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보다 과정이 더 의미 있었다
한 대안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일화입니다. 그 대안학교 전체 학생들에게 미션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직접 학교 강령을 만들어보자”는 학생들의 제안을 실행하게 된 것이지요. 누군가의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교칙을 수동적으로 지키는 것은, 그것이 강제적이든 아니든 학생들의 자율성을 해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곧 전교생이 모여 회의를 시작합니다. 선생님이 개입하면 항의하기도 하고, 활달한 아이디어를 모으기도 하고, 회의 과정에서의 갈등을 스스로 조정하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고, 학생들 사이에 활력과 생명 에너지가 넘쳐흘렀습니다. 수선스럽고 복잡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1년 후 드디어 강령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금까지 강령을 만들었던 활력과 에너지는 사라지고, 강령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가 등장하는가 하면, 신입생들에게 역사적 의미를 들먹이며 규제하는 방식도 등장합니다. 활력과 에너지는 뚝 떨어지고 아이들은 힘이 빠집니다. 이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준 선생님은, 그 학교에서는 그 값진 경험을 통해 어떤 완성된 강령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늘 강령을 만드는 과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진 : 규리
세상일은 대부분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흐름 속에서 에너지와 활력이 생깁니다. 그것이 되기의 비밀이기도 하지만, 질문이 나오면 그 질문을 풀기 위해 끙끙대고 답을 찾는 과정이 의미가 있는 법이지요.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답이 있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시간차가 발생하는 것과도 유사합니다. 상품을 살 때는 물건을 받는 순간과 돈을 주는 순간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래서 과정이나 진행형은 무시되지요. 그래서 세상에는 뚝딱 온라인으로 구매하고 택배로 받는 방식이 일반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은 참 다릅니다. 물건을 주고받는 과정에 시간의 간극이 발생합니다. 그 간극에서 에피소드나 상상력, 활력이 발생합니다. 또 선물을 받자마자 곧바로 답례를 하면 마치 거래하는 것처럼 정 없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답례품의 적당한 가격과 시기를 포착하는 등 고도의 배려와 계산이 필요한 법이지요. 이처럼 되기의 과정은 어떤 목적에 종속되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품이 아니라, 사랑과 욕망을 주고받기 위해서 서로 탐색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때에는 합리적이고 인과적인 방식의 논증이 유행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질문에는 반드시 어떤 답이 따른다고 생각했지요. 그것은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것을 만들어낸 원인이 있다는 인과론, 즉 뉴턴적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피노자가 『에티카』 후반부 작업의 과정에서 겪었던 에피소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을 후원하던 드 비트 형제가 피살당하는 상황에서도 그 현장으로 달려가 원수를 갚지 못하고, 삶의 자기원인을 일치시키지 못합니다. 그 이후 현격한 단절이 이루어집니다. 즉 삶의 자기원인에 따라 문제 제기로서의 입구와 대답으로서의 출구가 일치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문제 제기와 대답의 분열 사이에서 지도를 그리듯 탐색하는 지적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스피노자가 이미 문제 제기와 대답이 일치하는 의미화에 기반한 기하학에서 문제 제기와 대답이 불일치하면서 그 과정과 진행형에 따라 지도를 그리는 지도화로 이행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스피노자는 사랑과 욕망, 정동의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일관된 흐름에 몸을 싣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관계의 성숙과 재특이화 과정
연구실에서 세미나를 하다 보면,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를수록 세미나 구성원들 사이에서 마치 누룩이나 된장이 발효되듯 천천히 관계가 성숙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는 데면데면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눈빛만 봐도, 표정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읽곤 합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타인의 상상력과 생각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웃고 기뻐하고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사람들 사이에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연못이나 풀장 하나가 생긴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마치 누운 채 둥둥 떠다니면서 음료수를 마시고 책을 볼 수 있는 소금연못처럼 성숙된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여유롭게 관계의 미학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그 과정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이렇듯 관계의 성숙과 발효는 어떤 목표를 향해 효율적으로 달려가는 집단이 아니라, 미지의 곳을 향해 유영하고 여행하는 듯한 공동체에 더 어울리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되기는 이러한 관계의 성숙을 만들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흐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관계가 성숙해 너와 나 사이에서 서로에게 되기를 할 때 무엇이 생성될까요? 그것은 아마도 배치가 만든 색다른 특이성일 겁니다. 그것은 ‘우리 중 누군가’로 불쑥 나타납니다. 되기에 따라 관계가 성숙하면, 어느 날은 라디오도 되고, 바닷가재도 되고, 고양이도 되고, 술꾼도 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이성이 관계 사이에서 되기의 강렬도에 따라 갑자기 출현했다가 금방 사라지기도 하고, 집단 내부의 사랑과 욕망의 강렬도가 얼마나 크냐에 따라 마치 강렬한 자기장 속에서 춤추는 자석처럼 무언의 춤사위를 추는 안무가처럼 말을 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뛰어놉니다. 그 과정에서 되기의 흐름은 많은 창조물들을 남깁니다.
되기의 역능, 즉 사랑과 욕망의 능력을 잘 보여준 사람이 프란츠 카프카입니다. 카프카는 체코 사회에서 주변적인 인물이었지만,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만 글을 썼습니다. 『변신』도 친구들을 웃기기 위한 소설이었죠. 그 글에서 카프카는 어느 날 바퀴벌레가 된 자신의 삶을 보여주었지요. 친구들은 낄낄거리며 웃으면서 자신들의 공동체가 만들어낸 엄청난 강렬도와 신체변용, 즉 되기의 독서를 즐거워했습니다.
되기는, 책임주체로서의 딱딱한 지위, 직분, 역할, 기능, 직업 등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실 카프카는 출판을 목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친구들에게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부탁했지만, 친구 중 한 사람이 그의 유언을 어겼지요. 결과적으로 카프카는 책임주체인 소설가라는 정체성을 갖고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그 덕분에 되기의 능력, 변신의 능력, 변용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었지요. 그저 우리 사이의 어느 누군가, 즉 사이주체성으로서만 발언합니다. 사이주체성은 특이성이라고도 불립니다. 마치 공동체의 판이 깔리면 이야기꾼도 되고, 가수도 되고, 춤꾼도 되고, 바보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되기, 즉 신체변용 능력을 통해 특이성을 발휘합니다.
카프카는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실직한 후 가족 공동체 속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을 바퀴벌레로의 변신으로 표현했습니다. 당대는 직분, 역할, 정체성만이 합리적이라고 간주되던 관료주의가 첨예화되었던 시기였고 파시즘이 도래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실직자’란 정체성으로 식별되지 않는 특이성의 존재인 셈이지요. 카프카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은 직업이나 정체성이 아닌 바로 이러한 특이성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속에서 이야기꾼이라는 특이성을 통해 아주 특이한 상상력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가타리는 특이성 생산, 즉 ‘공동체 속에서 특이성을 생산할 수 있는 판을 까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표 지점이 아닌 되기의 과정, 재특이화 과정, 특이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애인과 헤어진 후 시를 쓴다고 해봅시다. 그는 애인과 헤어졌던 슬픔의 입구를 까맣게 잊고 시를 쓰는 재미에 푹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시를 노래가사로 만들자는 제안이 오면 그는 음악에 가사를 입히는 일에 열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되기의 과정은, 애인이 헤어졌다는 슬픔의 입구와 시인 되기나 작사가 되기라는 출구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지도를 그리듯 전개됩니다. 특히 공동체 속에서는 되기와 되기 사이를 횡단하면서 다양하게 변신과 신체변용에 능한 사람들을 만들어냅니다. 이에 따라 되기를 통한 특이성을 생산하는 과정 자체가 공동체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중요해진 것입니다.
사랑은 늘 과도기, 늘 이행기
사랑은 존재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늘 진행되고 성숙하는 이행의 과정에 있습니다. 사랑의 완성을 상상하고 있다면 그건 불가능을 꿈꾸는 것입니다. 사랑은 늘 과정이며, 과도기이며, 이행기입니다. 1990년대 TV 광고에서도 “사랑은 움직이는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람을 고정시키고 다른 사람으로 슬쩍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수많은 사람이 내재하고 있고 함께 신체가 변용되어 미지의 곳으로 앙상블을 이루어 얼굴을 마주보며 향하는 인생의 항로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무질서(카오스)라면, 변화하고 변용되는 것 자체가 조화이며 균형이며 질서(코스모스)라는 사실도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이라는 신체변용이 그리는 인생의 행로의 감속과 가속의 과정에서 울고 웃고 즐기고 노래하면서 특이성을 발현하는 것이겠지요.
되기의 이행기와 과도기 단계에서 섬광처럼 나타나는 자기 안의 타자의 현존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는, 즉 자신의 삶에 내재해 있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타자의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의 증거를 알아보려면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됩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말하고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목소리가 바로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사람들은 녹음기의 기능을 빌리지 않고는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성대의 울림이 머리 쪽으로 향하는 울림뿐입니다. 내부에서 길을 잃지 않고 외부로 진동하는 그 목소리가 바로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늘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오히려 내 안에 있는 타자의 목소리였던 것이지요. 자기 안에 타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험은, 결국 어떻게 하면 다양한 타자로의 변용의 경로, 즉 되기의 과정을 창조하고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에 주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른다”라고 했던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 자신의 신체 표면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과 되기의 능력을 재발견하고 재창안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아이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바닷가재도 되는 신체변용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늘 이행하고 횡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이다”라고 정체성을 특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혹자는 “사랑에 목적이 있는가? 과정일 뿐인가?”라고 묻습니다. 물론 스피노자의 신체변용이 던지는 메시지는 사랑은 과정이며, 흐름이며, 되기라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에게 결혼은 사랑의 완성일 수 없으며, 사랑을 정체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스피노자는 계속 주저하면서 약혼과 파혼을 반복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늘 사랑과 욕망의 흐름의 강렬도 속에서 인생의 시간의 윤곽선을, 무의식의 행렬을, 일관된 지향성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완성태가 없는 과정태로서 진행태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생활인이었기에, 중세인도 근대인도 아닌 탈근대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미래인이라 부르는 게 맞겠네요.
앞에서도 몇 차례 얘기했듯이 보조국가 지눌은 돈오점수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돈오, 즉 단번에 깨달음의 지속이 먼저인가? 점수, 즉 끊임없는 수행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아마 되기는 점수에 가까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이성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과정이 마치 찰나의 수행 과정과도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돈오와 같이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특이성’과 점수와 같이 찰나 자체의 ‘유일무이한 사건의 순간으로서의 특이성’ 모두를 얘기합니다. 즉 특이성은 존재로서도 사건으로서도 동시에 얘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건으로서의 특이성은 되기의 비밀을 알려주는 개념의 구도입니다. 매 순간마다 변신과 도주를 거듭하는 신체, 변용의 양태가 결정되어 있지 않고 표면의 접촉면에서 끊임없이 변이가 이루어지는 신체, 그것은 되기의 신체로서 유기체적인 신체와는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기관 없는 신체를 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

사진출처 : cottonbro studio
들뢰즈와 가타리는 누구나 자기 안에 타자가 내재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노래가사도 있지만, 우리는 가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있지요. 소극적이던 사람이 야수로 돌변하고, 별로 착하게 살아오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선행을 베풀기도 하고요. 삶의 내재성에 존재하는 외부성과 타자성이 갑자기 신체 표면 위로 나타난 것이겠지요. 결국 되기는 우리 안에 내재한 타자를 재발견하고 사랑하게 되는 진행형적 과정입니다. 우리 안에는 아이가 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사랑하고, 우리 안에 부랑아가 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노숙인을 사랑하고, 우리 안에 장애인이 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장애인을 사랑하고, 우리 안에 여성이 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여성을 사랑하는 등의 흐름의 과정이 펼쳐집니다. 물론 정신질환에서도 타자가 자신의 신체를 장악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변용의 능력이 극도로 위축되고 협착되고 폐색된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사랑과 욕망의 흐름, 되기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 정신병에 대한 치유가설로 제기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에 협착되어 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에 미칠 수 있는 능력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타자성을 횡단하고 이행하는 것이 되기의 치유가설일 수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외부성, 타자성의 철학이 곧 ‘내재성의 철학’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철학이 가진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우리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때, 내부에 없는 것이 외부에 있다는 식으로 사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삶의 내재성 속에서 많은 외부성과 타자성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주말 아침에 밥을 먹고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워 있을 때, 아내는 저에게서 굼벵이와 거북이, 달팽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신기한 체험을 하고 나온 아이, 졸음에 겨워 꾸벅꾸벅하는 노인, 손가락조차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삶의 내재성 속에는 생명과 자연이 살아 움직이고 있고, 외부성과 타자성이 들어와서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내재성은 마치 외부의 사물, 생명, 기계, 자연 등이 춤추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성좌와 같은 장입니다.
“그럼 우리의 삶의 내재성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하는 외부성은 주어지는 걸까요? 아니면 만들어야 하는 걸까요?” 이런 질문은 무척 생소합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문화와 습성, 생활방식을 갖기 일쑤입니다. 이처럼 세계 곳곳이 비슷하고 유사한 삶의 방식으로 통합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외부에 생명과 자연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첨단기술과 과학에 의해 발가벗겨진 채 문명 내부로 포섭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이 문명화될수록 외부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외부가 없다면 우리의 삶도 비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기한 것, 무서운 것, 특이한 것이 없는 삶은 늘 똑같고 뻔합니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명과 자연이라는 그 신기한 외부가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삶의 내재성은 곧 외부성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잠재성을 갖고 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잠재성을 더 풍부하고 다양한 특이성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문명의 외부의 소멸 국면에서 외부성의 사유는 다시 생각되어야 할 요소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생명과 자연으로서의 욕망, 내부의 외부로서의 욕망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이 미디어, 인터넷, 스마트폰, 사이버네틱스, 인공지능에 의해 포섭될 가능성에 늘 주의를 해야 하고, 신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한 우려 섞인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등장하지만, 그것을 풀 열쇠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신체변용 능력인 되기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로봇이 할 수 없는 사랑과 욕망, 정동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세계, 삶의 내재성에서는 사랑과 욕망, 정동이라는 우리 안의 생명과 자연이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놀고 한뎃잠을 자고, 마실을 나가고, 게으름을 피웁니다. 어쩌면 스피노자의 사상이 인공지능과 첨단기술사회에서 더 필요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우리는 스피노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직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