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철 1주기 추모(축)제 특집] ④ 생태적 지혜와 떡갈나무 혁명- 故 신승철의 생태철학의 현재적 의미

故 신승철 소장이 타자로 향하는 살과 피(즉 ‘횡단-신체’)를, 그리고 삶을 긍정하는 마음과 욕망을 기쁨과 사랑을 통해 세계 안으로 확산시켰던 만큼, 그의 육체적 몸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성체, 공생체, 관계체들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살아있다. 우리가 공생공락의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만들어낼 때, 무수하게 다양한 몸체들과 연결되고 가장자리에서 다시 되살아날 때, 우리가 그러한 실천을 행할 그 모든 순간 속에서, 그는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2023년 7월 2일 일요일 오후 3시, 신승철의 나이 52세. 전부터 앓던 특별한 지병이 없던 그였기에,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전조도 없이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글을 기획하고 쓰고, 크고 작은 모임들을 조직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이들을 달래면서 그들의 글쓰기를 격려하는 그 모든 활동으로 인해, 스스로는 즐겁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몸을 잘 돌보지 않고 벌였던 그러한 활동들로 인해 그가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짧은 생을 살았던 그는 지난 25년 동안 40여 권의 책을 번역‧기획‧편집‧발간했으며, 앞으로 발간을 기다리는 10여 권의 책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현대적으로 갱신하기 위한 저작들과 들뢰즈‧가타리와 공명하면서 작성된 욕망해방에 관한 책들, 스피노자를 통해 정동과 사랑, 특이성, 코나투스 등의 개념을 정치적인 용어로 재가공하고자 했던 노력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몇 년간은 통합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성장중심의 개발주의, 도구주의적 기술만능주의, 소유적 개인주의, 재현주의적 기표체제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이자 제도이며, 체제이자 실천인 그런 지배적 질서 형태들과 전투를 벌이며 그와는 다른 해방적 삶을 집단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여러 실천 활동에 매진했다.

철학을 배신한 글쓰기 기계

대학으로부터 철학 박사 학위를 부여받은 자이자,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마르크스, 들뢰즈‧가타리와 같은 철학자들의 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강렬도‧헥시어티(=thisness)‧기관없는 신체‧도표‧집합적 배치‧분열분석‧이중분절‧일관성의 구도‧횡단성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자신의 글에 자유롭게 배열한 그가 철학의 배교자가 되겠다고 다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 한승욱

그의 삶은 외부에서 보기엔 어떠한 특별함도 없는 고요한 행위의 반복이 전부였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원고를 작성하는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소소한 농담을 던지고, 집과 연구실 주변을 산책하고 여러 활동가들과 대화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면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누군가의 건강을 염려해 안부를 묻고, 고양이를 돌보는 등의 행위를 거듭해서 반복했을 뿐이기 때문이다.1 그는 바로 그러한 반복 행위들을 통해 스스로를 글쓰기 기계, 독서 기계, 경청하고 호응하는 기계, 사랑하고 돌보는 기계, 조직화 기계로 변신시키면서 자신과 타인의 욕망을 배가시키고 삶을 생산하는 일을 거듭해서 강화시켰다. 그가 기계였다는 것은 그저 유머나 은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많은 이들에게 전화벨 소리로, 갑작스레 전송된 문서 파일로, 많은 생각들이 뒤엉킨 음성‧표정이 담긴 영상으로 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그를 한 번도 대면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친숙했다고, 또 누군가는 수년간 책과 영상으로만 만났지만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또 다른 이는 수년간 알고 지냈지만 장례식에 와서야 그의 신체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핸드폰에는 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가 죽기 전 몇 달 내에 연락을 주고받은 이들도 수백 명에 달했다. 그는 그가 쓴 책의 주인공들인 배달노동자들이나 돌봄 노동자들만큼 많은 연락처를 등록하고 그들만큼 많은 소통을 시도했다.2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그의 철학 및 생태 사상과 대면하려는 이들에게는 당혹감을 주는 것일지 모른다. 이런 모습들은 철학자의 일반적 이미지, 즉 평생을 한 지역에 머물면서 극소수들의 사람들하고만 친분을 쌓으며 고유한 철학적 문제와 고독하게 씨름하는 철학자의 일반적 이미지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유한 철학자의 일’에는, 즉 추상적인 개념을 창안하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며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라고 말하)고, 오로지 자기 정신의 힘에 의지해 반박하기 힘든 정밀한 논증을 구사해 철학학회지에 논문을 투고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일들을 했다. 추상적 개념에 삶과 얼굴성이라는 특수한 옷을 입히고, 한시적이고 구체적인 사안들에 집중하며(가령 몇 개월 전 발표된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특정 시기에 한정된 이슈들을 다루고 유행처럼 떠도는 개념들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의 욕망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개념적 엄밀함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난잡하고 산만하게’(철학자들의 모임에서 누군가 그렇게 평가했다) 풀어내는 글쓰기를 수행했다. 또한 그는 철학자 대부분의 작업공간인 대학에 몸을 맡기거나 철학 전공자들을 제자로 두면서 그들을 육성하거나 철학자들의 공동체에서 집단연구를 하는 일과 거리를 두었고, 전문 철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제의식이나 언어와도 거리를 두었다. 그에 따르면,

“욕망을 세련되게 혹은 현학적으로 정의해서 아카데미에 목을 축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면 욕망과는 정반대로 향한다. 즉 아카데미는 욕망이라는 살아서 꿈틀대는 개념을 붙잡아 박제화하고 의미화하여 그것을 팔아먹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지만 정작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욕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는 역설에 봉착한다. 철학자란 의미의 구조물을 복잡하게 쌓으면서 결국 자본주의 등가교환에 복무하는 작자들이다. 그러면 나는 철학자 중에서도 … 배교자가 될 것이다.”3

대학으로부터 철학 박사 학위를 부여받은 자이자,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마르크스, 들뢰즈‧가타리와 같은 철학자들의 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강렬도‧헥시어티(=thisness)‧기관없는 신체‧도표‧집합적 배치‧분열분석‧이중분절‧일관성의 구도‧횡단성과 같은 추상적 개념(더 정확히는 이른바 ‘추상기계’)들을 자신의 글에 자유롭게 배열한 그가 철학의 배교자가 되겠다고 다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철학과 결별하겠다는 위험한 선언을 하는 것일까? 나는 그에 대한 응답을 역으로 철학의 가장 고유한 지형들 안에서 시도해보고자 하는데, 그 개괄적 내용은 이렇다. 첫째, 형이상학과 존재. 철학은 세계와 존재에 대해 거짓 문제를 제기했으며,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지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차라리 존재한 적이 없는 뭔가를 구성해야 한다. 둘째, 인식론과 진리. 앎은 의미나 진리를 획득하거나 표상하려는 순간 그 힘을 잃고 무력해지는데, 그보다는 기성 의미를 해체하거나 비기표적 기호체계를 수립할 때 지혜는 극대화된다. 진리를 생산하는 방법으로서의 연역과 귀납은 추리에 속하는 것이지만 기껏해야 비생산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이중구속의 함정에 사로잡히기 쉬운 사고의 방법이다. 상상력이나 분열분석법을 이성의 자리에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성적 사고로는 가추법이나 유비추리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셋째, 윤리학과 사회철학. 기성의 도덕과 윤리는 규범을 만들고 그 규범을 지켜야 할 당위성을 제공하는 것, 인간 행위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공해 올바른 행위를 유도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되기나 구성의 관점에서 보면, 도덕과 인륜성은 경화되고 굳어진 규범 체제나 그것을 보증할 근거 제공에 불과한 것이 된다. 신승철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구성적 윤리는 기성 규범을 파괴하고 다른 배치를 만들어내며, 전에는 상상한 적도 없는 법과 제도를 생산하는 일, 연속혁명으로서의 분자혁명이자 모든 연결된 존재들과 함께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는 떡갈나무 혁명을 일으키는 일에 초점을 둔다.

퀴디타스에 맞서는 되기와 구성

소크라테스‧플라톤 이래로 철학의 전통은 아주 오랫동안 ‘세계는 무엇이며,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아니 거의 모든 철학적 질문은 늘 이 ‘퀴디타스’(quidditas/whatness)에 구속되어 있으며, 그러한 질문의 논리적 귀결로 늘 그 해답은 형이상학적으로 방향지어졌다. 세계, 존재, 물질, 자연, 생명 등과 퀴디타스가 짝지어지는 것, 즉 무엇임을 묻는 그 질문은 질문되는 대상 안에 변하지 않은 채 고정되고 정지된 형태의 동질적인 무엇인가(본질)가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은 그러한 질문 속에서 극복되어야 할 혹은 무시되어야 할 무엇이 되며, 그것들조차 세계가 인간에 의해서만 구성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감성의 형식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은 세계의 외피나 그릇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 모든 것 속에서 상실되는 것은 시공간을 구성하는 차이와 되기(=생성)이며, 더 문제적인 것은 철학이 그렇게 세계 바깥의 초월의 영역, 즉 차이없는 동질성의 영역을 ‘바라봄’4에 따라 역으로 세계 자체를 무의미나 공허의 영역으로, 죽음의 이미지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하고 운동하는 실재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존재의 근원이 세계 바깥의 초월적‧외재적 원리로서 주어지는 만큼 운동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본질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된다. 나아가 그 결과 차이는 물질과 존재의 내재적 힘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재현과 기표화를 동반하는 인식에 의해서만, 차이 바깥의 외재적 시선으로서만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세계의 실재성을 언제까지 무, 동질성, 초월의 주술로서 부정하고 속일 수 있겠는가?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신승철이 세계를 욕망의 흐름과 되기로 이해할 때, 그가 겨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본질 물음의 신학적 주술, 형이상학적인 초월의 외삽이었다.

“기존 질서가 욕망이라는 문제제기를 봉쇄하는 방법은 상투적이다. 게걸스러운 탐욕과 갈애, 동물과 신체의 반란, 형이하학적인 것, 근대성 다시 말해 탈주술화의 역사 이전으로의 퇴행, 반항, 짐승…. 그들은 욕망이 저질스럽고 외설스러운 영상과 이미지를 소비하고 지켜볼 푹신한 살찐 소파를 제공해준다. … 그들의 관음의 시선, 관망의 시선, 관조의 시선이 더 외설스럽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5

여기에 맞서 그가 주목했던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이었다. “그[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고정되고 불변하는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늘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세계는 만물에 대해 똑같으며, 신이든, 인간이든 어느 누구도 창조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는 불이었으며 지금도 불이고 앞으로도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불로서, 법칙에 따라 타고 꺼지기를 반복한다’라고 말한다.”6 흐름에 따라 물질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우발적 형상을 띤다고 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해 그는 헤겔주의자들 역시 겨냥한다. 그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대립과 통일의 변증법으로 환원”된 세계에 갇혀 실재하는 차이를 오로지 대립과 모순으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7

그렇기에 세계를 내재적 흐름으로, 차이의 내적 힘으로 나타나는 운동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변형이 필요하다. 거짓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본질이라는 허구적 가상을 해체하기는 세계 그 자체가 실재하는 내적 동학, 차이를 생산하는 역량으로 이해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물질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물질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존재는 어떤 차이를 발휘하는가’가 질문되어야 한다. 나아가 세계와 존재가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경계 횡단적인 것이라면, 더 이상 존재를 뚜렷한 막을 가진 개체로부터 이해하는 것은 기각될 수밖에 없다. 되기가 개체에 선행하며, 흐름이 경계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신승철은 스피노자에게서 이러한 발상의 단초를 얻었다.

“외부의 역량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신체나 정신의 역능이 성장합니다. 외부의 영향은 불안의 촉매제가 아니라 변용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은 신체와 신체 사이, 사물과 신체 사이, 동물 혹은 기계와 인간 사이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되고, 여성이 되고, 동물이 되고, 식물이 되는 행위는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8

존재의 내적 힘은 욕망과 사랑에서 나오며, 이 힘은 차이를 생산하면서 존재를 세계 표면에 드러나게 한다. “사랑할수록 차이가 풍부해진다고 했던가요? 사랑이 깊어질수록 차이는 더 많아지는 것만 같고, 더 많이 발견됩니다.”9 물질이 개체로서 있고 그것들 간의 관계가 있으며 그 관계 속에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되기가 선행하고 그것이 흘러 존재의 마주침을 발생시키고 그 속에서 욕망이 자라나 존재를 더욱 강렬하고 미세하게 운동하게 하는 것이다.10 개체는 바로 그 운동의 사후적 결과물이다.

초월적 외부라는 가상을 무너뜨린다면, 우리는 이제 내재적인 세계 속에서 무수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존재들의 되기의 운동, 욕망과 사랑의 흐름으로 배가되는 차이의 운동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제 되기는 단지 특정한 개체 A의 개체 B로의 전환이 아니라, 욕망과 사랑을 통해 만들어지는 생명 세계의 공동구성, 어떠한 외부도 없이 한데 어우러지는 차이나는 반복의 영원회귀의 운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는 고정되고 정체된 본질을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 차이나는 존재들의 내부적 자기생산운동 자체 즉 세계-만들기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실재론 전통에 따른 제작은 본질적인 것의 제작이지,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치부했던 차이와 다양성, 시뮬라크르로 가득한 생명과 현실세계의 제작이 결코 아닌 것이다. … 생명체의 모든 활동이 다른 생산물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재생하는 데 대부분의 에너지-자원-물질을 소모한다. … 특이한 생각을 만드는 등의 자기 생산이 우리의 대부분의 활동을 이루는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 자신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활동의 과정이자 수단이며 목적인 셈이다.”11

생명계는 세계 내 모든 존재가 만들어내는 운동이며, 이 속에서는 어떤 존재도 우월하거나 예외적이거나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점유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생태 사상을 단순히 기성의 생태주의자들이 채택하던 가이아론이나 전체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생태계를 완전히 연결된 하나의 체계로 보는 데 주안점을 두는 만큼 내적 차이의 힘을 충분히 보지 못하거나 차이를 그저 전체의 부속물로 환원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수평적이고 동등한 생명체들의 운동은 자연을 보호하는 것을 최상의 덕목으로 여기는 환경관리주의와도 구별된다. 그것은 인간 예외주의 속에서 다른 생명체들의 능동적 구성작용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면서 오로지 목적의식을 가진 인간에 의한 생태주의만을 떠올리며, 생명체를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동식물에 한정된)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되기와 구성의 관점은 근본생태주의가 인간을 배제하는 자연회귀로, 나아가 그 극단에서의 ‘환경파시즘’(인간 죽음에의 찬양)으로 나아갈 여지를 차단한다. 생명체들의 수평적 동등성을 보장하는 “구성적 실천의 신지평”12에서는 통상 최상층에 자리한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특수한 지위를 강화시키는 것만큼이나 인간을 그 이하로 추락시키는 것 역시 경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 생태주의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들이 인공적 사물과 기계가 세계-만들기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제거해야 할 독성물질로만 취급한다는 점이다. 물론 독성물질이 인간을 비롯한 생태계의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차단하는 한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겠지만, 이 독성물질을 어디까지 설정하고 어디까지 우리의 구성적 힘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는 어떤 실천과 구성행위가 일어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성물질로 미리 규정될 수 있는 존재란 있을 수 없다. 존재양상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일은 기후위기가 심화되는 오늘날 우리가 그 위기에 응답하여 구성할 세계의 가능한 경우의 수를 늘리며, 그만큼 세계만들기는 높은 탄력성을 유지할 수 있다.

“기후위기와 더불어 생태계 위기의 역습은, 이제 생태주의가 몸에 털이 자라듯 저절로 치유되는 자연주의가 아니라 지도제작에 따라 보호되고 양육되고 돌보아져야 할 것이 자연과 생명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 도표주의는 정동의 지도제작에 따라 사물, 생명, 인간, 기계 등을 하나의 문제설정으로 보고 그 문제설정과 문제설정 간의 횡단선을 그려나가는 방법론이다. … 돌봄, 살림, 모심, 보살핌, 섬김처럼 그 주변, 곁, 가장자리를 연결하는 횡단선의 설립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정동의 반복은 특이점이 되고 인류문명이 선택할 경우의 수를 늘린다. 결국 [이는] … 생태계가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라 정동의 구성주의와 도표주의가 설립해야 할 미래진행형적 과정이라는 점을 의미한다.”13

기표적 의미화와 생태적 지혜

잘 알려져 있듯이,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일에 관한 학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진정 지혜를 사랑했던가? 아니 그보다는 몸을 통해 습득되고 몸의 감각을 열고 받아들인 바로 그 ‘지혜’와 거리를 두고 지혜를 차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오지 않았던가? 지혜를 가진 자들인 소피스트와 자신을 구별하고, 심지어 그들에 반대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과 그들이 가져야 할 생각에 대해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철학자는] 각각의 것에 가능한 한 사고 자체로만 접근하는 사람, 사고함에 어떤 시각도 개입시키지 않고 다른 어떤 감각도 추론과 함께 끌어들이지 않은 채로, 섞이지 않은 사고 그 자체만을 사용해서, 섞이지 않은 채로 추적하려 하는 사람, 눈과 귀, 말하자면 몸 전체로부터 최대한 해방되어 있는 사람[이다.] … 몸과 함께라면 그것이 영혼을 혼란스럽게 하고, 영혼이 진리와 현명함을 획득하지 못하게 된다.”14

이렇게 철학이 던지는 본질 물음이 세계를 고정되고 정지된 것으로 바라보면서 변하지 않는 확실한 진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과 달리 지혜는 그 정반대에서 변화하고 운동하는 세계 안에서 생성되는 삶-체험의 총체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수영에 대한 지식과 수영하는 법을 아는 것은 다르다. ‘수영하는 법을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이성적 활동에 충실해서는 그것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몸을 바다와 물에 개방하고 그것에 몸을 실으면서 그것과 서로 반복의 리듬을 주고받을 때 그 지혜는 체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승철이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생태주의를 운동의 관점에서 실현할 ‘생태적지혜연구소’를 설립하고 죽기 전까지 자신의 온 힘을 바쳐 활동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오늘날 자본주의 속에서 대학의 지식생산이, 이전에 철학과 학문의 목적으로 오랫동안 신봉했던 진리 추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지식을 ‘사적이고 전문화된 특권적 지식’으로 생산하며, 앎을 생산하는 활동을 삶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욕망을 위한 것이기보다 과제와 업무, 의무로 등록시킴으로써 권력체계를 보증하는 부속물로 전락시켰다고 진단한다. 이렇게 생산된 지식은 다시 우리를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전문가들은 곳곳에서 출현해 우리의 현실을 비롯해, 역사, 물질, 자연, 생태, 인간 등을 의미화-모델화-표상화의 방식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을 보편적 언어로 설파하고 그에 대한 의문과 문제 제기를 불쾌감을 표현하면서 봉쇄하며 바로 그러한 지식이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든 개인적 노력의 산물인 것처럼 허세를 떨곤 한다. 오늘날 지식은 그렇게 의미(그리고 그 의미가 담긴 세계)를 고정시키고, 이익을 얻고, 권력을 행사하며, 타인과 생명체들의 삶을 마음껏 재단하는 권력체제의 일반적 망을 구성하는 권력 메커니즘이 되었다. 이렇게 어떤 대상에게 하나의 사전적이고 표준화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연과 생명체의 역동성과 흐름을 차단하거나 그것들 간의 연결망을 폐쇄시킨다. ‘생태적 지혜’는 어떨까? 가령 되기와 구성의 관점에서 사자는 ‘식육목 고양이과 표범속으로 분류되는 포유류’가 아니라, 대초원과 공생하는 별자리 속 짐승이지만, 또한 달리며 발톱을 세우는 저항자들의 상징일 수도, 착취하고 탄압하는 권력기관의 재현물일 수 있다. 사자는 울부짖으며 자신의 의미를 세계 속으로 개방하며, 우리는 그러한 사자와의 공생관계를 수립할 때에만 즉 사자되기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의 몸의 일부가 된 그것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태적 지혜’는

“n분절의 스펙트럼의 방법론을 통해서, 그것에 대해서 ‘~은 ~이다’라고 정의내리는 방법이 아니라,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라는 방식으로 현실을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정의 내려진 하나하나의 모음과 모임으로만 규정될 수 없는 잠재적 현실로서의 생태주의적 스펙트럼은 그저 가상적인 형태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습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현실적 형태로 긍정될 수 있다.”15

앎은 이제 더 이상 권력의 시녀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그러한 권력과 싸우고 내일의 삶을 여는 공동 지혜의 기반이자 함께 살아갈 존재들의 실재적 삶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지혜로서 생산될 필요가 있다. 신승철은 이러한 지혜 생산의 계기를 펠릭스 가타리의 분열분석론/분열생성론에서 도출하고자 했다. “분열이 일단 발생하면 기존 사회의 배치가 의문시되고, 뒤흔들린다. 설혹 그것이 병리적 분열일 경우에도 극한적으로는 창조의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분열생성론의 주장이다. 분열생성은 아주 작은 영역에서 시작하여 배치를 바꾸고, 배치와 배치 사이를 새로이 관계 맺게 만들며, 욕망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만드는 섬광과 같은 순간을 뜻한다. … 이것은 소수자, 생명체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새로운 차원을 열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새로운 차원에 접속하는 순간 돌연변이처럼 변화된 주체성이 되도록 만들어 눈덩이 효과 같이 결집시킨다.”16

니체를 연상시키는 ‘우리는 모두 광인이고 혁명가이며 소수자이다’라는 그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발전된 결과이다.17 주체가 의식적으로 ‘나는 무엇이다’라고 규정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사람-사물-자연-기계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과정에서 그것과 자신에게 그어진 경계선을 넘어 횡단하며, 그래서 고정된 시간성이나 장소성을 벗어나 이동 및 탈주함으로써 아주 미세하게 배치를 바꾸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구성과 되기의 관점에서 앎은 더 이상 대상을 고정시키고 의미를 ‘-은 –이다’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성을 이뤄낼 줄 알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천행위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가타리의 생각을 빌려 오늘날 혁명은 그렇게 미시적 차원에서 배치를 바꾸면서 순간적으로 삶의 표면에 나타나며, 그것을 경화(재영토화나 재코드화)시키는 힘과의 매 순간의 대결 속에서 다시 분열을 일으키는 활동이라고 생각했다.18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떡갈나무 혁명과 네트워크 혁명은 유사하다. 작은 기계 부품의 기능 연관 속에서 기계체를 이룬 네트워크 속에서 하나의 기계 부품이 다른 작동 양상을 보일 때, 전체 시스템은 고장 나거나 전환될 수밖에 없다. 사진출처 : Conny Schneider

하지만 누군가는 이러한 횡단과 탈주가 경제적‧군사적‧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오늘날의 현실의 삶을 더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고, 그래서 지배적인 체제 안에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확실한 인식을 얻는 것’과 ‘안정된 삶을 누리는 것’은 그런 점에서 동전의 양면일지 모른다. 앎과 삶이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또한 앎의 독점과 삶의 독점(자본과 화폐의 독점, 토지와 건물에 대한 독점, 공간 이용에 대한 독점, 언론과 미디어를 이용한 이미지와 기호의 독점, 기술에 대한 접근권의 독점, 에너지 사용의 독점 등)이 서로 길항작용을 일으키면서 오늘날의 지배 체제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통합된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역설적이게도 그런 자신의 지배 체제를 스스로 계속해서 흔드는 조건에 놓여있다. 신승철은 기후위기를 비롯한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형태의 위기들이 자본의 독점체제가 더 많은 이익, 더 고도의 성장을 이뤄내기 위해 자연과 생명체들을 추출하고 고갈시키고 파괴했던 데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보면서 이러한 자본이 가장 최근에 도달한 형태를 ‘정동 자본주의’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동자본주의는 16-18세기 동안의 상업자본주의, 19세기-20세기 중반을 지배했던 산업자본주의, 20세기 중후반에서 21세기 초반을 지배했던 금융자본주의 및 인지자본주의를 거쳐 오늘날 자본이 도달한 가장 최근의 역사적 형태이자 체제이다. 신승철은 그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정동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플랫폼 등이 줄줄이 장악하고 있다. 유튜브, 구글, 넷플릭스, 페이스북 등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플랫폼들이 망라된다. 우리는 그 판 위에서 웃고 울고 즐기고 기뻐하고 향유한다. 그리고 플랫폼은 이러한 정동의 발휘 덕분에 더 이득을 가져갈 수 있고 구독자 수에 따라 수익이 분배된다. 여기서 플랫폼자본주의의 발전양상 중 하나로 나타난 것이 정동자본주의이다. 플랫폼에서 정동을 발휘하다보면 그 부수효과나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가는 것이 정동자본주의의 일상이기 때문이다.”19

플랫폼은 정동을 포획하면서 그 흐름을 촉진시킨다. “정동하고 정동되는 모든 일상은 플랫폼의 판 위에서 이루어지고 정동은 생명과 신체를 벗어나 이미지, 영상, 기호로 구성되고 생산되기에 이른다.” 플랫폼자본의 틀 아래에서 정동은 천연자원이나 소재와 같이 다뤄진다. 정동은 플랫폼이 갖고 있는 최종목표가 우리의 생명력과 활력 자체로부터 삶의 잉여가치를 권력과 자본의 잉여가치로 변환하려는 데 있다는 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러한 자본 형태 속에서 오늘날의 삶과 앎은 극단적인 불안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기존의 근대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실재=의미=표상=가치=진리’라는 인지적 등가 규칙에 기초했던 데 비해, 정동자본주의는 ‘인지부조화’를 유발하는 유행, 트렌드, 모방적 흉내내기 등으로 가득하다. 크고 넓은 집, 화려한 자동차를 배경으로 유행하는 패션‧몸짓‧관계를 자랑하듯 뽐내는 이들에게 실재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 의미가 과장되어 재현될수록 유용하기[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20

이러한 인지부조화의 극대화는 역설적으로 분열분석을 가장 효과적으로 만드는 새로운 판을 형성한다. 자본의 의미화=모델화=표상화의 체계가 이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그만큼 흐름과 되기, 생성과 구성의 표면 위에 자리잡고 그것에 기생하는 질서의 수립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신승철은 이러한 새로운 자본형태에 대한 더 구체적인 분열분석을 시도하려 했지만 죽음이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 형태의 출판 및 실천기획을 여러 사람들, 즉 전문가들이기보다는 마을과 공동체, 협동조합 등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이들, 학자들이기보다는 예술가들, 앎과 삶을 분리시키기를 거부하는 이들과 함께 만들고자 애썼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미완성의 기획들이 그를 잘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완벽한 이해란 있을 수 없고, 앎이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말과 삶과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 홀로 개인의 이성과 정신으로 수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책은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일 것이다. 그는 자본의 확장주의적이고 성장주의적인 질서에 맞서는 탈성장의 생태 혁명을 ‘떡갈나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고자 했다.

“떡갈나무 혁명은 생태계에서 한 톨의 도토리가 울창한 떡갈나무 숲으로 천이(遷移)를 일으키는 생명 창안의 혁명이다. 여기에는 다람쥐의 역할이 있다. 다람쥐가 도토리들을 주워서 먹이창고에 모아둘 때, 자연의 책략은 다람쥐의 망각을 통해 실현된다. 깜빡 잊어버린 먹이창고에서 떡갈나무 새순이 이듬해 봄에 움트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생명의 발아와 탄생은 판짜는 자와 나서는 자 모두의 혁명이다. 떡갈나무 혁명의 시대는 이 모든 주체성들의 미래 진행형의 과정을 통해서만 미래라는 시간의 판을 약속받을 수 있다. … 생태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50그루 나무가 따로 떨어진 가로수 100그루보다 더 항상성이 강할 것이라는 은유로도 표현된다. 나무가 서로 연결되어 숲을 이루면 그 안에서 벌레, 미생물, 새, 동물, 버섯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21

혁명은 인간존재의 고유한 실천행위가 아니며, 그보다는 생명체들의 서로 되기 과정, 흐름을 구성해내는 집단의 자기배치 과정, 전위에 선 누구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구도 후위에 두지 않고 함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운동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의식적‧의도적인 것보다 다람쥐의 망각처럼, 함께 활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 아주 일상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변의 숲을 풍성하게 만드는 씨앗의 활동을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 자신이 글쓰기 기계이면서도 저자로서의 이름보다는 출판을 함께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이름으로서 자신을 더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 책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을 출판한 뒤로 그의 저술 활동을 집단과 공동체와 네트워크의 이름으로만 수행하고자 했다.22

“떡갈나무 혁명과 네트워크 혁명은 유사하다. 작은 기계 부품의 기능 연관 속에서 기계체를 이룬 네트워크 속에서 하나의 기계 부품이 다른 작동 양상을 보일 때, 전체 시스템은 고장 나거나 전환될 수밖에 없다는 게 그것이다. 네트워크는 비스듬하게 기계와 기계를 연결하는 연결망이다. 기계 역시도 하나의 새로운 혁명의 비전을 갖고 있다”23

그는 이렇게 떡갈나무의 씨앗이 숲의 계기가 되고, 네트워크가 기계부품의 고장으로 재배열되는 사건적 순간을 ‘가장자리 효과’의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생태계 내에는 어떠한 외부도 없으며, 모든 것은 그 내부 속에서 서로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흐른다고 이해될 때, 이 경계선을 넘는 그 순간 마주치는 것이 가장자리이기 때문이다. “생태사상에는 ‘가장자리효과’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들과 산이 만나는 곳,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곳 등 가장자리가 가장 강렬도가 높아서 생명이 잉태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 주변인, 소수자, 마이너리티, 별종 등의 사람을 만나면,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인식방식, 삶에 대한 독특한 철학, 만남을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는 시간 등이 돌연 나타납니다.”24 ‘가장자리에서 사건이 발생한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가 광인이자 소수자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짝을 이뤄 우리가 기성의 삶의 궤도(자본주의적 질서와 정상인간, 가부장적 결혼제도와 정상가족, 국가의 재현체제와 소시민)를 이탈해 가장자리에 섰을 때, 즉 소수자로서 자신을 표현할 때 혁명적 사건이 발생한다는 발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모두(심지어 개체로서 이해될 때조차)가 혁명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그는 그 흐름에 자기 몸을 맡길 것이다.

“우리는 말할 것이며, 행동할 것이며,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어두운 미래를 밝힐 등대가 될 것이다. 그 빛은 어둠을 밝히는 목표만이 아니라, 무지갯빛 색채로 대지를 물들일 목표도 갖고 있다. 그것이 떡갈나무 혁명의 시작이다. 우리는 나서고, 행동하고, 말하고, 노래할 것이다. 서로에게 어깨를 기댄 채 친구와 함께 가족과 함께 말이다.”25

그런 점에서 나는 여러 곳에서 故 신승철 소장이 타자로 향하는 살과 피(즉 ‘횡단-신체’)를, 그리고 삶을 긍정하는 마음과 욕망을 기쁨과 사랑을 통해 세계 안으로 확산시켰던 만큼, 그의 육체적 몸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성체, 공생체, 관계체들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살아있다고 말하고자 했다. 그는 우리가 공생공락의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만들어낼 때, 무수하게 다양한 몸체들과 연결되고 가장자리에서 다시 되살아날 때, 우리가 그러한 실천을 행할 그 모든 순간 속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참고문헌

가타리, 펠릭스, 『분자혁명』, 윤수종 옮김, 푸른숲, 1998.

신승철, 「구성적 실천의 신지평을 위하여」, 『학회평론』, 통권 14호, 갈무리, 1997.

───, 「정동자본주의와 4차 산업혁명」, 2022(미간행 원고).

───, 「근본파와 현실파의 논쟁」, 2023(미간행 원고).

───, 「한국 근대를 넘어선 탈성장 전환의 잠재력과 도전」, 2023(미간행 원고).

신승철, 『눈 밖에 난 철학, 디지털로 본 철학』, 리좀, 2005.

───, 『펠릭스 가타리의 생태철학』, 그물코, 2011

───, 『눈물닦고 스피노자』, 동녘, 2012.

───,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 삼인, 2017.

───, 『구성주의와 자율성』, 알렙, 2017.

───,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사우, 2019.

───, 『모두의 혁명법』, 알렙, 2019.

───, 『생태계의 도표』, 신생, 2020.

───, 『묘한 철학』, 흐름출판, 2021.

───, 『정동의 재발견』, 모시는사람들, 2022.

───,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한살림, 2022.

신승철 외, 『포스트코로나시대, 플랫폼 자본주의와 배달노동자』, 북코리아, 2021

신승철 외, 『돌봄의 시간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기획, 모시는사람들, 2023.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천병희 옮김, 숲, 2019.

플라톤, 『파이돈』, 전헌상 옮김, 이제이북스, 2013.


  1. 그는 고양이를 돌보는 것을 넘어서 고양이의 눈으로, 고양이의 함께 글을 쓰기도 했다. 신승철, 『묘한 철학』, 흐름출판, 2021.

  2. 신승철 외, 『포스트코로나시대, 플랫폼 자본주의와 배달노동자』, 북코리아, 2021과 신승철 외, 『돌봄의 시간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기획, 모시는사람들, 2023.

  3. 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알렙, 2019, 25-26쪽.

  4. 이론(theory/theoria)이 극장(theater)과 마찬가지로 ‘보다’를 지시하는 희랍어 ‘테오레인(theōrein)’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이론의 재구성”을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이루길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이론’이 가진, 그 어원적 의미에 붙박혀 있는 “관음의 시선, 관망의 시선, 관조의 시선”을 해체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승철, 『눈 밖에 난 철학, 디지털로 본 철학』, 리좀, 2005를 보라.

  5. 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알렙, 2019, 26쪽.

  6. 같은 책, 157-158쪽.

  7. 신승철은 아주 오랜 시간 채식을 해왔는데, 그것은 의도적이거나 신념에 따른 것이기보다 신체적인 그의 반작용에 더 크게 기인했다. 무엇이 그의 신체를 아주 약간의 고깃덩이만 보아도 구토에 시달리게 했던 것일까? 그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로마의 건국설화 속에 그것을 해명할 이유가 있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로물루스(로마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의 뒤를 이은 누마라는 인물의 말을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대지가 생산하는 그토록 큰 풍요 한가운데에서도 비참하게 죽은 짐승의 고기를 잔인한 이빨로 씹어 퀴클롭스들의 관습을 되풀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그대들을 즐겁게 하지 못하며, 남을 죽이지 않고는 그대들은 게걸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는 배의 허기를 달랠 수 없단 말인가?” 오비디우스는 뒤이어 누마의 이러한 육식 비판이 놀랍게도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밝힌다. “혼은 짐승에서 사람의 몸으로, 우리 몸에서 짐승으로 옮겨다닐 뿐 결코 소멸하는 법이 없소. … 온 세상에 영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만물은 흐르고 모든 형상은 변화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오. 시간 자체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흘러가는 것이니, 강물과 다르지 않소. 강물도, 덧없는 시간도 멈춰 설 수 없기 때문이오.”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천병희 옮김, 숲, 2019, 648-653쪽. 오비디우스가 세계의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흐르고 있고, 죽음이 생명의 순환성 속에서(신승철은 이것을 ‘차이나는 반복의 순환적 리듬’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인간존재를 동물-되기의 운동으로 이끈다면 육식은 연인과 동료를 살해하는 식의 식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8. 신승철, 『눈물닦고 스피노자』, 동녘, 2012, 28-29쪽.

  9. 신승철,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사우, 2019, 36쪽.

  10. “‘사랑할수록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 우리에게 어울릴 것입니다. … 서로를 사랑할수록 주름이 미세해지고 차이가 미세해지는 느낌입니다.” 신승철,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 삼인, 2017, 152쪽.

  11. 신승철, 『구성주의와 자율성』, 알렙, 2017, 97쪽.

  12. 신승철, 「구성적 실천의 신지평을 위하여」, 『학회평론』, 통권 14호, 갈무리, 1997, 210-240쪽. 20세기 말에 작성된 이 글은 그가 자신을 생태주의자로 인식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 그의 생태주의를 역동적 존재론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구성적 실천의 신지평’을 반복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계속 차이나는 것으로 생산했기 때문이다. “구성주의는 어제, 오늘, 미래로 이어지는 일관성의 구도가 보여주는 ‘세계 재창조’와 ‘특이성 생산’의 미래진행형적 약속이다. 다시 말해 역사는 단 한 번의 구성 작용의 결과물─구성된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구성작용의 심급─구성하는 것─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구성적 실천의 신지평’이라는 미지의 곳을 향한 여행은 이제 막 개찰구를 벗어난 상황에 있다.” 신승철, 『구성주의와 자율성』, 알렙, 2017, 304-305쪽.

  13. 신승철, 『생태계의 도표』, 신생, 2020, 285-286쪽.

  14. 플라톤, 『파이돈』, 전헌상 옮김, 이제이북스, 2013, 71-72쪽.

  15. 신승철, 「근본파와 현실파의 논쟁」(미간행원고). 향후 신승철‧정유진‧최소연, 『근본파와 현실파 논쟁을 넘어서』, 알렙, 2024(근간)에 포함되어 출간될 예정.

  16. 신승철, 『펠릭스 가타리의 생태철학』, 그물코, 2011, 10-11쪽. 문맥에 맞게 인용 일부수정.

  17. 이에 대해서는 특히 신승철, 『펠릭스 가타리의 생태철학』, 그물코, 2011을 보라.

  18. “우리는 실제로 분석가도 활동가나 작가 또는 다른 어떤 사람과 마찬가지로 분열적 과정에 다소간 참여한다. … 혁명가는 분열적 과정의 양태에 따라 자신의 기획을 진전시켜야 한다. … 만약 미래의 사회적 격변이 정말로 욕망경제 수준에서 일군의 분자혁명과 절대적으로 분리할 수 없게 된다면, 분열분석은 혁명적 전망과 많은 공통점을 가질 것입니다.”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윤수종 옮김, 푸른숲, 1998, 43쪽.(문맥에 따라 일부 내용 수정)

  19. 신승철, 「정동자본주의와 4차 산업혁명」(2022, 미간행 원고)(문맥에 맞게 내용수정)

  20. 신승철, 「한국 근대를 넘어선 탈성장 전환의 잠재력과 도전」(미간행 원고). 이후 신승철 외, 『인류세와 한국근대』, 모시는사람들, 2024(근간)로 출간될 예정.

  21. 신승철,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한살림, 2022, 10-16쪽.(인용의 일부 내용과 배치를 수정했음)

  22. 그가 마지막으로 발간한 단독저작은 『정동의 재발견』(모시는사람들, 2022)이지만, 그는 이 책을 이미 그 전부터 작성해왔었고, 그조차도 “정동 특별팀”이라는 “배치와 관계망”의 도움으로 작성되었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정동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해 속에서 개체이자 주체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집단적 배치 속으로 자신을 흐르게 했다.

  23. 신승철, 같은 책, 261쪽.

  24. 신승철, 『저성장시대의 행복사회』, 삼인, 2017, 209-210쪽.

  25. 신승철,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263쪽.

* 이 글은 『문화과학』 2023년 겨울호 ‘이론의 재구성’에 실린 글을 본지에 재수록한 것이다.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댓글 1

  1. 고 신승철 박사님의 1주기 추모축제에 함께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글과 영상등을 보면서 : 떡깔나무 숲이 갈수록 우람하고 큰 숲으로 자라고 있구나 :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도 잘 보았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됬고, 기회 닿으면 지난번 처럼 또 온라인으로다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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