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는 인간과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또 생명이 그러한 경쟁을 통해서 진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오랜 만에 낮 시간에 동물병원을 나와 동부간선도로를 탔다. 외부 강연을 가는 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서 몇 대의 차들이 경쟁을 하듯이 스쳐 지나간다. 무슨 바쁜 일들이 생긴 것일까? 한두 대의 차가 아니라 몇 대의 차들이 다른 차들을 추월해서 가는 것을 보면 단지 급한 일이 생겨서만은 아닌 것 같다. 그저 누군가와 경쟁을 하듯이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거나 혹은 바쁘게 사는 것이 습관이 된 듯이 보인다.

경쟁이 일상이 된 우리의 삶, 우리는 이러한 삶을 너무도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 속에 내몰리면서 경쟁이 삶인 그러한 삶을 살고 있고 체질화 되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부터 아니 그 이전인 유치원부터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 속에 살아간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소위 유명 대학이라는 곳에 가는 것을 목표로 어린 시절부터 매진한다. 그러한 공부가 단지 아이의 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매달린다. 이것이 어느 한 집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그러하다. 이러한 경쟁은 단지 교육 과정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또한 그러하다. 아니 사회생활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전쟁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을 너무도 당연스럽게 여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경쟁을 하듯이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이러한 경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연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 연원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다윈의 진화론 또한 경쟁에 대한 생각을 공고히 한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다윈은 자연선택으로 생명체들이 ‘유전을 수반한 변이’를 이루어왔다고 주장하였으며 그것을 스펜서(H. Spencer)가 적자생존이라고 명명하면서 경쟁은 강조되었다. 이후로 다윈이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경쟁에서 더 강한 자가 살아남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더욱 진보된 생명체가 출현한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졌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강한 자가 진화된 생명체인 것이다.

  • 경쟁이 일상이 된 삶,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굴절된 사회
  • 다윈의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으로 <진화론>에 대한 오해

하지만 자연의 어느 생명체도 인간이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경쟁 속에서 한평생을 살아가지는 않는다. 많은 동물들은 짝짓기를 하는 동안에는 집단 동료와 경쟁을 하기도 하지만 그 외의 일상적인 삶은 상호 의존적이고 협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열악한 환경에서 종의 유지는 개체의 문제가 아니라 종 집단의 문제이다. 가혹하게 찬바람이 불어오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사슴이 죽느냐 살아남느냐의 문제는 동료 사슴을 경쟁에서 이겼을 때가 아니라 얼마나 무리를 잘 지어서 얼어 죽지 않고 또 협동하여 새로운 풀을 찾아가느냐에 있다. 또 늑대들이 사슴을 사냥한다고 하여 사슴이 늑대와의 경쟁을 통하여 늑대보다 더 강한 동물로 변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보다 더 근원적으로는 늑대가 사슴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합당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잡아 먹는 개체가 잡아먹히는 개체보다 더 강하다고 표현 하는 것이 바람직한 표현일까?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외부로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흡수해야 한다. 식물은 흙과 햇빛으로부터 그러한 부분을 충당하지만 식물 외의 존재는 다른 생명체에 의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곤충들과 초식동물들은 식물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면 풀을 뜯어먹는 메뚜기는 풀보다 강한 존재인가? 또 흙 속의 부유물에서 영양을 흡수하는 지렁이는 흙보다 강한 존재인가?

자연 생태계에는 ‘인간이 이야기하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 생태계에는 무척 다양한 생명체들이 각자의 적소에서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유기적 관계를 맺을 뿐이다.
자연 생태계에는 ‘인간이 이야기하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 생태계에는 무척 다양한 생명체들이 각자의 적소에서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유기적 관계를 맺을 뿐이다.

자연의 생명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강하거나 약한 존재로 구분하고, 또 좀 더 진화하고 좀 덜 진화하고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두 그 최상단에 인간을 위치시키려고 하는 인간의 우월적 판단일 뿐이다. 지렁이는 자신이 진화해온 공간인 흙속에서 살아가도록 나름의 진화의 과정을 밟았을 뿐이고, 메뚜기는 자신의 삶의 공간인 적소(niche)에 적응하여 진화하여 먹이인 풀을 먹을 뿐이다. 메뚜기가 풀을 갉아 먹으면서 “나는 너보다 우월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 사슴이 풀을 뜯어 먹고, 늑대가 사슴을 잡아먹으면서 “나는 너보다 우월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지 각자가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 모든 생명은 자신의 삶의 공간인 적소(niche)에 적응하여 진화,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뿐

그리하여 자연 생태계에는 ‘인간이 이야기하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 생태계에는 무척 다양한 생명체들이 각자의 적소에서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유기적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이렇게도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을 강조하며 경쟁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그것은 소위 경쟁의 승자들이 누리는 것들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까닭을 유추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모 국무총리 후보자는 5개월 만에 변호사 수임료로 16억을 벌어들인 것이 알려짐으로써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 프로야구 선수 중 1년 연봉을 최고 30억까지 받는 선수도 있다. 또 부동산을 통하여 막대한 불로소득을 안정적으로 얻는 이들이 있다.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이렇게 막대한 부를 쌓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것을 합리화시켜 주는 논리가 경쟁론이다. 그들은 경쟁에서 승리한 승리자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열매를 독식하는 것을 합리화한다. 영국인들이 ‘변이를 수반한 유전’이라는 말을 놔두고 굳이 진화론을 내세운 것도 같은 이유이다.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많은 식민지에서 착취와 약탈을 저질렀으며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할 근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진화론적으로 자신들이 더 진화되었고 또 적응을 잘한 형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그저 착취와 약탈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적자생존이란, 경쟁에서 승리한 승리자가
    그에 따른 열매를 독식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논리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른 생명체와 일상적으로 경쟁을 하지 않는다. 지렁이는 인간과 경쟁하지 않는다. 각자의 적소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또 환경의 변화 속에 개별적으로 적응하기보다는 무리와 협력하거나 더 나아가 다른 종과 공진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이 생명체 상호간에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하다못해 일상적인 운전조차도 다른 차와 경주를 하듯이 달린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각자의 길을 갈뿐이다.

박종무

지구 생명의 근원은 해님이라고 믿는 생태주의자. 해님의 에너지를 받는 지구 모든 생태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희망한다. 특히 동물들이 생태구성원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아픈 동물을 치료하고 동물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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