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문명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것인가? – 연극의 서사구조를 중심으로 ②

마음의 위기는 높이, 깊이, 넓이에서 유래된 마음들이 어떻게 잘 배열, 정돈, 배치, 정렬될 수 있도록 만드는 정동(affect)과 돌봄의 생명력과 활력에 따라 생태계를 조성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모델이라는 거대한 마음을 세워두고 이에 따라 효율성을 획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모델이라는 다양한 마음을 연결하는 이음새로서의 정동을 통해 탄력성을 확보하는 것이 마음의 위기에 대한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와 마음의 위기(마음생태), 상상력의 위기(자연생태), 인문학의 위기(사회생태), 그리고 연극예술의 배치

1) 마음생태 : 기후위기는 마음의 위기다

마음의 생태학에는 잡다(雜多), 다양, 여럿이 웅성거리면서 잡음, 소음, 잉여를 형성하지만, 이는 곧 조화와 균형의 일관성을 갖게 된다. 만약 “‘꼼짝 안 할 때’와 ‘움직일 때’ 중에서 언제 마음이 더 많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과를 마치고 어젯밤 엎치락뒤치락 거렸던 잠자리를 생각할 것이다. 단잠을 청하지 못했던 어젯밤의 잡념과 예민함, 후회 등을 생각하며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 더 많았노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은 바로 감정과 정서이다. 이는 어떤 표상이 촉발하는 자기원인과 일관성도 없는 일시적이고 휘발적인 마음들이다.

불교에서의 소승(小乘)의 수련법인 명상은 이러한 잡념들을 텅 비우고 번뇌를 던져버리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진공상태로서의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의 방법이지만, 여전히 ‘꼼짝 안 할 때의 생각’의 프레임(frame)에 머물러 있다.

반면 ‘움직일 때의 마음’인 정동은 보살피고 아끼고 행동하고 이행하고 움직일 때의 마음이다. 삶의 내재성 즉 배치가 분명히 있는 마음들이다. 불교에서의 대승(大乘)의 돌봄과 살림으로서의 보살행(菩薩行)이나 보시(報施) 개념은 정동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인 서원(誓願)의 방법이다. 불교에서의 서원은 정동의 미시정치를 통해서 사회에 뛰어드는 대승불교의 전통을 의미한다. 반면 해탈과 열반은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소승불교의 전통이다. 이렇듯 ‘꼼짝 안 할 때의 마음’과 ‘움직일 때의 마음’은 불교뿐 아니라, 정동과 감정을 가르는 커다란 화두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 상황에서의 마음이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의 위기인지, 움직일 때의 마음의 위기인지를 살펴본다면,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은 위기에 사로잡혀 쩔쩔매지만, 움직일 때의 마음은 더욱 활력과 생명력을 발휘해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기후위기 상황에서의 움직일 때의 마음은 사실상 세 가지 마음의 좌표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한다. 하나는 넓이의 마음으로 사물, 자연, 생명, 기계와 혼종적인 주체성 양상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양상이다. 다시 말해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말처럼 인간은 대지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대지 밑에서 꾸물거리는 존재들과 함께 어우러져야 상황에 서 있다. 두 번째는 높이의 마음으로 의미와 가치에 따라 생명력을 발휘하는 결사와 결단의 마음이다. 빅터 플랭클(Viktor Emil Frankl)이 얘기했던 로고테라피에서처럼 우리는 두 번 태어난 것처럼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하지 않고서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어렵다. 세 번째는 깊이의 마음으로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밑바닥 감정으로 침윤하다가 되튀어오르는 놀라운 주체성 생산의 순간을 얘기해 볼 수 있다. 이는 실존의 전락성에 대한 부분으로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의 분자혁명을 규명할 수 있게 한다. 동시에 불교에서 얘기하는 아뢰야식의 대긍정의 밑바닥 마음의 깊이도 타진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마음은 이러한 세 가지 좌표에 따라 경계가 모호한 혼재면을 형성하지만, 이내 생태계를 조성하여 생명평화의 일관성으로 향할 수 있다.

이제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으로서의 관객성이나 구경꾼성을 추방하고, 모든 소재와 재료를 가지고 득실거림, 웅성거림, 아우성의 난장을 만들어보는 것도 가능하다. 사진출처 : REINDHARTZ RDHZ
이제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으로서의 관객성이나 구경꾼성을 추방하고, 모든 소재와 재료를 가지고 득실거림, 웅성거림, 아우성의 난장을 만들어보는 것도 가능하다.
사진출처 : REINDHARTZ RDHZ

결국 마음의 위기는 높이, 깊이, 넓이에서 유래된 마음들이 잘 배열, 정돈, 배치, 정렬될 수 있도록 만드는 정동(affect)과 돌봄의 생명력과 활력에 따라 어떻게 생태계를 조성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모델이라는 거대한 마음을 세워두고 이에 따라 효율성을 획득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 모델이라는 다양한 마음을 연결하는 이음새로서의 정동을 통해 탄력성을 확보하는 것이 마음의 위기에 대한 중요한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연극의 과정에서는 무대와 관객, 주인공과 보조배역이나 구경꾼이라는 이분법을 통해서 움직일 때의 마음과 꼼짝 안 할 때의 마음 간의 일차원적인 경로만을 제공했다. 그러나 문명의 위기의 상황은 이러한 근대적인 설정을 넘어서 n차원의 지평을 열도록 하고 있다. 이제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으로서의 관객성이나 구경꾼성을 추방하고, 모든 소재와 재료를 가지고 득실거림, 웅성거림, 아우성의 난장을 만들어보는 것도 가능하다. n개의 차원은 모두가 주인공인 상황이 될 수도 있고, 모두가 움직일 때의 마음을 통해서 서로를 연결하여 브리꼴라쥬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한 발짝 나아가본다면 감각을 열어 광대역의 마음을 형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움직일 때의 마음으로 향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감각을 여는 작용에 대한 워크샵의 과정이 연극성일 수도 있다.

감각보다 0.3초 느린 지각은 사물이나 상황을 뻔하게 보게 만드는 원천이다. 우리가 이러한 지각의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감각의 열림으로 향했을 때 우리는 정동이라는 활력과 강렬도에 반응하는 촉수를 가진 미생물이나 투명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위기를 극복하고 정동의 미학화로서의 돌봄, 살림, 보살핌, 섬김, 모심으로 향하게 되면서 연극예술의 한 판을 입구로서의 준비동작에서부터 출구로서의 마무리 청소까지를 미학과 예술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 자연생태 : 기후위기는 상상력의 위기다

기후위기 상황은 선택의 경우의 수를 상실하게 만든다. 궁색하고 주저하고 난처하다. 이는 상상력을 고갈시키는 원천이 되기 때문에 상상력의 위기로도 표상된다. 이러한 상상력의 빈곤은 미래진행형적 사유와 가능성의 선택지 등을 상실하게 한다.

미래는 상상력이 아니라, 김홍중 교수 얘기처럼 파멸 이후의 상상력인 ‘파상력’에 머무르게 된다. 일단 파멸적 상황이라 하더라도 미래로 향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은 소재로서의 생태적 한계 아래에서 얼어붙는다. 이를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논리적 장부기재’라고 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네가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군가 말했던 것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개념, 상징, 표상 등은 유한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야기구조의 설립과정에서의 소재는 새로운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장부기재와 같이 생태적 한계를 명확히 한다면 연극적인 상상력 역시도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고 그칠 소지도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연극예술은 이러한 요청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생태계는 생태적 다양성의 다이내믹 시스템을 짜고 있으며, 각각의 특이점으로서의 생명, 자연, 사물, 기계 등이 어우러져 회복탄력성, 복원력, 신축성, 유연성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문제설정에 따라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제설정의 비스듬한 결합과 횡단성이 탄력적으로 문제해결의 가능성에 접근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물 대량 멸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경우의 수 하나하나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특이점으로서의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설립하는 특이성 생산의 과정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기존에 없던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특이화라고 해야 엄밀할 것이다. 여기서 새롭게 재설정되고 재발견되고 재발명된 특이점들이 상상력을 통해서 설립한 경우의 수라고 할 수 있다.

생태계는 인간, 사물, 자연, 기계, 생명 등이 어우러져 각각의 혼재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동역학적 시스템이다. 사진출처 : Tara Winstead
생태계는 인간, 사물, 자연, 기계, 생명 등이 어우러져 각각의 혼재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동역학적 시스템이다. 사진출처 : Tara Winstead

생태계는 다양한 경우의 수가 어우러진 탄력적이고 다이내믹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그 경우의 수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다. 경우의 수를 창안하는 것은 제도와 시스템일 수도 있고, 생활양식의 심원한 변화일 수도 있다. 동시에 생태계는 인간, 사물, 자연, 기계, 생명 등이 어우러져 각각의 혼재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동역학적 시스템이다. 여기서 강한 상호작용은 혼종적인 주체성으로 하여금 더욱 풍부화하고 다양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 ‘차이를 낳는 차이’로서의 시너지가 생기는 것이다. 약한 상호작용의 경우에는 주변부를 소외와 무위로 만들고 중심부에 센터를 두게 된다. 결국 강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태계의 경우의 수들이 탄력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두는 것이 필요하며, 이는 혼종적 주체성으로서의 인간-기계, 인간-미생물, 인간-생명 등이 얼마나 세계를 재창조하고 재특이화하느냐의 여부와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기후위기가 초래한 상상력 자체의 위기를 돌파할 특이성 생산과 생태계 조성을 어떻게 이루냐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예술은 특이성 생산을 통한 상상력의 경우의 수 설립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소재상으로 볼 때 기존의 것을 재활용한다 하더라도 연극적인 상상력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이를 재창조해낼 수 있다. 특이성 생산의 과정 자체를 볼 때 연극예술 자체가 갖고 있는 이야기구조의 설립의 과정이 규명될 수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거나, 기획회의를 하거나, 연극연습을 할 때 특이성 생산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이를 이행의 구성요소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연극의 과정을 재특이화 과정을 여러 가지로 실험하고 실천하면서 특이점 자체를 도모하고 부추기고 양육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나긴 기다림일지라도 그것이 나타나는 섬광과 같은 순간에 모든 인과관계, 시나리오, 선형적인 과정에 대한 설계 자체를 완벽히 바꾸고 전환할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특이성 생산은 가장 마지막 순간에 등장할 수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할 수도 있고, 희미하게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특이성 생산이 만드는 전환의 상상력은 바로 이 모든 경우에도 여백, 잉여, 잔여시간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에서의 핵심은 상상력이 넘치는 특이성 생산의 판짜기에 달려 있다.

3) 사회생태 : 기후위기는 인문학의 위기다

근세 초기 인문학은 르네상스 시기 동안 인간을 자연과 사물, 생명을 다스릴 수 있는 품격 있고 교양 있는 존재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사교적이고 사회적 실천의 가능성에 대해서 높게 평가했다. 이를 이어받은 임마누엘 칸트의 경우에는 신 중심의 초월적인(transcendental) 논의로부터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으로서의 인간의 선험적인(transcendent)의 논의로 바꾸면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의 기본 구도를 그려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사회는 미리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갈등과 모순, 대립이 있다 하더라도 곧 사회의 성숙으로 간다는 헤겔(Hegel)의 변증법(Dialectic) 논의로 진행된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미리 주어지지 않고 갈등과 대립은 사회의 와해와 해체로 향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제3세계에서의 기후난민의 현현이다. 또한 그러한 사회는 몸에 털이 자라듯 저절로 치유되거나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연발생설과 자가치유력의 신화인 자연주의는 생태주의가 아니다. 기후위기와 같이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문제는 인간사회의 치유력과 성숙에 따라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인간사회 자체를 전환하고 바꾸어나가는 구성적 과제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인륜성, 사교성, 사회성, 시민성을 급격히 잃어가고 있으며, 기후난민과 제3세계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결국 자신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기후위기는 인문학의 위기인 것이다.

기후위기 상황에 대해서 찬찬히 사색해 본 사람은 그것이 분명 과학적인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책이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이야기구조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인류세와 같이 인류의 절멸을 기정사실화하면서도 인문학의 탈을 쓰는 방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이야기구조는 보다 급진적이고 혁신적으로 인간이 해야 할 일과 사회를 형성하고 구성해야 내야 할 과제에 대해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100+10=110”이라는 함수론의 역치로서의 “110이 다시 100+10이 되려면”이라는 질문의 확률론인 사실처럼, 자본주의라는 함수론과 사회주의라는 집합론을 넘어서는 대안은 확률론적인 회복탄력성과 재귀론적인 순환성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문제의 입구와 해결의 출구는 다르며 “~은 ~이다”라는 의미화에 따라 문제해결의 단서가 잡히는 것이 아니라, “~이거나 ~이거나” 등으로 다양한 지도화를 통해서 메타모델화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후위기에 대면한 인문학은 수많은 이야기구조를 만들어내면서 입구와 출구를 달리하면서도 지도그리기를 해야 할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사회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며, 모순과 대립은 사회분열과 와해, 기후난민의 발생으로 귀결된다. 사회적인 것이 미리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의 연극예술활동은 끊임없이 구성적인 과제를 가질 것이다. 배우, 관객, 스탭, 연출 등은 모두 공동체와 사회를 재건하고 구성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정동과 활력, 생명력을 발휘해서 어떻게 사회적인 것을 재건하고 구성할 것인가가 기후위기 시대에서의 연극활동의 역할일 것이다. 많은 콘텐츠가 풍미하고 다양한 정보가 전달되는 상황에서도 삶의 좌표와 미래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에게 탈성장 전환사회로 향하자고, 따뜻하게 인도할 연극예술의 이야기구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 전환이 갖고 있는 이야기구조를 연극은 풍부하고 다양하게 전달하여 삶의 양식에 심원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연극은 사실성, 재현, 표상성, 관조성으로부터 벗어나, 무대와 관객의 위치설정을 허물고 지역사회와 다중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인류재건과 구성의 핵심믿음의 집단적인 리더십을 통해서 부차믿음으로서의 판 자체의 인문적 깊이와 잠재력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 연극이 한판 난장을 벌이는 것만이 아니라, 과정과 현장에서의 사회와 공동체의 구성과 재건의 역할을 통해서 끊임없는 분투와 결사항전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관료적인 지층이 다가올 때마다 이를 허무는 배치의 역할과 자세 역시도 필요하다. 결국 어떤 주인공이나 전문가 중심의 판이 아니라, 전환의 상상력, 인류재건의 인문학, 마음의 생태계가 조성되는 과정에서의 실천과 실험의 장으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입구이자 과정이자 출구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이 글은 2022년 《제40회 대한민국연극제 밀양 대한민국 연극 아카데미 설립을 위한 다원 포럼》에 발표 수록된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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