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장] ① 눈과 함께 시작된 이장 생활

마을 이장이 된 첫 번째 달, 한라산 중산간 선흘2리에는 일주일이 넘도록 폭설이 내려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마냥 아름답게 느껴지는 눈은 이제 이장이 되고 보니 처리해야 할 업무가 되었다.

2007년 1월 27일, 서울에 눈이 많이 내렸다. 한강 변 올림픽대로에서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태운 승용차가 멈춰서는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눈이 오면 잘 산다’라는 어르신들의 위로 같은 덕담을 들으며 우리는 어찌어찌 결혼식을 치러냈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하기 전에 몇 날 며칠을 고민하는 나와, 먼저 일을 저지르고 후회 따윈 하지 않는 한 사람은, 이후 10년이 넘도록 한집에서 서로 적응하며 살아오고 있다.

폭설로 눈이 쌓인 마을 길을 트랙터가 청소하고 있다. ⓒ이상영
폭설로 눈이 쌓인 마을 길을 트랙터가 청소하고 있다. ⓒ이상영

선흘2리 이장으로 당선된 뒤 우여곡절 끝에 조천읍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지난 2020년의 마지막 날에도 폭설이 내렸다. 폭설 때문에 임명장을 받으러 갈 수 없다고 말했더니, 주민자치계 담당 공무원은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급하게 마을 어르신의 사륜구동 자동차를 얻어타고 내려가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영화 《겨울왕국》의 울라프와 엘사가 스키를 타는 우리 마을과는 달리, 아랫마을 읍내에는 눈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듯 이장 생활은 눈과 함께 시작됐다. 새해 1월 7일 밤부터 무려 6일간 폭설이 내렸고, 한라산 중턱 350고지에 위치한 우리 마을은 지난 연말에 이어 또다시 고립되었다.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폭설이란다. 조천읍에서 제설 작업을 했지만, 1대뿐인 제설 차량으로는 버스가 다니는 큰길을 치우기만도 역부족이었다. 마을 주민 2분이 트랙터를 이용해 휴일에도 계속 눈을 치웠지만, 뒤돌아서면 또다시 눈이 쌓였다. 이곳저곳에서 눈을 치워달라는 민원전화가 걸려왔고,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길을 걸으며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우왕좌왕 정신없는 이장 생활의 시작이었다.

폭설이 내리는 동안 집집마다 개성 있는 눈사람들이 만들어졌다. ⓒ이상영
폭설이 내리는 동안 집집마다 개성 있는 눈사람들이 만들어졌다. ⓒ이상영

그런 가운데서도 마을 곳곳에는 철없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아이들은 우진제비오름과 녹차 밭 가는 언덕길을 금세 초특급 눈썰매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집집마다 개성 넘치는 눈사람이 만들어졌다. 일주일간 임대 가능한 이글루까지 분양(?)되었다. 어른들의 SNS 놀이터에는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처럼 눈밭에 드러누워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쳐도 이상하지 않을 아름다운 오름 풍경과 ‘슬기로운 고립생활’ 체험수기들이 속속 올라왔다.

누군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나를 말해준다’라고 했던가? 이장이 아니었으면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 눈 풍경과 일주일간의 특별한 고립 생활은 이제 내겐 해결해야 할 민원으로 다가왔다. 폭설, 제설차, 트랙터, 염화칼슘과 이글루, 눈사람, 눈썰매장이라는 대조적인 풍경들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지난 2년 동안 엉망이 되어버린 마을 행정은 눈덩이보다 더 크게 마음을 짓눌렀다.

무거운 마음처럼 마을 곳곳에 두껍게 쌓였던 눈은 이틀 동안의 쨍한 햇빛에 녹아 마법처럼 사라졌다. 따뜻한 햇볕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눈이 내리는 우연이 있었다. ‘눈이 오면 잘 산다’라고 위로해 주신 어르신들의 덕담이, 우리 마을에도 마술처럼 실현되기를! 또 나 역시 어찌어찌 새로운 역할을 잘 적응할 수 있기를! 이렇게 어쩌다, 이장이 돼 보고 겪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이 글은 『제주투데이』 2021년 1월 27일 자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이상영

20년 가까이 중고등학교에서 지리(사회)를 가르치다, 2018년 한라산 중산간 선흘2리로 이주한 초보 제주인. 2019년 초 학부모들과 함께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으로 선출된 후, 2021년 어쩌다 이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음.

댓글 1

  1. 오, 첫눈을 여기서 보네요. 눈을 못본지 너무 오래돼서 몸이 아플거 같았거든요. 여튼…흥미진진한 글이라 기대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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