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새로운 선택 –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을 읽고

코로나19는 인류가 처한 생태적 위기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이전 시대의 위기와 달리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 모든 생명이 존립에 관한 대규모 시스템의 위기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되돌아 봐야하는 위기의 현실에 대해 책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이 말하는 비비르 비엔, 탈성장, 커먼즈, 생태여성주의 등의 대안에 귀기울여 보자.

인류는 역사상 전례 없는 ‘COVID19’라는 전 지구적인 팬데믹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는 21세기에 발생한 전 세계적 바이러스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 사태가 지구 환경적 위기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지구 온도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한 박쥐 서식지의 북상을 코로나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적 위기는 인류의 경제적, 사회적, 문명적 위기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파블로 솔론 외,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 (착한책가게, 2018)
파블로 솔론 외,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 (착한책가게, 2018)

문명이 생겨난 이래 인류는 다양한 위기를 겪어왔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그 이전 시대의 주기적인 위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 생명을 포함한 수백만 종의 생명이 존속할 수 있었던 환경적 조건을 뿌리째 흔드는 대규모의 시스템적 위기이다. 즉, 이전 시대의 주기적 위기는 한순간 침체 후 기록적 성장을 보이며 회복되었지만, 지금의 위기는 독자적 동력을 가지고 위기를 가속화시키며, 환경적 조건을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게 하는 대규모의 시스템적 위기인 것이다.

팬데믹 쇼크는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이다. 인류는 이제 코로나 이전 시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만은 확실한 것 같다. 생태적 전환, 지속가능한 문명으로의 전환, 새로운 행복의 척도, 이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인류는 새로운 선택해야 한다. 아니, 선택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극단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폐기하는 선택을 해야 다음 세기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해법은 무엇일까?

1. 비비르 비엔

남미 안데스 원주민으로부터 비롯된 비비르 비엔은 아직 확실하게 정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전체(the whole), 즉 파차(Pacha)의 비전을 가지는 것으로 다극성의 공존, 균형, 다양성속에서의 상호보완성 그리고 탈식민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안데스인들에게 파차(Pacha)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결합된, 끊임없이 운동하는 전체이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우주이다. 전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이 공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역동적으로 공존하고 상호작용한다. 파차(Pacha)의 관념에서 과거는 항상 현존하고 미래에 의해 재탄생되는 것이다. 비비르 비엔에서 시간과 공간은 단선적이지 않고 순환적이므로 성장과 진보라는 단선적인 개념은 비비르 비엔의 전망과는 양립할 수 없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발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파차(Pacha)는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사람과 자연의 분리는 불가능하고, 우리는 모두 자연의 일부이다. 안데스인들에 따르면 인간은 소유자나 생산자가 아니라 ‘돌보는 자’, ‘경작자’, ‘촉진자’이다. 인간은 어떤 것도 생산하거나 창조하는 자가 아니고, 어머니자연이 주는 것을 경작하고 기를 뿐이다. 따라서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연을 약탈하고 상품화하였으며, 인간은 자연에 대한 우월감을 바탕으로 ‘정복자’를 자처하였으나, 그 결과는 참혹하다. 안데스의 원주민들의 지혜로부터 배울 때이다.

2. 탈성장

언제까지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무한한 성장은 가능한 것인가? 해답은 뻔하다. 불가능하다. 경제 성장의 패러다임은 지난 30년간 ‘선진’ 산업 국가들의 주도 하에 남반구 국가에 대한 자원 약탈, 값싼 화석 연료의 채굴, 저발전 국가에 대한 살인적 노동 착취 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세계적인 대규모의 성장은 불가능한 환상에 가깝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 이데올로기는 ‘저발전’ 또는 ‘개발도상’ 국가들이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며 ‘발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버텨내도록 했다. 지금 급격한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남반구를 포함한 후발 주자들은 새로운 시장의 필요와 자연자원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성장의 샘은 선진국보다 빨리 말라버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즉, 국가 간 약탈과 착취를 바탕으로 한 성장의 지속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며, 기술 자본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유한한 자연자원은 그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성장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기술적, 경제적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녹색 기술을 활용하여 자원에 대한 부담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녹색 경제, 녹색 성장’과 같은 발전 모델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성장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였고 그 시도는 실패하였다. 자원의 생산과 소비에서 부분적으로는 효율성이 증가했지만, 전 지구적 생산량의 증가로 효율성과 생산성의 향상은 상쇄되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무한 성장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탈성장이 답인 것이다.

탈성장은 단순히 경제적 개념이 아니다. 탈성장은 하향적 경기 변동 또는 침체로의 전환이 아니라 에너지와 자원 이용에 있어서 자발적이고 계획적으로 축소를 지향하고 우리의 필요와 선택을 ‘검약한 풍요’로 재정의할 수 있게 하는 정치적 선택이다. 지난 세기동안 성장이 경제에만 관련된 개념이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본주의에서 ‘성장’이라는 규범은 인간을 정치적 차원을 제거한 노동자와 소비자라는 사람들로 환원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부의 분배를 둘러싼 투쟁으로 환원시켰으며, 부의 성격과 그것이 얻어지는 과정과는 무관한 문제처럼 만들었다. 따라서, 탈성장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서의 개념이 아닌 인간 활동의 재배치, 부의 재분배, 노동의 의미 복원, 인간중심주의와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까지 포함한 사회 전체와 관련된 개념이다. 탈성장은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사고방식, 무한정한 물질적 부의 생산과 소비를 위해 인간의 자율성을 희생시키고 노동을 착취하며 자연을 상품화 하는 문명의 야만성을 비판하며 나아갈 것이다.

3. 커먼즈

탈성장을 추구하면서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풍요로움(경제적 풍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을 누릴 수 있는 실천적 방식은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는 ‘커먼즈(commons)’라는 공동의 운영 방식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커먼즈란 물질 또는 비물질적인 것을 인간 집단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특별한 사회관계 양식으로 인류공동체에 꼭 필요한 물질과 자연, 디지털, 지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이해당사자인 공동체가 직접 운영하고 자원에 대한 돌봄(caring)을 실천함으로써 공동체의 풍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동재, 자연재(또는 생명재)와 같은 인류에게 꼭 필요하지만 한정적인 자원을 자본의 약탈적이거나 효율적 방식이 아닌 ‘커먼즈’라는 공동의 관리 영역 아래에 두어야 인간이 탈성장의 방식으로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커먼즈들의 등장이 활발할수록 1,2세대의 기본권인 시민권, 정치권, 경제권, 사회권을 넘어선 3,4세대 기본권인 지식정보접근권, 자연커먼즈에 대한 기본권 등으로 확장될 수 있었으며, 이렇듯 커먼즈와 기본권이 연계될수록 집단적 소유권에 대한 사고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커먼즈를 수호하고 확장함으로써 직접민주주의와 실질적인 사회적 소유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도 더 커지고, 커먼즈는 잘 돌보고 직접 참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천적 사회주의 건설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커먼즈의 영역과 커머너들의 유형도 매우 다양하지만, 그 핵심은 커먼즈의 돌봄과 수호에 있다. 즉 다국적 기업이나 민간 기업 등과 같은 자본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공동체의 풍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관리양식과 운영 방식에 관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4. 생태여성주의

근대 유럽은 과학혁명과 신항로 개척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이루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내고 자본주의의 꽃을 피워냈다. 과학혁명, 신항로 개척,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 등과 같은 용어들은 세계사책 곳곳에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성장하면서 ‘나도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철없는 생각도 한 번쯤 해보았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이 단어들의 이면에 있는 폭력적인 야만성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과학 혁명은 자연을 ‘어머니의 땅’에서 ‘기계와 원자재’로 바꾸었고, 자연이 인간과 상호 의존하는 관계임을 부정하였다. 억압적인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토대로 자본은 무분별하게 자연자원을 수탈하고, 문명 전파라는 미명 아래 저개발 국가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해왔다. 역설적이게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문명’의 다른 이름은 ‘야만적 폭력’인 것이다.

생태여성주의는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공정한 관계 정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이면에 있는 실체를 찾는 것에 주력한다. 여성과 남성의 대립을 바탕으로 문제의 해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문명과 야만 등과 같은 이분법적이고 억압적인 관계로 만드는 경제적, 철학적, 관계적 구조의 토대를 공격함으로써 현 체제를 종식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생태여성주의는 사회와 신체, 자연에 해를 가하는 무분별한 자연 개발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현재의 폭력적 지배 체제를 해석하고, 인간과 자연이 상호 의존하는 관계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사회가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생태여성주의는 비판이론이자 철학이며 세상에 대한 해석이다.

따라서, 생태여성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독단을 받아들일 수 없고, 돌봄과 연대의 노동이 사회를 키우는 초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탈성장’을 인류의 미래에 피할 수 없는 지향점으로 설정하였다. 삶의 물질적 토대와 영속성을 중시하는 것, 인류의 생존과 생태계의 균형에 필요한 활동을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다. 삶과 문화, 그리고 가치 체계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 이들의 목표인 것이다.

5. 어머니지구의 권리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지구의 자원을 이기적으로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환경 파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사진 출처 : Gravityx9
https://www.flickr.com/photos/gx9/274744188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지구의 자원을 이기적으로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환경 파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사진 출처 : Gravityx9

남아메리카 안데스 원주민들은 인간은 동물, 식물 또는 대지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며, 지구공동체를 형성하는 다른 비인간 존재들과 함께 ‘더불어 존재(inter-be)’한다고 생각하였다. 안데스 원주민의 시각에서 언덕, 숲, 바위, 강, 공기 대양 등 모든 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모두는 파차마마(Pachamama) 또는 어머니지구라는 큰 살아있는 유기체의 일부이다. 남미 원주민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어머니지구의 권리는 현재의 지배적인 인간중심 패러다임을 버리고, 지구공동체인 인간과 자연이 동등한 대접과 존중을 받아야만 지구공동체가 번성할 수 있는 대안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구과학자 공동체에 따르면 지구 시스템의 한 구성 요소에 불과한 인간 사회가 규모와 빈도에 있어서 전례 없는 행성적 규모의 변화를 일으켜서 지구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바꿔놓았다고 한다. 오직 인간의 활동으로만 인간의 생명 유지와 자연의 생존에 적대적인 조건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인간중심 패러다임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주의, 채굴주의의 관점으로 인간은 자연을 파헤치고, 가공하고, 상품화하고 통제하는 야만적 착취 행위를 지난 세기 동안 자행한 것이다. 그 결과는 인간 사회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우리는 이제 어머니지구 앞에서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지구의 자원을 이기적으로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환경 파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환경 보호의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어머니지구의 구성물인 모든 종들을 인간과 동등한 주체로 인식하고 그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환경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자연에 시장가격을 부여하는 행위나 자연에 대한 투기적 금융화를 멈추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머니지구의 권리 이행을 가로막는 것이 확실한 재산권의 행사를 통제하는 논의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6. 탈세계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자본, 생산, 시장의 통합을 통해 이윤 증대의 목표를 삶의 전 영역으로 확대해나갔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위기를 만성화시키고, 전례 없는 지구환경 시스템의 파괴를 일삼았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시민은 존재하지 않으며, 소비 능력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는 기형적인 소비자들만 있을 뿐이다. 제한 없는 소비와 생산주의에 기반 한 무자비한 세계화는 민주주의를 퇴행시킬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혐오와 인종주의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와 자본의 무분별한 확장에 대한 저항 시도들은 결과적으로 패배했으며, 살아남은 ‘진보’정부들은 실용의 노선을 선택하거나, 생존의 방편으로 채굴주의를 강화하는 과정으로 나아갔다.

탈세계화는 지구적 경제로부터 철수하거나 고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은행과 다국적기업들이 아닌, 지역 경제와 국민 경제가 약화되지 않고 강화될 수 있도록 세계 경제와 정치 체제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탈세계화는 민중, 시민, 국민, 지역공동체와 생태계를 중심에 두고 세계화가 확장되는 토대를 해체하고, 저항하며 자본의 포획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나가는 것이다.

7. 상호보완성

상호보완성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전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비르 비엔, 탈성장, 커먼즈, 생태여성주의, 어머니지구의 권리, 탈세계화가 상호보완성을 추구한다면, 전 지구적 시스템 위기의 대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작용하여 총체적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시스템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요소들의 상호관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대처할 수 없다. 자본의 논리, 생산주의와 채굴주의의 논리, 권력 집중의 논리, 가부장제와 인간중심의 논리가 정치뿐만 아니라 개인적 관계, 제도, 윤리, 미래에 대한 전망 등 모든 것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며 서로 조합하여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비비르 비엔은 성장에 대한 핵심 대안으로 ‘역동적 균형상태dynomic equilibrium’를 추구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경제적 진보와는 다른 문명의 새로운 지평으로서 인간들 간에, 인간과 자연 간에 시스템의 균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성장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근대성을 해체하고 타인과 자연을 탈취하지 않는, 전체를 이루는 모든 부분들의 적절한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상태는 부와 권력을 재분배하는 몰수와 사회화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또한 이는 시장과 국가가 아닌 다른 행위자, 즉 커먼즈의 커머너들을 그 중심에 두어야만 지속적인 재분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커머너들은 자연의 순환을 위해 생산수단을 전환하고, 채굴주의, 생산주의, 지식의 사유화, 생물다양성의 상품화, 대량살상무기의 개발 등을 막고 균형 상태를 찾는 데 기여하는 중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 변혁의 열쇠는 커머너들이 쥐고 있다.

나무늘보264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어린 시절 친한 사람들이 ‘늘팽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늘보와 달팽이의 줄임말인 듯. 어릴 때 1년에 10번 정도 제사가 있었는데, 큰집에 가면 큰집 서재에 콕 박혀서 책 보는 것을 좋아해서 사촌 오빠가 놀리려고 지어준 별명입니다. 264는 제가 시인 이육사를 좋아해서 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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