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HEART PROJECT 제15회 광주비엔날레 광주파빌리온 전시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We Dream of An Oak Revolution
근대적 혁명이 이성적 주체의 의지로 기획되어 권력이 집중된 곳을 장악하고자 했다면, 오늘날의 혁명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비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망들이 만들어내는 잠재성에서 발아하여 생명계와 관계망 전체의 변화를 도모하게 될 것입니다.
누님
저는 신승철의 누나입니다. 딱 1살 차이인지라, 나란히 학교를 다니고 성장하면서 나이 차이가 있는 다른 자매들보다는 좀 더 많이 부대끼고 나눴습니다.
예술작업, 공부, 소소한 인간 관계까지, 제 삶의 내밀한 부분들을 나누며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신승철이 갑작스레 떠나고 난 뒤, 버티고 있던 생명의 다리 하나를 잃은 듯하여 지난 1년간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상실감은 무슨 일도 할 수가 없는 무기력과 대인 기피증으로 이어졌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를 힘들게 한 것은 후회였습니다. 승철이에게 잘못한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고, 특히 어느 순간부터 확 불어났던 그의 저서들을 제대로 읽지 않았던 것이 뼈저리게 후회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지난 1년 동안 신승철의 책들과 그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공부를 한 것이 제가 유일하게 한 일이었습니다. 읽다보니 더 후회가 되더군요. 진작 읽었으면 새로 책을 낼 때마다, 읽으셨어요? 어때요? 묻곤 한 그의 기대에 찬 질문에 신나게 나눌 이야기들이 많았을 텐데, 그러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헛소리 빵빵해대는 나를 조곤조곤 가르치며 얼마나 피곤했을까, 이해되지 못해서 외롭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후회에 찬 책읽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늘 누나 누나, 작은 누나라고 부르던 승철이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누님’이라 부르며 원래부터 하던 존대를 더 깍듯이 했더랍니다. 처음 ‘누님’ 이라고 불렀을 때가 언제였지? 왜 갑자기 누님이라며 극존칭을 하기 시작했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왜 별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였었지? 곰곰이 며칠간 생각을 해보다가 그 의미를 알 듯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극진하고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듯합니다. 다른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에게 극진하고 지극하던 그 마음과 태도는 자신의 ‘앎’을 행동‘함’으로서 ‘삶’에서 구현하는, 펄펄 살아뛰는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는 순정한 모태였으며, 한 명의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는 구성적 방법이자 삶의 혁명이었습니다. 아마 신승철을 아는 다른 분들은 그러한 극진함을 그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어쩌면 일상으로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겠지요.
제 안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생각과 삶의 배치를 옮겨서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이끌던 승철이의 돌봄 기술은 극진하고도 부드럽고 섬세했지만, 반드시 스스로 깨닫도록 ‘공부’의 과정을 거치게 했습니다. 아이처럼 투덜대고 결과물을 재촉하는 전화를 피하고, 엉뚱하게 이해하고 뺀질대던 저를 생각해보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듯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그 돌봄을 통해서 자신이 더욱 성숙해 가는 과정이며 돌보는 자기 자신이 더 미세해지는 과정으로, 생명과 자연을 양육하고, 부추기고, 섬기고, 돌봄으로써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제작으로서의 기술인 ‘포이에시스(poiesis)이자 돌봄의 미학을 통해 삶을 재설계하는 과정” 이었다고 즐겁고 기쁘게 이야기합니다. (『묘한 철학』, 흐름출판)
저는 신승철의 철학에서 지극한 돌봄의 마음이 흘러넘치고 있음을 봅니다.
우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시각예술을 하는 제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것은 바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의 마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마음으로 만드는 세상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 예술작업의 의미를 철학자 신승철의 철학으로 확장시키며, 탈성장 전환사회를 향한 그의 지극한 마음을 담은 공공미술 프로젝트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에 여러분을 참여 작가로 초대하려 합니다. 이 작품은 지난 5월, 제가 제15회 광주비엔날레 광주파빌리온의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서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했습니다. 이번 비엔날레는 그 시작이 되는 첫번째 전시가 될 것입니다. 먼저 ‘ONE HEART’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ONE HEART PROJECT 하나의 마음 프로젝트
One Heart project는 각자가 하나이며 동시에 모두 연결된 하나임을 천과 바느질로 표현한 시민참여 공공미술프로젝트로, 지난 10여년간 여러가지 사회적 주제를 다루며 국내외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주제에 대한 참여자 각자의 ‘마음’을 표현한 조각보 작품들을 연결하여 다양한 형태의 설치작품으로 전시하며 그 과정과 향유를 통해 깊이 사유하고, 새로운 공통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작업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요 컨셉은 ‘연결’입니다. 작품을 만들면서 ‘자신과의 연결’을, 작품들을 서로 연결하면서 ‘타인과의 연결’을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의미있는 장소에 설치, 전시하여 사회적 주제를 함께 나눔으로써 ‘사회와의 연결’을 구현합니다.
또 하나의 컨셉은, 본인이 만든 마음 조각보작품도 ‘하나의 마음 조각보’이고, 전체가 이어진 큰 조각보 작품 또한 ‘하나의 마음 조각보’ 라는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입니다. 이러한 존재적 구도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적이자 미적 존재인 시민들은 참여작가로 초대되어, 하나이자 전체인 작품이자 세상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나-타인- 사회의 세 단계 연결 구도를 신승철의 철학을 통해서 확장시키겠습니다. 신승철의 마음 생태학을 살펴보겠습니다.
〈신승철의 마음생태학〉 1. 깊이의 마음: 들뢰즈, 잠재현실 논의와 폐쇄공포증 깊이의 마음으로 생태슬픔에 직면하고 극복한다는 것은 현실을 표상주의적으 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현실이 곧 현실이라는 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물, 생명, 기계, 자연을 뻔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와 잠재 성을 발견하는 시각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국지적 절대성으로서의 노마드, 다시 말해서 범위한정기술에 따라 ‘너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통해 국지성과 근접성을 스펙트럼(spectrum)화하여, 뻔하게 단정내리거나 정의내리는 것이 아니라 규정불가능한 그 깊이와 잠재력을 재발견하는 방법을 구사한다. 2. 넓이의 마음: 가타리, 도표적 가상과 다중인격장애 넓이의 마음은 사물유래 마음, 생명유래 마음, 기계유래 마음 등과 같이 다양한 혼재면에 따라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허무는 객체지향의 마음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 개체들의 반복을 연결하고 횡단하는 것이 바로 가타리의 도표적 가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도표적 가상성은 반복과 반복, 표상과 표상, 모델과 모델을 매끄럽게 이행하게 만드는 이음새이다. 그런 점에서 넓이의 마음은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던 구도와 판 위에서 벌어지는 생명, 자연, 기계, 사물 사이의 연결접속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넓이의 마음은 생태슬픔을 넘어서기 위해서 사물과 기계, 자연, 생명들과의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열리는 내재성의 구도에 주목하는 것이다. 3. 높이의 마음 : 빅터 플랭클의 로고테라피와 과대망상증 빅터 플랭클은 열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장 열악한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서 숭고하고 위대한 의미와 가치를 높이의 마음으로 세울 때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이야기구조를 상담치료에 적용한 로고테라피(=의미요법)이라는 개념을 발명하였다. 높이의 마음은 성공주의, 승리주의, 자기계발과 같은 성장주의 하에서 과대망상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윤리와 미학’과도 같은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요청하는 것이다. 이는 의미요법을 통해서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
먼저, “나 자신과 연결”은 깊이의 마음으로 확장됩니다. 국지적 절대성의 노마드를 통해 사물, 생명, 기계, 자연을 뻔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때, 작품의 주제를 생각하며 내 자신의 마음이 스펙트럼으로 다양하게 존재함을 발견하고, 마음의 배치가 변하게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타인과의 연결”은 서로 다른 생각, 이야기들 속에서도 일관되게 하나의 구도가 만들어지는 일관성을 통해 사물과 기계, 자연, 생명들과의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열리는 내재성의 구도를 구성합니다. 다양한 마음 조각보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되어지는 이 과정의 흐릿한 경계면에서 들뢰즈가 말하던 촉지적 감각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촉지적 감각에서 우리는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공통의 것, 커먼즈라 불리는 ‘우리’의 것을 미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새로운 상상과 이야기는 바로 이 촉지적인 공통의 감각을 통해 구현된 커먼즈에서 불현듯 솟아나는데, 저는 이것을 커먼즈 아트라고 개념 짓습니다.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우리’를 경험함은 타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하여 이 두번째 연결은 바로 ‘환대’의 진정한 의미인 ‘내 안의 타인 만나기’이기도 합니다. 관계와 공동체의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사회와의 연결”은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의 윤리와 미학을 삶의 의미로 찾으려는 높이의 마음으로 확장됩니다. 제시된 주제를 각자의 마음으로 표현한 조각보 작품들을 연결한 조각보가 설치 작품으로 구현되며 그 주제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이 과정은 ‘구성적 인간론’, 혹은 ‘구성적 사회론’으로 확장됩니다. ‘구성적 인간론’은 미리 주어진 인간이 아니라, 창안되어야 할 인간론으로, 가타리는 ‘주체성 생산’이라는 개념을 통해 관계 안에서 창발되는 공통의 주체성을 이야기합니다. 사회와의 연결은 작품을 통해 이러한 주체성으로 사회를 직접 만들어가는 우리의 구성적 존재성을 구현합니다.
이 모든 작업은 첫번째 과정인 “내 자신과의 연결’ 작업인 내 마음 속의 배치 변경을 통해서 드러내는 역동적인 마음의 표현입니다. 즉, 내 마음은 전체가 미리 존재한 다음에 부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으로 보이지만 전체가 그를 통해서 벌어지므로 부분이자 전체를 의미합니다. 나아가서 전체라고 할 수 있는 ‘모두’는 구성되고 있는 ‘나, 혹은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표현양상의 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두번째 컨셉인 ‘일중일체다중일’의 확장적 의미입니다.
이 과정을 작품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먼저 내 마음 속의 배치를 옮기는 ‘자신과의 연결’입니다.

두 번째로, 공통의 ‘우리’를 만들고 환대를 경험하는 ‘타인과의 연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성하는 ‘사회와의 연결’인 설치된 작품들과 영상입니다.

영상: https://youtu.be/To8yzcHrRqc
ONE HEART 〈공명〉 프로젝트 / 촬영: 강호진 / 사운드 : 신동석 〈Resonance〉
■ ONE HEART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PROJECT와 참여 제안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프로젝트는 기후변화가 위기를 넘어서 재난이 된 지금의 전지구적 상황에서 우리 모두의 존재적 조건들을 살피는 생태시리즈 작품 중의 하나로, 탈성장 전환사회의 모습을 함께 상상하여 작품으로 열어가기를 제안합니다. 성장주의 문명을 넘어선 탈성장 전환사회를 상상해봅시다.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소비와 물건에 의지하지 않고 삶의 지혜로 필요한 부분을 채우는 생활에 대한 이야기, 동물, 자연, 사물 등의 비인간을 돌보며 새롭게 관계맺는 이야기, 개인적인 성공과 부의 축적보다는 서로를 돌보며 함께 나누는 이야기, 사실은 사랑과 지혜가 만드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극진한 돌봄이 자아낸 사랑과 지혜의 관계망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함께 삶의 다양성과 즐거움을 만드는 “공생공락”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입니다.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된 이 프로젝트는 국내외의 다양한 단체, 시민들과 작업하며 여러 장소에서 전시될 예정입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제15회 광주비엔날레 광주파빌리온 전시(2024. 9. 7~12. 1)에 출품되어 선보입니다. 예술로 함께 탈성장 전환사회를 열어가는 이 프로젝트에 여러분을 참여작가로 초대합니다. |
■ 홍보영상
[기획서]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We Dream of An Oak Revolution
떡갈나무 혁명은 다람쥐가 깜박 잃어버린 도토리 한 알이 자연의 마법 속에서 어느 날 발아하여 울창한 숲을 이루는 생태계의 천이 혁명이다. 우리가 작은 도토리 한 알로 땅에 떨어질 때, 지구의 거대한 약속 앞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실존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생명평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 자신의 생활 양식이자 행동 양식일 것이다. 떡갈나무 혁명이 담고 있는 자연 책략의 비밀은 다름 아닌 혁명이 이제까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떡갈나무 혁명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 신승철,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중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가는데 무한한 경제성장이나 돈이나 논하고 있다니 염치도 없나요?” 2019년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참석한 그레타 툰베리의 일침입니다. 자연과 생명을 동력으로 삼고서 무한 진보를 외치던 성장주의는 전지구적 재난으로 덮쳐온 기후 위기 앞에서 그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식민지처럼 착취하던 생명과 자연에게 개발의 대가를 떠넘기면서 이윤을 남기던 외부 효과는 소멸의 국면에 직면했습니다. 개발로 얻은 이득이 생태 복원 비용보다 낮은 상황이 온 것이지요. 우리는 성장주의 문명을 깊이 들여다 봐야합니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경제적으로 계산되는 성장주의 문명의 공장에서 나온 상품들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감각을 자극하는 디자인, 낮은 가격으로 소비를 부추기는 수많은 상품들은 필요해서 직접 만들거나 나눠쓰고 물려주던 그 존재의 귀함을 잃었습니다. 상상력과 예술적 창조력으로 일구던 생활의 지혜를 쉽게 구매한 상품이 대체하면서 갈 곳을 잃은 우리의 창조 에너지는 점점 과시용 소비, 스트레스 해소용 과소비 같은 물신주의로 향하게 된 듯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결과는 이미 지구의 땅과 바다를 덮은 포화상태의 쓰레기로 나타났습니다.
자연생태계는 어떻습니까? 대량 생산을 위해 산업화된 육류, 어류, 채소, 과일 등은 그 고유의 생명력을 박탈당하고 그저 인간을 위한 식재료로 전락했습니다. 공장식 축산업과 거대 어업, 플랜테이션 농장, 무분별한 벌목이 교란하고 파괴한 생태계는 재난이 된 기후와 코로나 19의 팬데믹을 거치며 결국 그 파괴의 열매가 인류에게 돌아옴을 알려주었습니다.
생명과 자연에 대한 착취는 그대로 차별과 배제, 분리의 형식으로 인간 사회에도 적용되어, 나치즘과 파시즘, 신인종주의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나아가서 우리 각자에게도 적용되는데, 성공주의를 통해 경쟁을 부추기고, 개별화되어 스스로를 착취하고 관리하는 문화로 신체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에서는 우리 모두가 루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삶의 구도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장주의 문명이 만든 물신주의와 소비문화, 배제와 차별, 생명경시와 자연착취, 경쟁과 성공주의, 속도와 성과주의 등의 문화를 넘어서는 삶의 방식이며, 무엇보다도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성을 지향하는 사랑과 지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근대적 혁명이 이성적 주체의 의지로 기획되어 권력이 집중된 곳을 장악하고자 했다면, 오늘날의 혁명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비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망들이 만들어내는 잠재성에서 발아하여 생명계와 관계망 전체의 변화를 도모하게 될 것입니다. 철학자 신승철은 떡갈나무 혁명을 이야기합니다. 다람쥐가 먹이 창고에 넣어두고 깜박 잊어버린 한 톨의 도토리가 울창한 숲으로 천이를 일으키는 생명 창안의 혁명으로, 자연의 책략은 이 다람쥐의 망각으로 실현됩니다. 생명들이 더불어 공생하는 우리의 숲인 탈성장 전환사회는 작은 관계망을 만드는 사랑과 지혜의 실천 하나로 지금 당장 여기, 우리 모두의 삶에서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