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부터 시작하는 자기 창안

내가 “나”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대명사의 장소인 “나”를 언어로 인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차적인 충돌을 입증하면서 일차적 충돌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좋아하는 선생님의 미학 수업에서 만난 두 문장이 있다. “유일무이한 나를 창안한다.” 그리고 “나는 텅 빈 자리이다.” 서로 상충하는 문장 같아 보여서, 이 두 문장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말하는 나’와 ‘말 속의 나’라는 글감을 받았을 때 왠지 모르게 그 수업과, 수업에서 다뤘던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이 떠올랐다. 버틀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발화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가 말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야기는, 말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도 하고 있는 “나”로서 자신이 출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는 들려지고 있지만, 이야기를 하는, 아마도 그 이야기 안에서 당연히 일인칭 내레이터로 출현할 “나”는 불투명성의 지점을 구성하면서, 시퀀스를 차단하고, 이야기 도중에 이야기를 끊어버리거나, 서술될 수 없는 것의 폭발을 야기한다. 따라서 내가 들려주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 즉 나 자신인 “나”를 전경화하면서 그것을 나의 인생이라 불린 것의 적절한 시퀀스에 끼워 넣고 있는 이야기는 내가 도입되는 순간에 나 자신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1

발화되는 ‘말 속의 나’는 자신에 대한 서술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다. ‘말하는 나’가 대신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나’는 주어로 ‘말 속의 나’를 데리고 온다. 그렇게 나오는 문장은 언뜻 1인칭의 말하기 같지만 ‘말하는 나’와 ‘말 속의 나’ 사이에는 필연적인 틈이 존재한다.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서사가 있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각 이야기의 앞뒤 시간 순서를 맞추고 줄거리를 짠다. 이 과정에서 “말 속의 나”는 “말하는 나”에 의해 각색되고 변형된다.

내가 “나”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대명사의 장소인 “나”를 언어로 인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차적인 충돌을 입증하면서 일차적 충돌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2

‘말하는 나’와 ‘말 속의 나’ 사이에는 필연적인 틈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Jessica Da Rosa
‘말하는 나’와 ‘말 속의 나’ 사이에는 필연적인 틈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Jessica Da Rosa

위 문장을 읽고 “나는 텅 빈 자리이다”라는 문장을 해석할 수 있었다. “말하는 나”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때, 그 말 속의 나는 “말하는 나”와 동일한 ‘1인칭 나’ 가 아니라 ‘나’의 자리에 들어가 있는 ‘목적어 나’라는 뜻이 아닐까? 말 속의 ‘나’는 나의 일부인 것을 넘어서 왜곡되고 각색되어 텅 빈 자리가 되는 것이고, 나는 내 이야기를 결코 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 버틀러에 의하면 인간 존재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너와 나의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아니야’라는 타자가 있기에 ‘이건 나야’라는 주체도 있는 거라면, 역설적으로 타자화 없이 정체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탄생도 그렇다. 나는 나의 출현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타자의 부분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으로부터 인생은 시작된다. 너 없이는 나도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나는 나를 모른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은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과 설명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시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혹은 말걸기는 계속 시도되고 실패되어야 한다고 버틀러는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또 바로 그 이야기를 해야 하는 너무나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사 구조를 갖춘 완전한 설명을 시도할 때, 우리에게 그럴 권위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3

그렇다면 나는 나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유일무이한 나를 창안한다”.

유일무이함은 단수성과 같은 의미이다. 타자와 공유되지 않는 환원 불가능성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경험이더라도 1인칭으로 발화되는 순간 나만이 감각할 수 있는, 육화된 경험이 될 수 있다.

내가 나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내보일지, “말 속의 나”를 어떤 인물로 창조해 낼지 ‘텅 빈 자리’에 배치해 본다. 다시 써 본다. 이렇게도 써 보고, 저렇게도 써 보고…… 어떻게 써도 거짓말 같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실패로부터 시작되는 자기 창안.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던 두 문장이, 이렇게 만났다.


  1.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역, 『윤리적 폭력 비판』, 인간사랑, 2019, pp.117-118.

  2. 위의 책, p.123.

  3. 위의 책,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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