 단 한번도 없는 것이다. 물론 40~50대의 경우 어릴 때 개발주의 시절의 기억이 아련히 남아 있지만, 탈성장 담론이 갖고 있는 성격과는 전혀 다름은 분명하다.

유례없는 저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는 ‘이 불황만 지나면’ 혹은 ‘내가 하는 일만은 예외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성장주의를 넘어서 탈성장으로 향하는 생활양식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력이 발달해 있지 않은 것이다.
유례없는 저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는 ‘이 불황만 지나면’ 혹은 ‘내가 하는 일만은 예외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성장주의를 넘어서 탈성장으로 향하는 생활양식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력이 발달해 있지 않은 것이다.

성장주의 담론은 개인적으로 성공주의, 승리주의, 처세술, 자기계발 담론으로 현현하여 왔다. 성장주의는 경쟁, 효율성, 속도를 특징으로 하며,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식이 아니라 성공한 개인이라는 피라미드 상단의 화려한 삶에 대한 선망과 목적의식으로 무장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총동원령이 떨어진 전장에 선 병사와 같은 심정으로 삶을 살게 만들었다. 전쟁 같은 삶, 전쟁 같은 노동, 전쟁 같은 사랑이 있었다. 성장의 논리는 분배의 논리와 한 쌍을 이루며, 파이가 커져야 나눌 수 있는 몫이 커진다는 레퍼토리를 반복했다. 그러나 양극화와 사회불평등 문제는 결코 성장주의를 통해서 풀 수 없으며, 파이의 크기를 키워서 나누자는 주장은 매우 위선적인 논리임이 드러났다. 이와 반대로 탈성장 담론은, 피라미드 하단으로 향할 때 우리가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질 수 있다는 전망으로 향한다. 그것은 느림과 여백, 화음과 공생, 소수자되기의 가치를 갖고 있다.

이 두 관점의 차이는, 진화론이 갖고 있는 ‘최적 적응의 개체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공생진화론이 말하는 ‘대체로 적응하는 개체들의 상호의존으로 향할 것인가’의 대립처럼 느껴진다. 생태계에서는 최적 적응한 강자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적응한 생명들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기대면서 생존할 수 있는 연결망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립되지 않고 관계를 맺으면서 탈성장 시대에 대응한다면, 가난하지만 행복한 공동체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최적적응이 아닌 대체로 적응으로
  • 우리는 탈성장의 생활양식을 개발해야

최근 필자는 한 공동체 회의에 참석했다가, 그 자리에서 칼 폴라니의 국가-시장-공동체의 구도를 활용하여 공유(公有)와 공유(共有)와 사유(私有)의 교직을 표현한 다이어그램을 접했다. 말하자면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과 ‘세금으로 모아서 복지로 나누는 국가’와 ‘선물을 주고받는 공동체와 사회’가 어떻게 교직하여 시너지를 발휘해야 하는가에 대해 일상적으로 반복되던 대화였다. 늘 보아오던 너무나 익숙한 그림이었고, 평소와 같았다면 전혀 문제의식이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가만 있자, 좀 이상해요”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공무(空無)와 같이 가난과 비어 있음, 무아(無我)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지요?” 우리는 갑자기 얼어붙었다. 우리 자신도 유(有)를 넘어 무(無)를 생각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리 사이에서는 갑자기 공공공(共公空)사회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즉, 기본소득과 같은 공공의 자원을 필요로 하면서도 공유재(commons)를 작동시키면서도 더불어 가난한 공동체에 대한 상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머릿속에 일시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무척 활발해졌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마 탈성장사회는 자원이 있기 전에 활력이 먼저 있고, 사물 이전에 관계가 먼저 있고, 개체보다 연결망이 중시되는 전환사회일 것이라는 스케치와 아이디어, 영감이 우리 사이에서 생겼다.

  •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문제설정 앞에 서 있는 문명
  • 문제설정에 대한 민감도와 지도그리기는 혁명적 상황

최근 협동조합이나 공동체에서 탈성장 담론이 화두가 되고 있다. 그 이유는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계 위기가 바로 눈앞에 와 있는 상황에서, 생태계 위기 상황에 대응하여 지구에 덜 하중을 주고 생명과 자연을 고려한 삶의 방식이 탈성장 전환사회의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성장주의 담론은 성장의 재료이자 자원으로 무한한 생명과 자연의 원천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1972)가 밝힌 바대로 생명과 자연, 지구의 한계는 명확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성장에 기반한 문명이 지속될수록 그에 따른 자연과 생명의 아우성은 인류에게는 거대한 위기와 역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다.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와 같은 각종 기후변화 회의에서 ‘2030년까지 탄소제로사회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는 커다란 고난과 위기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세계 과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는 상황만 보더라도 그렇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동적으로 저성장이라는 시대적 무게에 눌려서 허덕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탈성장이라는 정면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라는 거대한 문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주저할 시간의 여백도, 향수와 낭만을 느낄 여유도, 나만 어떻게 되겠지, 라는 요행의 여지도 없다. 우리는 이 거대한 문제 상황에 대해서 민감하고도 예민하고 섬세하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관된 지향성을 가져나가야 할 것이다. 이 자체가 바로 혁명적 상황이다. 거대한 문제 상황 앞에 여러 가지 지도를 그리며 대응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혁명이기 때문이다. 탈성장이라는 거대한 문제 상황 또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따라 수동적이고 비루한 일상의 연속이 될지, 새로운 삶의 양식의 놀라운 창안이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 앞에는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탈성장 전환사회로 향하는 색다른 혁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말처럼, 그 혁명은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한 혁명, 도처에 있는 혁명일 것이다. 그래서 혁명을 하자는 얘기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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