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에서 규칙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작은 대안학교 공동체에서 규칙을 모두 없애고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은 들뢰즈, 가타리가 제안한 리좀과 닮아 있었다. 그 과정을 리좀을 통해 톺아본다. 규칙이 없는 공동체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연결접속과 지도화의 과정은 왜 필요할까?

글의 시작에서

무턱대고 찾아온 호기심에 시작해버린 『천개의 고원』 읽기는 헛웃음이 연거푸 나오는 과정이었습니다. 글이 생소해서 이해되는 내용이 없었지요. 내용도 어렵지만, 나의 경험에 대입되지 않는 것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리좀’을 이야기합니다. “이 리좀을 글감으로 하는 것이 괜찮겠다.” 생각한 것은 그것이 책의 첫 장이라서 그런 것도 있고 왠지 모를 흥미가 느껴졌는데, 리좀으로 세상을 본다면 그것은 내가 여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해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가타리와 들뢰즈가 제안한 리좀은 이항 논리로 뻗어가며, 근본적인 통일체 혹은 변하지 않는 구조를 가정하는 나무-뿌리 형태가 아니라 n-1, 다양체에서 일자를 뺀 체계이다. 리좀은 이질적인 것들과도 끊임없이 수평적으로 관계 맺고 연결접속한다. ‘~는 ~다’라고 하는 고정값(의미화)이 없으며 규정, 크기, 차원들만을 가진 다양체가 연결접속을 늘려가며 변화를 겪는다. 무의식을 재단하고 사본을 만들어 입구와 출구의 일치를 이루어내는 이항논리, 구조주의 모델과 달리 리좀은 입구와 출구가 전혀 다르거나, 출구가 여러 개일 수도 있는 지도그리기를 행한다. 리좀은 시작과 끝도 가지지 않으며 언제나 중간을 가지고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천개의 고원』 中

글을 쓰기 위해 리좀 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지금으로부터 6년 전, 학생 때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그때의 장면들이 리좀의 유형과 닮아있음을 느꼈지요. 그 장면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는 일이 리좀을 사유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과거의 경험을 통해 리좀을 사유해보고자 한 흐름들을 적어봅니다. 사실 그보다는 나의 경험이 리좀과 어떻게 닮아있는지를 풀어쓰려고 한 것입니다.

이곳은 어디인가

공동체로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구성원들은 ‘공동체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데 많은 힘을 쓰고 살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Jason Goodman
공동체로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구성원들은 ‘공동체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데 많은 힘을 쓰고 살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Jason Goodman

충청북도 제천에는 6년제 비인가대안학교 제천간디학교가 있습니다. 필자는 이 학교에서 14세부터 19세까지 6년간, 백 명 정도의 학생과 스무 명 남짓의 교직원, 그리고 몸은 멀지만 운영을 함께 했던 학부모 분들과 함께 머물다 졸업하였습니다.

간디학교 삶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던 것이 있다면 바로 ‘공동체’입니다. 구성원들은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의사결정에 모두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공유하고 체득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공동체로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구성원들은 ‘공동체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데 많은 힘을 쓰고 살았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의 목요일, 학생과 교사가 모두 모여 공동체의 안건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날 회의에서 공동체 규칙을 모두 없애는, ‘규칙 백지화’ 안건이 통과되었지요. 작은 학교에서 공동체 규칙 백지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없어진 이후의 지난한 과정들을 다시 보니 그 모습이 리좀과 닮아있더군요.

공동체 규칙

우선 이 학교에서 공동체 규칙이 왜 존재하며,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를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아마 많은 공동체에선,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기 위해 약속이 필요할 것입니다. 구성원의 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둘이 공동체를 이룰 때에도 더군다나 혼자 있을 때에도 어떠한 약속이 필요하지요. 제천간디학교 구성원들은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와 연결 짓고 있는 주변부의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공동체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이 점에서 공동체 규칙을 연결 접속의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학교를 함께 다니는 타인과 수평적으로 연결되고 주변에 있는 동물, 흙과 물, 바람들과 끊임없이 연결 접속하는 과정에서 규칙의 필요성을 느끼고 규칙이 생겨났던 것이지요.

①일반식품(시중에서 파는 과자, 라면, 음료 등) 섭취 금지 규칙이 만들어진 큰 바탕은 좋은 먹거리와 유기적인 식생활의 가치였습니다. 그 너머에는 GMO로 식물 유전자를 상품성 생산에 맞게 개조하는 현실과 책 『침묵의 봄』에서 드러내고 있는 화학물질에 의한 환경파괴 문제도 자리하고 있었지요. 쓰레기 배출의 문제와 라면 냄새로 인한 타인의 불쾌함도 이 규칙이 만들어진 이유였습니다.

②전자기기 사용 금지. 핸드폰, 노트북 등의 전자기기를 학교에서 사용하지 말자는 규칙은 전자기기 사용으로 인한 공동체의 소통 부재가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업, 모임에서 집중하지 않는 문제나 탄탈럼을 얻기 위해 동물들의 터를 무분별하게 훼손하는 현실도 바탕에 있었습니다.

③시골에 자리한 학교 주변에는 맛있는 것, 오락거리들이 제한되어 있기에 40분 거리에 놓인 시내는 잠시라도 다녀오고 싶은 곳이었는데요. 학교 일과 진행과 안전상의 문제로 인한 무단 외출 금지 규칙까지, 이 3가지의 큰 규칙과 그 외의 자잘한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이 규칙을 ‘공동체 규칙’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교사 혹은 학생 일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규칙이 아니라, 개개인이 모인 공동체가 삶 속에서 실현해나갈 가치들을 담아 함께 정한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만든 이 규칙을 한순간에 모두 없애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단히 굳어져

공동체 규칙을 어긴 이들은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글을 쓰고, 일반식품의 폐해를 필사하거나, 창고를 정리하는 등의 노작을 해야 했지요. 아, 그 전에 사람들에게 규칙을 어겼음을 ‘고백’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하 고백이라고 하니 가슴 떨리기도 하고, 설레이기도 하지만 잘못을 고백하는 시간은 대체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고백이라고 하기엔, 모두 누군가에게 ‘고발’되어 그 자리에 서곤 했지요.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일주일에 3~5명, 많으면 10명도 넘어갔습니다. 적어도 격주에 한번 꼴로, 규칙을 어기는 일이 생겼던 것이지요.

앞서 공동체 규칙을 구성원이 함께, 직접 만들었다고 말했었는데요. 사실 이 말은 절반만 맞거나,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규칙은 학생들이 직접 만든 것이지만, 학생들은 졸업 후에 학교를 떠나고 동시에 새로운 사람들이 학교에서의 삶을 시작하죠. 간디학교 공동체의 모습은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며, 그 모습과 사람들 모두 계속해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규칙은 큰 변화 없이 새로운 구성원들을 맞이했고, 결국 학생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은 그들이 만든 규칙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규칙을 이루는 것들이 다시 재고되거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규칙은 고정되고 동결되어 갔습니다. 점차 규칙이 발 딛고 서있는 바닥보다는 ‘금지’하고 ‘제한’하는 규칙의 특성이 강조되면서 많은 학생들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공동체 규칙이 구성원들의 욕망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코드가 되어간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니까 참아야 하고, 간디학교라면 먹거리 철학을 지켜야 한다.’라는 기표도 생겨나고 있었지요. 여러 학생들은 몰래 라면을 먹거나, 외출을 하거나, 핸드폰을 하는 등 규칙을 어김으로써 도주했다가 적발되어 사과하고 책임수행을 통해 규칙의 존재 이유를 되새기고,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규칙을 어기는 쳇바퀴를 탔습니다.

그러한 반복된 과정 중에, 당시 학생회 집행부에서 공동체 규칙 백지화 안건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간 해본 적이 없던, 파격적인 담론이었고 많은 걱정과 우려 속에서도 백지화는 지지를 얻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규칙 백지화는 현재 있는 규칙을 모두 없애고, 우리에게 필요한 규칙을 다시 만들자는 것입니다. 더 넓게 바라보면, 고정되고 굳어갔던 공동체의 기표를 부수고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고민해보자는 것입니다.

규칙이 모두 없어진 걱정되고 불안한 이 상황은, 반대로 채워지지 않은 공간으로서 잠재성을 가진 시공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진출처 : Valentin Salja
규칙이 모두 없어진 걱정되고 불안한 이 상황은, 반대로 채워지지 않은 공간으로서 잠재성을 가진 시공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진출처 : Valentin Salja

그동안 규칙을 어기고 고백하고를 반복했던 것을 떠나, 규칙을 어긴 후 규칙의 필요성을 필사함으로써 본뜨는 것을 떠나, 입구와 출구의 일치가 아니라 전혀 다른 출구로 다양한 통로를 횡단하는! 백지화는 지도그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지화는 그 끝이 어떻게 나는지가 중요하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다양한 것들이 만들어지고 서로 만나고 부서지고 생성되는지가 중요합니다. 규칙이 모두 없어진 걱정되고 불안한 이 상황은, 반대로 채워지지 않은 공간으로서 잠재성을 가진 시공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백지화의 과정에서

백지화가 시작되고 규칙으로부터 느꼈던 억압이 없어진 이후에, 학생들이 직접 만드는 학교 소식지에는 학교의 철학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이 담긴 글이 실렸습니다. 그동안 학생들은 가치를 실현하는 장치로서 규칙이 있다고 느껴 이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기도 했었는데요. 규칙이 없어지며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다”, “가치를 강요해서는 안된다”라는 의견들이 펼쳐진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소식지에는 교육과정에 대한 불만과 개선의 목소리도 담기게 됩니다. 글에 실린 학생들의 이야기 중에서는 교육과정에 필수교과과정이 많지만, 의미를 잃어가고 있으니 필수 과정을 없애나가야 한다는 얘기가 많았지요. 규칙을 없앤 논의가 공동체의 철학과 나아가 교육에 대한 고민까지 연결된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을 규칙으로부터 시작하여 철학과 교육까지, 영토화된 것에서 도주하고 뻗어나가는 탈영토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움직임과 경험들이 서로 만나고 뻗어나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백지화 속에서 다양한 삶들과 경험들이 얘기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 필요했지요. 집행부는 사람들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온라인 게시판과 교내 게시판을 만들었습니다. 경험들이 모여 관계할 수 있는 관계망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옆방에서 라면 먹는데 냄새가 너무 난다”거나 “회의 시간 때 울리는 벨소리가 집중을 어렵게 한다”는 이야기들이 게시판에 올라오곤 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열렸던 간담회 시간에는 학생과 교사들이 모여 백지화 속에서의 경험과 생각들을 나누었습니다. 편리하고, 자유롭기도 하지만 소통이 많이 줄고 쓰레기의 양도 많아졌다는 아쉬움들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아쉬움이 새로운 모임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규칙이 없어지고 난 뒤, 학교에는 여러 가지 소모임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요가부터 당구, 바둑, 영화까지 학생들은 본인이 즐기던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소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소모임은 학교 일과가 끝난 저녁에, 대부분 핸드폰을 잡고 있을 시간에 진행되었습니다. 기숙사 생활교사가 당구 소모임을 만든 것도, 혼자 핸드폰을 하는 것만큼 함께 무엇을 하는 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함께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이처럼 백지화는 서로가 가진 욕구들이 얘기되며 오고 가는 동시에 곳곳에서 직접 실현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게시판에 글을 쓰는 건의자가 되거나 연설자가 되고, 누군가 소식지에 글을 싣는 글쓴이가 되고 누군가 몽상가가 되고 소모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는 호스트가 되었습니다. 규칙이 있는 상황에서 규칙을 준수하는지 지켜보던 역할과 어긴 사람이 책임수행을 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이 있었다면, 규칙이 없는 상황에서 공동체에 일어난 일들은 역할이 정해지지 않은 누군가가 불쑥 그 역할을 하며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것은 백지화가 시작되고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러, 규칙이 다시 만들어진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규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아지며 일부 학생들이 새로운 규칙의 안을 논의하는 팀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학생과 교사가 모인 자리에서 새로운 규칙이 다시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사실 1년 반이라는 기간은 꽤나 긴 시간이기는 하였으나 규칙이 없는 동안 공동체의 판이 뜨거워짐을 가끔 느끼곤 했습니다. 다양한 일들과 다양한 고민들이 일어난 시간이기도 하였지요. 이번에야말로 구성원들이 서로가 바라는 공동체의 모습과 나의 삶의 모습을 투영하여 규칙을 만들었지만, 졸업하고 나서 문득 생각나 들어가 본 온라인 게시판에서 익숙한 말을 발견했습니다. “도대체 회의에서 사과 왜 하나요. 맨날 나와서 같은 얘기만 하면서 왜 하나요. 맨날 사과하면서 왜 또 같은 짓을 반복하나요.”라는 글이었지요. 하하. 입구와 불일치한 출구를 찾아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앞에서 같은 입구를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글의 뒷편에서

저는 지금도 ‘공동체’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히 열리지는 않습니다. “공동체가 자유를 빼앗는다”라는 말을 들어보았나요? 이 말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스스로도 많이 하고 주변 학생들에게도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입니다. 공동체가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를 가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공동체를 이뤄가고자 하는 마음이겠지요. 그것은 공동체 내부의 관계망이기도 하고, 우리가 복잡하게 연결지어 살아가는 주변과의 관계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가 배경, 구성원, 주변의 것의 움직임에 따라 모습을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점이 되어갈 때, 고정되고 단단해질 때면, ‘그리고..그리고..그리고’처럼 경우의 수를 넓혀 잠재성을 가진 판을 만드는 것이 좋은 공동체에 대한 고민과 논의를 만들어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리좀을 보며 이 경험이 문득 떠올랐다는 심상에 기대어 뭐든 나오겠지 하며 쓰게 되었습니다. 리좀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여 가지는 느낌을 가지고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재형

안녕하세요. 이재형입니다. 된장찌개 참 좋아합니다. 그러면 밥은 두 그릇을 먹습니다.

댓글 1

  1. 잘읽었습니다. 천개의고원이 너무 어려워 눈으로만읽어가는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글입니다. 공동체의 규칙을 백지화하고 공동체가 새로운 규칙을 생성하는 경험은 제겐 신선한 충격입니다. 공동체의 새로운 판을 깔아가는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는과정이 아닌가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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