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는 매우 재미있으면서도 어색한 책이라는 점을 먼저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한 이 책은 광범위한 참고문헌과 자료들을 넘나들며, 그녀가 가진 개인적 특성들을 매개로 다양한 영역을 경유하고 마침내는 체제와 세계관에 이른다. 이처럼 방대한 책의 내용을 요약하기보다 책의 후반부에 저자, 나오미 클라인이 새로 발견한 길에 주목한다. 더불어 이 글은 발제문(‘얽힘과 말걸기’)에서 드러난 문제의식과 해법에 간략한 의견을 더해 마무리한다.
관계적 세계관과 불교적 자각
토론문에서 제기한 문제의식, “광장에서 확인한 우리를 지속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광장을 어떻게 사회화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저자(나오미 클라인)의 고민을 함축하고 있다. 나 역시 외와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책과 토론문에는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공동체적 대안’(526쪽)이라는 이름으로 대강의 방향성이 제시되어 있다. 이 해법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그래서 상호의존적인 세상의 실상(實相)을 바로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불교의 시각과 연결된다.
이 해법은, ‘모든 존재, 특히 사람들은 분리・독립되어 있다’는 오래된 가치와 믿음(실체론적 세계관)을 무명(無明) 혹은 전도몽상이라고 비판하고 ‘우리는 생각처럼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521쪽)’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불교의 처방과도 이어진다. 저자가 수행(修行)한 ‘불교적 내려놓기’와 ‘불교적 거리두기’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나아가 불교는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수용하고 믿는다면 자비심(慈悲心)이 발현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비의 마음은 자비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 사례가 이 책의 518-520쪽에 소개된 세계 최대의 산호초인 그레이트배리어리프 연구자 찰리 배런이다. 그는 산호 연구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아울러 바라볼 정신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이를 ‘탈중심화 과정’으로 명명하였다. 탈중심화는 산호나 물고기의 심정(心情)되기로 나아가고, 이는 자아를 실체로 규정하는 자아관을 벗어나 자아와 타자를 관계 중심으로 사고하는 탈자아(脫自我)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이를 우리는 틱낫한 스님의 시 「너와 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너와 나」
너는 나고, 나는 너다.
우리 서로 ‘안에 있음’이 자명하잖은가?
나는 네 속에 꽃을 기르고
그래서 내가 아름답게 피어난다.
나는 내 속에 찌꺼기를 변화시키고
그래서 네가 고통을 겪지 않는다.
나는 너를 버텨주고
너는 나를 버텨준다.
너에게 평화를 주고자 나는 이 세상에 있고
나를 기쁘게 하고자 너는 이 세상에 있다.
“천지는 나와 한 뿌리, 만물은 나와 한 몸(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사진출처 : CIMMYT
불교 신도라면 익숙한 이 구절은 세상은, 사회는,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법에 기초한 사유방식을 대표한다. 이 연기적 사유에 근거해 달라이 라마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와 너를 구분하는 우리, 사람들의 모습을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고 비판한다. 달라이 라마의 이 비판은 토론문에 ‘인식하고 있지만 그저 부정하지 않고 인식하기만 하는 자아는?’이라는 물음과도 궤를 같이한다. 생태적 세계관, 관계론적 세계관 등처럼 실체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며 대안으로 이야기되는 다양한 이름의 세계관을 접하고 머리를 끄덕이고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해도, 책을 덥거나 TV를 끄거나 유튜브 속 영상을 닫거나 워크샵을 마치면, 그래서 광장에서 형성된 우리가 ‘광장을 떠나 집에 도착하면’ 탈중심-탈자아는 구심력의 저항에 다시 중심과 자아로 되돌아간다. 지식과 앎은 거기에 머물고-그치고, 행동으로 발화하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아무리 자비 마음, 화해와 용서의 정신, 배려하는 마음, 보살피는 마음을 내어도 나와 그들의 갈등 해소, 나아가 행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탈중심적 삶의 가능성과 과제
사람들이 다시 각자의 집에 머무는 이유에 대해 토론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제는 단지 특정한 기술이나 정책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정하지 못한 데 있다.”
일견 동의하지만, 꼭 그렇지 않으며 다른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해법들이 이미 여러 보고서에 잘 나와 있다”라고 지적했듯이, 우리가 희망하는 사회의 모습에 대한 대강의 합의는 수많은 보고서에 이미 적시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대안 문명의 어렴풋한 모습도 거의 유사하다. 실제 다양한 생태 공동체들의 살아가는 방식, 지향하는 바도 비슷비슷하다.
문제는 이러한 삶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이쪽도 적고, 저쪽은 애초에 ‘아니 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전환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전환에 주목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사례를 모으고 조직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지역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실험들에 대한 논의들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려는 노력, 자신들의 새로운 실천을 드러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와 사람들 사이에서도 교류하고 관련 내용을 축적하는 작업도 진행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생태 공동체 운동은 관계망에서 분리・독립・단절된 삶과 자아를 치유하고 생태적 연결성을 회복하려는 대안적 삶의 구체적 표현이기도 하다. 기후생태위기와 자본주의적 소외와 고립에 대한 반응으로, 이 운동은 탈성장의 목표를 내면화한 새로운 삶의 형식이며, 기존 체제 바깥에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분산된 저항이자 문명전환의 실험장이다.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지식이 실천으로, 정서적 감정이입이 실천적 공감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한 설명으로 이 책에서 접한 ‘아니 보기(unseeing)’라는 개념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처음 이 단어를 접할 때 솔직히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쓸데없는 조어라고 생각되었다. 한데,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실천으로 전환되지 않도록 하는 그 기제, 정서적 공감이 실천적 공감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그 무엇이 ‘아니 보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제기된 ‘아니 보기’는 다양한 의미와 태도를 포함한다. 첫째, 외면과 무시이다. 불편하거나 위협적인 진실, 모순, 불평등 등을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보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둘째, 인지적 회피이다. 자신의 신념 체계나 세계관과 충돌하는 정보나 사실을 인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방어 기제이다. 셋째, 구조적 무지이다. 사회 시스템이나 권력 구조가 특정 사실이나 관점을 보이지 않게 만들거나 중요하지 않게 취급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마지막 넷째, 능동적인 무시이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특정 정보를 차단하거나 배제함으로써 ‘보지 않으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선거 국면에서 각 진영은 상대방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많은 것들을 아니 본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것들 중 많은 것들을 아니 본다. 이게 사실인 듯하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현실을 인지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정체성을 강화한다. 강화된 정체성은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심화한다. 초기에 언급한 불교 논의에서 무명과 전도몽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불교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이야기한다. 사물・사건・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관찰사유를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아니 보기’를 하지 않기 위한 의도적 노력이 여실지견이며, 이를 위한 관찰사유가 필요하다.
도플갱어를 직면하기
마지막으로, 이 책의 진정한 덕목은 나오미 클라인의 고백이다. 클라인 자신의 짝퉁(분신)이라고 규정한 나오미 울프가 20살 시절에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실이 있으며, 울프는 클라인 자신을 짝퉁이라고 분신이라고 대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고백한다.
관계적 사유방식인 연기(緣起)법을 핵심 교리로 하는 불교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그물’에 비유한다. 인도 토착신 재석천(인드라)이 머무는 궁전 위에는 그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사방으로 끝없는 이 그물의 모든 그물코에는 구슬이 달려 있다. 이 구슬에 다른 모든 구슬이 비치고 그 구슬은 동시에 다른 모든 구슬에 비춰진다. 그 구슬에 비춰진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다시 다른 모든 구슬에 거듭 비춰진다. 구슬들은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구슬에 비치는 다른 구슬들은 이웃, 친한 사람, 동료,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구술에는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혹은 가치가 달라서 대립하는 사람들, 경쟁하는 사람들, 여러 이유에서 다투는 사람이나 집단도 나의 구슬에 비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와 유사하거나 좋아하는 구슬만을 인정하고, 불편한 반영은 외면한다. 그 반영이 바로 ‘도플갱어’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타자 안에는 종종 우리가 미처 인정하지 못한 우리의 일부가 투사되어 있다. 클라인은 그 불편함을 직면한다. 그리고 좌파와 우파는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통해 드러나는 관계망의 일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자각은 ‘아니 보기’에서 ‘여실지견’으로 나아가는 전환의 한 실마리이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실천적 자비이며, 대립의 시대를 넘어서는 연기의 윤리이다.